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거드(←르 아님)는 텀블벅 보드게임 "슬기로운 생존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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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1 14:11

본 글은 보드라이프 게시판에는 올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안 올리기로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게임마켓 2019 봄에 다녀온 이후, 아마추어 작가 분들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홍보를 해줄 누군가(그게 업체든 단체든 개인이든)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마음이 확고히 자리 잡혀서 글을 남기기로 했습니다.

(사실 게임마켓 방문 전까지는 아마추어 작가 분들의 게임에 대해서 슬슬 그 관심을 거두려고 하던 시점이었는데 말이죠. 가격 경쟁에서도 밀릴 뿐더러 인지도, 재미, 완성도 면에서도 경쟁이 거의 되질 않기도 하고, 워낙 좋은 작품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니...)

처음 슬기로운 생존생활(이하 슬생생)의 프로토 타입을 보았을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A4 용지 몇 장에 조종완 작가님의 전작 프로토 타입들에서 쓰다 남은 컴포넌트 몇 개, 그리고 주사위.

대놓고 빡빡한 게임을, 그리고 서바이버 2: 더 리더 때도 그랬지만 가차없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묘하게 즐거워 하시던 그 모습까지.

슬생생을 처음 했을 때는 이게 뭔가 싶기도 했습니다.

풍족하고 싶어도 절대 풍족할 수 없도록 짜여진 설계와 쭉쭉 떨어지는 온도 등 빠른 게임 진행에 그냥 벙찌다보니 어느새 게임이 끝나있는.

그런데 아무 것도 못 하고 속수무책으로 가난에 허덕이는 이 상황이 과연 빙하기적인 느낌과 잘 어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심지어 지금까지의 작가님 게임 중에서 가장 게임으로써 제대로 작용하는 느낌이 들었지요.

조종완 작가님의 게임 타겟과 콘셉트는 명확합니다.

일반인부터 가벼운 게임을 즐기는 라이트 유저까지.

보드게임을 하면서 서로 대화가 이뤄질 수 있는 게임.

이런 콘셉트의 게임은 결국 사람을 많이 타게 됩니다. 게임도 재미있고 함께 하는 멤버들이 몰입도 잘 해서 왁자지껄 시끌벅적하게 분위기가 팡팡 터지면 좋으련만, 이 두 가지 모두 충족하는 게임은 그리 많지 않죠. 특히 가족 파티 게임 포지션에서는 쟁쟁한 소수의 작품들이 오랫동안 왕좌를 차지하고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기 때문에 화자가 되기도, 관심을 받기도 어렵습니다. 보통은 게임이 아닌 사람이 재미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사람에 의존하다 보면 게임의 수명 역시 급격하게 줄어들어 결국에는 외면 받고 맙니다.

재미가 없는 게임에, 유저가 스스로 재미를 만드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멤버의 한계, 그리고 반복됨에 따른 피로도의 누적.

개인적으로는 수 많은 시행 착오를 거쳐오셨다고 판단합니다.

이렇게까지 다작하는 국내 아마추어 보드게임 작가분은 조종완님이 거의 유일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드디어 슬생생이 탄생했습니다.

게임은 매 라운드 자원으로 식량과 나무를 반드시 각각 하나씩은 지불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식량과 나무를 얻기 위해서는 타인과 협력할 것인지 혼자 행동할 것인지 고민해야 하죠.

매 라운드 식량과 나무를 소모해야하는데, 정상적인 생산 방법으로는 이 두 자원 중 하나 밖에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다른 사람과 협력하여 한 라운드에 식량 2개, 다음 라운드에 나무 2개를 획득하면서 현상 유지를 도모할 수 있지만, 주사위 운빨 게임인데다가 견고한 연대가 계속 유지될 수 없는 것이 인간 세계 아니겠습니까?

계획은 어긋나라고 있는 것입니다.

게임은 이론을 무시하고 어쨌든 내가 가진 자원은 마이너스를 향해 가고, 결국 누군가는 반드시 탈락합니다.

솔직히 지금까지의 조종완 작가님의 게임은 믿고 거들기는 힘든 작품들이 많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작품은 과감히 믿고 거들만 하다고 판단합니다.

주사위가 전부인 게임은 사실 운빨 망겜이기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에 역설적으로 일반인 대상으로 잘 먹히는 것이 주사위 게임입니다.

저도 주사위 게임에 대한 호감이 없었다가, 배송비 아끼려고 구매한 "전국시대(Age of War)"를 해보고 그 인식이 바뀌었으니까요.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주사위 게임을 왜 하나 싶은 분들도 계시겠지만,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소위 야찌류의 주사위 게임의 인기가 꾸준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일상에서 생각할 것도 많고 복잡한 것 투성이인데, 야찌류 주사위 게임은 그냥 주사위를 굴리기만 하면 되잖아요? 그리고 그저 그 눈금 값에 따라 그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이면 될 뿐입니다.

야찌류 주사위 게임의 세계는 너무나 쉬워요. 잘 되면 기분 좋고 잘 안 되더라도 크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실망할 것도 화를 낼 것도 없습니다. 실패해도 본전, 성공하면 약간의 기쁨. 이대로라면 어떻게든 팍팍한 인생에 + 요소가 되는 게 아닐까요?

저는 여전히 미니빌이 그렇게 썩 재미있는 게임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좋아하시는 분들은 엄청 좋아하시고, 곧 발매될 미니빌 레거시를 기대하고 있는 분들도 많으시잖아요?

슬생생 프로토 타입을 해보고, 이것이야 말로 조종완 작가님이 생각하는 게임, 만들고자 하셨던 게임,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두어 번의 테스트 플레이 만에 진정 게임다운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맨 처음엔 솔직히 좀 게임이라고 하기엔 이상했...)~~

서바이버 2: 더 리더가 꽤 여러 번의 테스트 플레이에도 좀처럼 잡을 수 없었던 것과는 꽤 비교가 되었죠. 서바이버 2: 더 리더는 몇 번을 테스트해도 계속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찝찝했는데, 슬생생은 약간의 변주를 준 끝에 결국 지금 공개된 최종 형태(물론 또 변경될 수 있지만)를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사위 외에도 상황 설정 등에서 무작위성이 강했던 것을 잡아, 빙하기가 시간이 지날 수록 혹독해질 수 있도록 점차 난이도가 올라갈 수 있는 개연성 있는 진행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단언컨데 슬생생은 조종완 작가님이 만드신 게임 중에 가장 본인의 창작 의도와 합치하는, 그리고 가장 대중적이면서 재미까지 잡은, 앞으로 이 이상의 게임을 더 만드실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조종완 작가님과 잘 어울리는, 최고의 작품이 될 것입니다.

라스베가스가 지금도 많은 분들의 사랑과 인기를 얻고 있는 것처럼, 조종완 작가님의 라스베가스, "슬기로운 생존생활". ~~물론 라스베가스는 넘사벽입니다만...~~

긴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주사위와 베팅, 입 털기 협잡의 만남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냉정히 말하면 슬생생만의 신박하고 독자적인 요소라고 할만한 것은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돌아가신 제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단언컨데 남녀노소 누구든 크게 불호 없이 즐길 수 있는 게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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