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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창에서 승리하라- 패스 오브 글로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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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6 13:17

1. 게임 하기 어려워

보드게임 취미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 시기를 돌아보면 시작은 이랬던 것 같다. 먼저 보드게임 취미에 이미 발을 들인 누군가가 함께 보드게임을 하자고 했을 때, 그는 생판 처음 보는 게임을 싸들고 왔다. 이런 게임도 있었어? 재미있다. 이윽고 나는 이런 저런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게임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알아보니 가족용 게임이나 간단한 게임은 한글판이 간간히 출시되었지만, 다채로운 액션으로 신선한 재미를 선사했던 게임들은 대부분 영문판이었고, 이를 구하기는 참 요원했다. 특정 사이트에서는 불시에 몇개의 보드게임이 직수입 되고, 그 게임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들어왔을 때 망설임 없이 구매해야만 했다.

사실 지금에야 먼 옛날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직구가 낯설던 시절에는 게임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해지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해외에서 잘 나가는 보드게임이 국내 사이트에 입고되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환호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해외 보드게임을 구했다 하더라도 몇 가지 관문이 더 남아있었다. 나 같은 영알못들은 게임을 구했다 해도 당장 플레이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단 룰을 파악하는 문제부터. 만일 룰을 알고 있는 누군가의 설명을 통해 룰을 알았다고 해도, 그리하여 내가 모든 내용을 익혔다 해도, 이 게임을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공용 보드야 그때그때 설명한다 쳐도, 비공개로 손에 들고 플레이해야 하는 카드들은?

(존 컴퍼니. 까만 건 글씨고, 하얀 건 배경이라.)

그 와중에 고마우신 분들의 카드 및 룰북 번역 및 한글화가 곳곳의 자료실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가 가진 게임의 한글화 자료가 눈에 띄면 가슴속에 들불이 타오르는 듯 했다. 게임의 룰북을 출력하여 읽어보고, 카드에 한글자료를 프린트해서 덧입히며 카드의 문구를 읽어본다. 그리고 안도한다. 아, 이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게임 할 수 있겠구나.

광속품절의 경쟁 속에서 어렵사리 게임을 구했다 하더라도 고마우신 누군가가 룰북을 번역해주지 않았다면, 그 분들이 한글화 자료를 업로드 해주지 않았더라면 그 게임을 제대로 즐길 수 없었을 것이다. 어찌보면 나와 보드게임의 인연이란 홀로였다면 결코 여기까지 닿을 수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은연중에 보드게임을 즐기는 많은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마 오롯이 보드게임을 즐길 깜냥도 되지 않았을텐데, 누군가가 노고를 마다하지 않은 덕에 내가 이 게임을 즐기고 있구나 하고 말이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지 그 시절의 게임을 보고 있노라면 애착도 가고 마음도 조금은 따뜻해진다.

2. 이게 한글화가 된다고?

언제부턴가 보드게임의 저변이 넓어지며 이게 한글화가 된다고? 싶었던 작품이 하나 둘 한글판으로 출시되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글판 출시작 중 가장 처음 충격을 준 작품은 쓰루 디 에이지스였다. 와, 이 게임이 한글로 출시되다니. 수 백장의 카드가 전부 한글로 번역되어 출시된다고? 이거 진짜야?

(쓰루 디 에이지스(구판). 이게 한글판으로 출시된다고?)

이후 다른 게임들도 하나 둘 한글이 덧입혀져 출시되기 시작했다. 보드게이머들의 속칭 '대한글화시대' 이전 한번 더 한글판 출시로 나를 놀라게 한 게임은 '황혼의 투쟁'이었다. 이 게임은 언젠가 한글판으로 출시 될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는 분명 있었다. 하지만 투박하고 매니악한, 어찌보면 즐기는 사람들만 즐기는 GMT게임의 한글판 출시가 정말 될까 싶은 의구심 또한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게 정말 되는구나.

이후 여러 게임들이 한글화가 되어가면서 점차 내 책장에도 한글판 게임의 빈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한글화에 대한 감흥 또한 무뎌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이런 소식이 들려왔다. '패스 오브 글로리' 한글판 확정. 진짜 두 눈을 의심했다. 이게 나온다고? 말이 돼? 이 게임이 한글화가 된다고? 이제는 내 손에 한글로 프린팅 된 이 게임이 들려있음에도 믿기지가 않는다. 이게 한글판이 나왔다고?

워게이머에게는 기념비와도 같은 게임. 명작이라고도 불리는 게임. 꼭 워게이머가 아니더라도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본 게임. 이 게임의 한글판이 출시되었다니.

3. 패스 오브 글로리

패스 오브 글로리는 1차 세계대전을 기반으로 한 워게임이다. 2인 전용 게임이며, 양측은 각각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등)과 연합국(영국, 프랑스, 세르비아, 이탈리아 등)을 맡아 플레이 하게 된다.

대부분의 워게임은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펼쳐지는 시뮬레이션 장르에 가깝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역사 지식은 알고 있는 것이 몰입하기에 더욱 좋다고 본다. 물론 그 시대를 좋아한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나 또한 1차 세계대전의 지식은 부족한 편일지라도, 대략 어떻게 전쟁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전쟁의 양상이 어떠했는지는 알고 있다. 그래서 슐리펜 계획이라든지, 치머만 전보 사건, 볼셰비키 혁명 등 굵직한 몇 가지는 알고 플레이 하는 것이 조금 더 흥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8월의 포성 카드 이벤트 이후 플레이 개시.)

플레이 절차는 다음과 같다. 각각 자신의 진영 덱을 준비한 후 핸드에 7장(옵션룰로 8장을 받기도 한다)을 쥐고, 의무공격 주사위를 굴린다. 의무공격이란, 해당 진영이 이번 턴 내에 반드시 공격해야 하며, 이를 지키지 못했을 때 패널티를 받게 된다는 룰이다.

의무공격이 정해지면 동맹군부터 번갈아 카드를 내며 액션을 각각 6번 진행하게 된다. 카드의 용도는 총 4가지로 나누어 그 중 한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데, 각각 이벤트, 작전, 전략재배치, 재편으로 나눌 수 있다.

이벤트는 카드에 지시된 텍스트를 기반으로 플레이 하게 되며, 작전은 각 칸에 놓여진 유닛의 이동이나 공격명령을 내릴 때 사용한다. 전략재배치는 병력의 장거리 수송 등으로 사용하며, 마지막으로 재편은 카드를 이용한 액션을 마친 후, 병력을 소집하거나 충원할 때 해당 포인트를 소진하고 사용할 수 있다.

(치열한 서부전선에서의 일진일퇴)

이 게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게 될 액션은 아무래도 작전이다. 워게임이다보니 공격이나 이동에 많은 포인트를 투자해야 한다. 여기서 이 게임의 재미있는 점은 이동 후 공격과 같은 복합액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수의 병력으로도 상대의 턴을 소진할 수 있는 전략이 가능하다. 가령 상대의 대군이 전방으로 이동하려고 준비중일 때 나는 1개 군단으로 적의 이동경로 한 칸 더 뒤로 이동하여 앞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상대방은 이동에 한 턴, 공격에 한 턴, 다시 이동에 한턴. 이렇게 총 세 턴을 소진해야만 한다. 이렇듯 여러 배치를 응용하면 상당히 많은 전략을 세울 수 있다.

이와 같은 전략이 가능한 이유는 공격과 이동의 분화 뿐만 아니라 보급이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유닛은 자신의 보급처로부터 이어진 공간에 있어야만 명령을 내릴 수 있다. 만일 이로부터 끊어지게 되면 아무런 명령도 내릴 수 없고, 행동라운드가 종료되면 모든 유닛이 게임으로부터 제거되는 엄청난 패널티를 받는다.

그래서 위와 같은 견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대군이 애매한 위치의 상대 군단을 무시하고 기동하는 순간, 그 군단은 대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다. 그래서 잃을 것이 많은(?) 대군의 기동은 더욱 신중해진다.

(전투 카드의 경우는 전투 전에 사용하면 이로운 효과를 주지만, 남발하면 작전포인트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도 있다.)

여튼 이러한 액션페이즈 종료후에 위와 같이 유닛의 보급을 확인하고, 포위하는 요새를 공성하는 페이즈를 갖는다. 이후 게임의 종료조건 등을 확인하고, 유닛을 재편하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핸드의 카드를 보충받고 다음라운드를 시작하면 된다.

게임의 종료조건은 꽤나 심플하다. 게임 내 승점은 10점부터 시작하여 마치 줄다리기처럼 뺏고 빼앗기게 되는데, 승점확인 페이즈 단계에서 게임의 무게추가 완전히 기울어 한쪽 승점이 0이나 20점이 되면 종료된다. 만일 모든 턴 종료 후에도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면, 해당 승점을 확인하여 우세한 쪽의 승리가 된다. 해당 게임의 승리를 위한 승점은 게임 중 어떤 카드를 썼는지, 어떤 시나리오의 게임을 즐겼는지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다.

그리고 게임 내 특정 조건에서 평화협정이 가능한데, 상대가 이를 제시했을 경우 내가 수락한다면 게임은 승점과 관계없이 무승부로 종료된다. 거절할 경우에는 주사위를 굴려서 승점이 변화하는 부분이 있지만, 사실 룰이 그렇다는 거지 거절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게임을 중단해야 하는 이유야 여러가지 있을 수 있지만, 너무 지쳐서 그렇다거나 시간이 너무 늦었거나 뭐 그런 이유가 아닐까? 같이 게임하던 한 명이 이제 그만하자고 하는데, 그걸 거절하면서 주사위 굴릴 사람이 정말 몇이나 될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한번은 굳이 이 룰을 왜 만들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짐작컨대 플레이타임이 길다보니 게이머는 필연적으로 게임을 중간에 접어야 할 때가 생길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게임의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보드판을 접기보다, 평화 협정을 맺었으니 무승부라는 룰을 명문화하여 그 자체를 게임의 일부로 만들어 둔 게 아닐까 싶었다. 게임을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접는다는 아쉬움을 그대로 두기보다, 접는 과정 자체를 게임의 일부로 만들어 둔 디자이너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카드 이벤트로 증원할 수 있는 증원군)

여튼 게임의 큰 틀은 이와 같이 흘러가지만, 이 게임의 재미있는 점은 진행 과정 상의 반복 요소로 뭔가 지루해 질 때 쯤이면 새로운 요소가 등장하여 긴장의 끈을 유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초반 독일과 프랑스의 접전 및 동부전선 러시아와의 전개가 익숙해질 무렵이면, 오스만의 참전으로 근동이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과 같은 중립국의 참전, 이후 이탈리아의 등장까지 유럽 내 긴장이 총체적으로 증가한다. 또한 게임이 총력전으로 진행되어 종반으로 접어들면 서서히 러시아가 퇴장하고 미국이 참전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참전은 오스만 이외에는 강제적인 것만도 아니다. 물론 이탈리아의 참전은 승점과 연계된 반강제적 요소가 있지만, 다른 국가의 참전은 카드의 사용 유무에 따라 정해지게 되니 그곳에 병력을 미리 주둔시킨다든지 하는 플레이는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그럴 여유도 없겠지만.

4. 이거, 의외로?

이 게임의 가장 큰 장점은 비교적 쉬운 룰로 전략단위 워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당연히 워게임 치고는 쉬운 룰이겠지만. 룰북을 한 번만 정독해도 큰 흐름 파악에는 무리가 없다. 해군과 육군으로 나뉜 것도 아니어서 상륙해야 할 때의 제한이라든지, 해전과 육전의 차이라든지 그런 것도 고려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모든 유닛 토큰은 국가 간 스탯의 차이가 있을 지언정, 군과 군단 딱 두 종류 뿐이다. 그래서 어떤 병종은 어떻고, 상성이 어떻고 하는 개념도 없다.

또한 지형이 심플하고, 이동의 제약도 없다. 대부분의 워게임이나 그 비스무리한 게임을 진행했을 때 내가 항상 놓치는 룰이 요놈의 이동룰이다. 게임에 익숙하지 않다면 꼭 어딜 지나갈 때 맵에 쪼끄맣게 되어있는 무슨 표시를 놓쳐서 그냥 지나친다든지 할 때가 간혹 있다. 이게 별 것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 실수가 나비효과가 될 때가 꼭 있으니 그게 환장할 노릇이다. 이 게임 또한 지형의 구분이 있어 어디를 이동할 때 이동력 몇이 필요하고, 어디는 멈춰야하고 이런 잔룰이 있을 법 하지만, 다행히 이 게임에는 그런 룰이 없다. 그냥 모든 지형은 1의 이동력이 소모되면 끝이다. 그게 디테일한 면에서는 불만일 수 도 있으나, 게임의 규모 상 그런 지형의 구분은 크게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게 좋겠다.

(이동 명령을 받고 대기중인 러시아군)

하지만 전투에서는 지형의 구분이 꽤 명확한 편이다. 산지나 사막, 숲 등 다양한 지형은 전투로 인한 보정이나 후퇴, 진격에 따른 보정을 조금씩 받는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어려운 편은 아니다. 일단 전투 시작 전에 지형체크만 딱 한 번 해주면 나머지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

그렇다 해도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대 이런 룰은 게임을 정신 없이 하다보면 놓치기도 쉽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보통 이러한 룰은 최대한 알려주고 게임 상에서도 잘 짚어주되 이득될만한 요소는 꼭 찾아먹으라고 일러두곤 한다.

만일 어떤 전투에서 어떤 지형의 효과로 수비측이 1의 피해만 입었어야 했는데, 3의 피해를 입었다고 하자. 그 진행의 오류가 한 세 턴 지났을 때 밝혀졌다면, 이미 게임은 그 전투를 복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진행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모두를 무르거나 계속 그 상황을 담아두기보다는 그대로 진행하는 게 속 편하다고 생각 한다. 이어 그런 상황을 알지 못하고 넘어간 것도 전투의 일부로 여기는 편이다. 그래야 마음도 편하고, 게임 진행 상에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뭐, 역사 속에서도 산세가 험한데 애먼 곳에 진을 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아니한가.

다른 게임 이야기지만, 도미넌트 스피시즈에서도 우점종 원뿔의 제거나 변경을 인지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건 에러플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역량이라고 룰에 박아둔 것이 참 인상 깊었다. 이렇듯 다른 게임도 자신에게 유리한 효과를 적용하지 못했다 해서 다시 진행해야 한다면 그것 또한 게임의 허들을 너무 높이는 일 같다.

(독일이 프랑스를 뚫기 위해서는 참호와 요새, 그리고 험난한 지형을 넘어야 한다)

이야기가 잠시 다른 곳으로 샜지만, 여튼 이 게임에서도 지형이나 참호 유무, 혹은 전투 카드에 따라 약간의 전투력 조정을 마친 후에는, 주사위를 한 번 굴려 나온 값으로 승패를 모두 결정 짓는다. 일견 생사를 건 대전투가 주사위 한 방에 허무하게 끝날 수도 있지만, 이 게임에서 전투 줄다리기는 가열차게 일어나기 때문에 요런 스피디함이 오히려 장점이라 느끼게 될 것이다. 전투 한 번이 게임의 승패에 어느 정도 영향은 줄 지언정, 모든 향방을 결정 지을만한 요소 또한 아니기에.

그리고 전투와 더불어 이동이 중요하게 자리잡은 것이 인상 깊었다. 보통 요런 게임을 할 때는 이동이 공격보다 덜 중요한, 어찌보면 공격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써의 행동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자리를 잘 잡은 군단 하나는 상대 몇개 군이 진격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이는 앞서 언급하였듯 끊고 끊기는 보급로의 존재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동은 정말 중요한 액션이며, 이를 위해서 더욱 효율적인 배치를 할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싸움임에도 상대 진영에 무작정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소. 어찌보면 전투보다 중요한, 이 게임의 핵심이지 않을까. 다른 시선으로 보면 전선을 고착화 시키는 원흉이 될 수도 있지만,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했다. 삐끗 하다가는 상대의 기동 한번에 대군이 전멸할 수도 있으니. 그래서 서부전선 초기 전황을 보면, 독일이 파리를 조기 함락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게 체감된다. 아! 고지가 코 앞이거늘, 왜 더 움직이질 못하니.

(서부 전선은 너무 깊이 들어가면 안될 것 같아)

야금야금 진입해 들어오는 영국과, 질 것 같이 지지 않는 프랑스가 얄밉다. 증원되는 군의 전투력 하나하나가 사기같은 독일이 얄밉다. 점차 전쟁이 고조되며 새롭게 추가되는 카드에서 뿜어져나오는 역사적 맥락의 이벤트, 소모되는 병력에 예비군까지 끌어쓰며 틀어막고 막히는 상대와의 혈전까지. 끝까지 알 수 없는 승부의 연속은 게이머를 더욱 몰입하게 한다. 물론 게임이기에 그저 즐길 수 있음이 감사할 따름이지만.

5. 잔룰, 잔룰? 잔룰!

워게임의 장점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보통의 보드게임과는 장르가 다르다고 표현하면 좋을까? 일상적으로 표현하기를 패밀리게임, 유로게임처럼 워게임이라는 장르를 나누어 이야기 하듯이.

오죽하면 워게임을 즐겨하는 게이머층이 따로 있을까. 역사와 전쟁을 흥미있게 바라보고, 상대와의 직접적이면서 격렬한 상호작용을 즐길 수 있는 대표적 게임장르가 바로 워게임이 아닐까.

그런데 그렇게 좋은 게임인데, 즐기는 사람이 다른 보드게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접근성이 상당히 떨어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워게임이 갖는 일반적인 진입장벽을 포함하여 이 게임이 갖는 한계에 대해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이 게임의 진입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 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 적어놓기로는 뭔가 엄청 쉬운 것 처럼 적어두었지만, 일반적인 워게임에 비해 쉬운 축에 속한다는 것 뿐, 보드게임 전체 카테고리에서 바라보면 상당히 어려운 게임에 속한다. 단적인 예로, 상대에게 룰을 대강 알려주는 데만 두 시간 가량 소요되었다.

룰이 어렵다는 말은 알아야 할 룰이 어마무시하게 많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미국, 러시아의 잔룰를 비롯한 각 국가의 잔룰, 각 국가의 병력마다 갖는 특성, 영연방국인 호주와 캐나다군이 갖는 특성 등. 그 뿐만 아니다. 1턴에만 있는 잔룰, 1턴과 2턴에 있는 잔룰, 어느 지역에만 존재하는 잔룰이 있다. 특히 근동지역만이 갖고있는 특수한 룰이 정말 많다. 룰북을 보면 대부분의 룰에 일반적인 사항을 적어두고는 근동에서의 룰이 따로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역사적 맥락에서 이러한 룰이 쓰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는 있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잔룰을 익히다 보면 문득 생각이 든다. 이 병사들, 그냥 쓰지 말까?

(오스만이 참전하면 어떤 의미로든 잠시 뇌정지가 온다.)

아마 룰북을 정독해보면 알겠지만, 무엇무엇을 할 수 있다. 단, 무엇은 예외이다. 라는 문장을 엄청나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거,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처음 게임을 사들고 룰북을 접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헷갈린다. 그에 더해 이 게임을 익히기 어려운 이유로 GMT게임 룰북 특유의 가독성 문제도 한몫 하는 것 같다. 다행인지 룰북 뒤에 국가마다 필요한 잔룰을 요약해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나는 잔룰을 별개의 문서로 저장해두고 수시로 읽고 있지만, 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확하지 않은 룰지식으로 게임을 하기도 뭐한 것이, 이러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답변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면 게임의 흐름이 뚝뚝 끊어질 수도 있다. 어, 이런 상황에서는? 잠깐만 룰북좀 읽어볼게, 어디 써있더라(약 40페이지 가량의 룰북을 뒤적이며). 만일 모든 상황마다 이런 식이라면, 게임의 흥미가 팍 식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모든 상황을 익히지는 못하더라도, 최소 한 명은 게임이 무리없이 진행될 수 있을 정도로 익힌 후에 플레이 해야한다.

또한 예전 황혼의 투쟁 리뷰에서도 언급했던 단점을 이 친구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2인 전용 게임이라는 장벽, 주사위로 성패를 가릴 수 밖에 없는 전투 시스템, 역사 테마 게임의 흥미 이슈까지.

특히 이 게임의 시대적 배경은, 비교적 많은 미디어나 여타 매체에 노출되어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고 있을 2차 세계대전이 아닌,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 중 그나마 최근 많이 알려진 영화가 '1917'인데, 그 영화만으로1차 세계대전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리 만무하지 않을까.

(영화 1917. 우리나라에서는 기생충에 가려진 측면이 있다. (출처 : https://image.tmdb.org/t/p/original/u2oRQqUashBBIj5UNeOd5TN0bmB.jpg))

그리고 플레이 하면 느끼겠지만, 몇몇 카드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카드를 작전으로 활용하게 된다. 평범한 이벤트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는 게 좋겠다. 작전값이 4 이상이면 이벤트로 날려버리기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싸구려 카드들 날려버리고 포인트 높은 카드로만 덱압축하고 싶은 욕심, 분명히 든다. 그래서 생각보다 역사적 사건들이 잘 일어나는 것 같지가 않다.

위의 단점에 더해 이 게임이 가지고 있는 정말 큰 장벽이 하나 더 있다. 풀게임 기준 플레이 타임이 어마무시하다는 것이다. 만일 초플 20턴 모두 진행한다면 12시간 이상은 족히 잡아먹을 듯한 느낌. 물론 20턴 이전에 끝날 수도 있고, 총력전에 들어가기 전의 시나리오인 10턴 플레이를 목표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나 미국참전과 같은 이벤트는 일어나지도 않는다.

애초에 20턴까지 플레이 할 수 있는데 10턴에 게임이 끝났다는 사실과, 처음부터 10턴까지만 플레이할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플레이한다는 것은 뭔가 마음가짐도 다르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10턴 플레이가 짧은 것도 아니다. 숙련자가 아닌 이상 10턴만 플레이 해도 7~8시간은 잡아야 한다.

6. '보드게임' 패스 오브 글로리

위에서 패스 오브 글로리의 장단점에 대해 글을 적어두었지만, 정작 여타 보드게임과 비교하였을 때의 독특한 요소에 대해 언급은 하지 못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게임의 장점을 글로 표현한다면, 결국 다른 워게임을 플레이하며 느낀 점과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게임에서 느낀 바를 조금만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직접적 상호작용으로 발생하는 긴장감이나 승부의 짜릿함이 다른 보드게임에 비해 도드라지는 느낌을 받는다. 일꾼 놓기 등의 간접적 견제와 직접 상대 병력과 직접 전투를 치르는 게임의 상호작용은 확실히 다르다. 그래서 그런지 시간이 뜬다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어렵다. 나 또한 상대의 턴에 끊임없이 응수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부전선의 치열한 현장. 서부전선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또한 카드 사용의 다양성과 보드 유닛의 움직임으로 인해 선택지가 상당히 다양해진다. 어떤 게임은 몇 가지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고민하게 되지만, 이 게임은 일단 카드의 사용처부터 특정 유닛의 움직임까지 모두 자신이 해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선택지가 다양해진다. 비록 큰 줄기는 역사와 함께 흐르지만 어떤 유닛이 어떻게 움직였느냐에 따라 세밀한 양상은 매번 달라지는 것이 이 게임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어떤 테마게임보다 더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정말 한 집단의 사령관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 네모난 토큰이 정말 병사처럼 보이고, 잘 버텨주는 특정 군에 애착을 가질 수도 있다. 전선마다 바뀌는 전황은 환호와 좌절을 동시에 느끼게도 한다. 이러한 몰입감은 다른 장르의 게임에서는 쉽사리 느끼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다른 워게임의 장점을 써둔다 해도 비슷한 결론이 도출되겠지만,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게임마다 다른 변주와 재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러한 장르의 게임이 가진 장점인 것 같다. 병종, 시대, 지역이 달라지는 것으로도 다른 몰입감을 준다는 것이 참 오묘하기도 하다.

7. 이 게임 어떻게 하지?

어찌보면 이 게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딜레마와 같다. 정말 재미있는데, 진입 장벽이 너무 높다. 하면 즐거울거라 확신하는데, 그 확신을 주기까지 많은 허들을 넘어야 한다. 예를 들면 등산과도 비유할 수 있겠다. 등산, 하면 참 좋다. 정상에 올라 맑은 공기도 마시고. 그런데 누군가와 함께 산을 올라야 하는 게 문제이다. 설득 하기도 힘들다. 그에 더해 나 조차도 오르기 귀찮다.

마냥 좋아 좋아만 외치는 것으로 이 게임이 갖고있는 재미를 전달하기는 참 어렵다. 아, 황투 정도의 난이도와 플레이 타임만 되었더라도 지금의 10배는 더 많은 사람들이 즐겼을 텐데.

그래서 처음 하는 사람들과는 그냥 잔룰의 가지를 조금 쳐내며 진행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정말 중요한 몇가지 특수한 룰만 빼고, 나머지는 일반적인 룰처럼 그냥 한 번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게임에 익숙해졌다면, 다음에는 지난 룰에 더해 새로운 잔룰을 추가해 보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5턴 종료 직후. 약 4시간 경과)

그에 더해 나는 황혼의 투쟁과 같은 헤드라인 페이즈를 더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패스 오브 글로리를 플레이 하다보면 이벤트보다는 작전을 훨씬 많이 사용하게 되고, 그로 인한 덱의 소모가 잘 일어나지 않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상황이 변화한다 한들 드라마틱한 변화 또한 생기지 않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할까?

가령 상대는 동원전이고 나는 제한전인데 뭔가 상황이 크게 변한 것 같지가 않다. 물론 다른 다채로운 이벤트가 내 손에 들리기야 하겠지만, 크게 변화한 느낌 보다는 덱이 불어났다는 느낌 정도?

어디선가 읽기를 황혼의 투쟁 디자이너가 헤드라인을 룰에 추가한 이유는 이벤트를 강제적으로 수행하기 위함이라 언급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이 게임에서도 그런 게 있다면 조금은 더 활발하게 덱을 소모하고, 더욱 다채로운 이벤트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아무리 워게임이라지만 20턴 풀게임은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기에는 너무 긴 것 같다. 이 게임만을 위해서 하루를 통째로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다고 10턴만 하고 끝내기에는 너무 아쉬운 것이 총력전은 맛도 못보는 상황 또한 참 아쉽다. 그래서 턴을 조금 줄이고 후반까지 즐길 수 있는 수정 단축룰이 나온다면 조금이나마 더 많은 사람들이 부담없이 즐기지 않을까 예상한다.

8. 마무리

즐거움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게임이다. 정말 재미있다. 엄청난 게임이다. 그런데 이 게임을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아쉽다. 정말 좋은 게임인데 함부로 권하기도 어렵다. "쉽게 할 수 있을거야." 일반적인 보드게임을 즐기는 게이머에게는 분명 거짓말이다.

하지만 도전해볼 용기와 배짱이 있다면, 분명히 이전에 겪었던 다른 게임과는 다른 엄청난 재미를 선사해 줄 것이다. 아, 너는 워게임 좋아하니까 그럴 수 있지. 물론 나는 그렇다. 허나 그렇다 해서 다른 보드게이머가 이 게임을 즐겼을 때, 재미가 없다고 단언 할 수도 없다. 이번에 함께 플레이한 분 또한 일반적인 보드게임이나 유로게임을 즐기며, 워게임을 접하지 못한 분이었음에도 엄청나게 몰입하며 즐기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목격했으니.

(1차 세계대전 당시 사진. 게임은 게임으로. 실제 전쟁은 당연히 참혹하다.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1%EC%B0%A8_%EC%84%B8%EA%B3%84_%EB%8C%80%EC%A0%84))

워게임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이 게임이 출시 후 25년이 지난 지금에야 한글판이 출시된 이유가 무엇일까. 분명 타 인기게임에 비해 판매량이 저조하리라 예상될지라도, 이 게임의 한글판을 출시하게 된 배경은 분명 있을 것이다. 혹 이 게임만이 갖고 있는 엄청난 재미를 직접 느껴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아, 그저 누군가 즐길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으로 한글판을 출시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물론 '은전 한 닢' 처럼, 이 게임의 한글판을 그저 직접 보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명색이 워게임의 최고 명작이라 불리는 게임이 한글판으로 출시되었다는 것이, 그래서 과거는 구매조차 어려웠던 이 게임이 환골탈태하여 가격, 접근성 무엇하나 빼놓을 것 없이 엄청나게 좋아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감개가 무량할 뿐이다.

(한글판 패스 오브 글로리. 그나저나 디자이너의 이름이 오타인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어렵다. 하지만 알고 보면 쉽다. 물론 잔룰은 있다. 어쨌든 게임이 너무나 재미있다. 그런데 게임이 너무 길다. 쉽게 권할 수 없다. 하지만 즐긴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 복잡한 연쇄를 어떻게 극복하는 것이 좋을까. 읽히지 않는 룰과 플레이하기 어려운 상황, 그 험난한 진창을 하나씩 넘어보자. 노 보드게이머스 랜드(No Boardgamer's Land)를 지나 한 턴, 한 턴 게임을 즐기다 보면, 그리하여 기나긴 한 게임을 마치고 나면, 감히 승리를 외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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