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서스펙트 게임을 최고의 머더 미스터리로 여기는가
※ 본 리뷰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평이며, 게임의 재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 코보게의 입장문이 발표되기 전 작성된 게시글입니다.
※ 게임 구매 전 기업의 방향성에 대한 판단은 당사자의 몫입니다.
사실 서스펙트 게임은 이전에 다른 머더 미스터리 게임들과 함께 다룬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리뷰들을 읽어보니 서스펙트 게임에 대한 평가가 다르더군요.
물론 팀마다 분위기가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펼쳐진 상황도 달랐을테니 평가도 다른건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다른 리뷰에서 아쉽다고 평가하는 부분을 왜 우리팀에서는 느끼지 못했는지,
왜 나는 서스펙트 게임을 고평가하는지 스스로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머더 미스터리 게임을 많이 해본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대체 왜 이놈이 서스펙트 게임을 그렇게 좋아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살펴보면서 서스펙트 게임만의 매력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우수한 컴포넌트 퀄리티
머더 미스터리는 1회성 게임입니다.
그래서 제작사에서도 컴포넌트 품질에 큰 투자를 할 필요가 적고 대부분 퀄리티 품질이 게임에 지장이 없는 수준에 머무릅니다.
그런데 서스펙트 게임은 일러스트가 뛰어나고 컴포넌트 퀄리티가 매우 좋습니다.
퀄리티가 뛰어나다고 게임에 큰 차이가 생기진 않습니다.
하지만 디테일한 차이들이 생기죠.
몰입과 분위기 형성에 도움이 되고 '시각적인 추리'도 가능해집니다.
예를 들어 시체를 조사한다고 가정했을 때,
단서가 글로만 제공되면 의심스러운 부분이 대놓고 티가 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머리에 피가 흐른다거나 입술이 파란색이라고 적혀있겠죠.
그런데 일러스트가 디테일하면 이런 점을 직접 확인하는 눈썰미가 필요해집니다.
보다 리얼해지고 조사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시체, 물건, 도면 등 이미지를 자세하게 확인하면서 조사하는 재미는 게임의 완성도에 직접 영향을 끼치진 않지만
게임 플레이의 만족도에는 영향을 끼치는 요소입니다.
아직까지 이런 시각적인 요소에서 서스펙트 게임보다 만족스러운 게임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양질의 컴포넌트는 분명 서스펙트 게임의 큰 장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시간 제한이 없다
머더 미스터리는 대부분 [ 인물소개 - 조사 - 토의 - 투표 ]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각 단계에 대해서 nn분 정도의 시간을 가지라고 룰북에 명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서스펙트 게임은 그런게 없어요.
그래서 각 모임마다 플레이타임 편차가 클것이라 봅니다.
다른 리뷰를 보면 보통 한 에피소드 당 2시간 30분 정도로 즐긴 것 같더군요.
저희 모임은 한 에피소드마다 평균 4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역할지는 사전에 나눠주고 모임 전에 다 숙지해왔기 때문에 순수하게 게임 시간만 그 정도였어요.
이렇다보니 몰입도도 뛰어나고 한판 한판 정말 치열하게 경쟁했던 것 같습니다.
모두가 비밀을 가지고 있다
가장 고평가하는 부분입니다.
이 아래로 죽 나열할 다른 장점들도 결국 이 시스템으로 인해 파생된 장점들일 정도죠.
제가 머더 미스터리에 스토리보다 룰이 중요하다고 여기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다른 머더 미스터리도 범인 외에 의심을 받는 인물을 배치하여 스토리적으로 비밀을 보유하긴 합니다.
하지만 서스펙트 게임은 아예 룰로 모두에게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비밀을 배치했고,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수상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게 됩니다.
이로 인해 범인은 거짓말을 해도, 심지어 거짓말을 들켜도, 수상한 모습을 보여도 괜찮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니까요.
범인의 부담이 상당히 낮아져서 좀 더 적극적인 블러핑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비밀 시스템 때문에 핵심 단서가 공유되지 않아서 사건이 오리무중되고 그저 찍기로 투표해야 한다는 평도 있습니다.
동감하지만 저는 그래도 '게임'인 이상 실보다 득이 컸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이유는 범인역 때문입니다.
범인도 '게임'을 즐길 수 있다
비밀 시스템의 가장 좋은 점은 범인도 추리할 부분이 생겼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머더 미스터리에서 범인은 사건의 진상을 이미 알고있기 때문에 추리하는 맛이 상실됩니다.
추리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재미인데 그것을 상실하니 머더 미스터리는 '범인을 희생하여 나머지가 즐기는 게임'이라는 느낌도 들더군요.
그런데 서스펙트 게임에서는 비밀이 들통나는 것은 곧 패배를 의미하며,
범인이라는 것을 들키더라도 모두의 비밀을 밝혀내면 역전승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범인도 추리하는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같이 노는 '게임'에서 소외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1순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점을 고평가하게 됩니다.
협조를 제한하는 시스템
"비밀이 들통나면 범인과 함께 진다."
"그리고 범인이 모두의 비밀을 밝혀내면 범인이 역전승한다."
위의 룰 때문에,
범인이 아닌 팀원들은 '범인을 잡지 못하더라도 내 비밀만은 반드시 지킨다'는 마인드였어요.
범인을 잡더라도 내 비밀이 들통나면 나랑 범인만 지고 다른 플레이어는 이기니까요.
마치 극중 캐릭터들의 자기 보신에 대한 이기심이 그대로 게임 플레이에 반영된 듯 했습니다.
팀원들이 이기적으로 플레이 했다는 게 아닙니다.
팀원들의 승부욕과 캐릭터의 이기적인 마인드라는 설정이 비밀 시스템을 만나 최고의 시너지를 냈다고 봅니다.
오죽하면 범인도 그저 비밀을 지닌 한명의 캐릭터고 그 비밀이 살인일뿐인 분위기였습니다.
덕분에 범인/비범인 구분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동등한 플레이 감각이 가능했습니다.
머더 미스터리 게임을 하다보면 중간부터 범인을 제외한 플레이어들이 중요 단서들을 하나 둘 솔직하게 밝히면서 긴장감이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죠?
설정상 모두가 용의자고 서로 의심하는 상황인데 이렇게 서로 솔직하게 협력하는 상황이 좀 별로였습니다.
몰입이 깨진달까? 범인이 너무 불리해지는데 그렇다고 단서 공유에 제지는 못해서 답답해진달까?
그런데 본 게임에서는 비밀을 들키지 않으려고 몇몇 단서는 끝까지 숨기니까 그럴 일이 적습니다.
비밀로 인해 협조를 제한적으로 하면서 서로 의심하는 분위기는 커지고,
스스로 추리해야 하는 중요성은 더욱 증대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해답으로 챙긴 개연성
서스펙트 게임은 사건의 진상 외에도 '해답'을 따로 제공합니다.
캐릭터의 입을 빌리기는 하지만 사실상 게임 제작진들이 플레이어에게 제공하는 모범 답안지입니다.
범인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단서는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범인을 추리할 수 있었을지 설명하는 내용이죠.
이처럼 해답을 제시한 것은 제작진이 최대한 개연성을 챙기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제작진의 최대치가 플레이어에겐 충분하지 못할 수 있지만,
이조차 하지 못한 수많은 머더 미스터리 게임을 생각해보면 서스펙트 게임의 완성도는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비선형적 진행 방식
다른 웰메이드 작품인 '웬디, 어른이 되렴'은 선형적인 구조를 가집니다.
단서가 순서대로 주어지면서 서사의 빌드업을 쌓고 반전을 통해 충격을 선사하기 좋은 구조죠.
그래서 웬디는 선형적 구조를 통해 장점인 스토리의 매력을 극대화했습니다.
반면, 서스펙트 게임은 비선형적 구조입니다.
단서를 습득하는 데 정해진 순서가 없기 때문에 서사적 완성도는 희생됩니다.
대신 자유로운 조사 환경으로 인해 변수가 창출됩니다.
범인이 적극적으로 단서를 은폐할 수 있고, (비밀 시스템으로 인해 어차피 다른 플레이어들도 단서를 은폐하느라 의심도 덜 받으면서)
스스로 단서를 선택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몰입을 느낍니다.
선형적 진행 방식은 정해진 스토리를 거의 그대로 따르기에 누구에게나 비슷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제품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일정하게 품질을 지킬 수 있는 선형적 방식이 좋죠.
하지만 비선형적 방식은 자유도 덕분에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게임이란 측면에서는 서스펙트 방식이 좀 더 좋았다고 느꼈습니다.
+ 몰입이 뛰어난 팀원들
결국 보드게임은 같이 즐기는 팀원이 제일 중요하죠.
저희 팀은 몰입이 뛰어나고 승부욕은 강하면서 뒤끝은 없었습니다.
얼마나 승부욕이 강했냐고 하면,
범인이 걸렸던 팀원들은 집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적어놓고 그에 따라 적당한 변명과 '가짜 비밀'까지 만들어 왔었습니다.
저는 이걸 엑셀로 정리했고 다른 팀원분은 노트에 적어서 정리하는 등 스타일은 달랐지만 그만큼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러면 결국 팀원들이 잘 해서 재밌었던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애초에 룰이 그 바탕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이토록 준비할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실제로 비밀 시스템이 없는 다른 게임에서는 이렇게 준비해본 적이 없습니다.
룰로 비밀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에 어차피 '그럴싸한 비밀이 있다'는 것만으로 범인으로 몰리는 일이 잦아요.
굳이 '가짜 비밀'을 준비할 이유가 없는거죠.
한가지 더 도움이 되었던 요소는,
서스펙트 게임이 모임 초창기에 즐겼던 게임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거짓말할때 어떤 버릇이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게임에만 온전히 몰입해서 추리할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분위기를 돋우는 양질의 컴포넌트'.
'협조를 제한하는 비밀 시스템'.
'능동적인 조사 방식'.
'몰입을 잘하는 팀원들'.
이런 요소들이 잘 결합되어서 추리물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감각,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후의 어떤 머더 미스터리 게임에서도 이만큼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감각'을 느낌 게임이 없었습니다.
정말 치밀하게 둘러대고, 치열하게 숨기고, 집요하게 추궁했으니까요.
시간 제한이 없으니까 전부 머리가 아파서 지끈할 때까지 게임을 했습니다.
스토리에서 임팩트가 약하고,
범인이 불리하고 밸런스가 안 맞고 등등.
이후 출시된 웰메이드 게임과 비교하면 약점이 있는 게임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잘 갖춰졌을 때 느낄 수 있는 몰입감과 긴장감은 다른 게임에서는 찾기 힘든 서스펙트 게임만의 장점이겠죠.
추리 소설이나 추리 영화처럼 관객으로 지켜보는 추리물이 아닌,
플레이어가 직접 경험하는 추리 '게임'으로써 서스펙트 게임은 여전히 강한 매력을 지녔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아직 서스펙트 게임 안 해보셨다면, 꼭 해보세요.
평가의 편차는 있지만 혹시 압니까?
여러분의 모임에 서스펙트 게임이 딱 맞아떨어져서 추리 소설 한 가운데 떨어진 감각을 느낄 수 있게될지도 모르죠.
당시 게임 중 인상깊었던 대화로 리뷰를 마칩니다.
"사람 죽은 건 안타깝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죠."
"이렇게까지 해야 돼요? 진짜 아무도 못 믿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