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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카] 보드게임 제작일지 2부 - UX 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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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1 14:08

안녕하세요? 올린입니다.

드로잉 보드게임 [나스카]의 제작일지(Designer's Note)를 써볼까합니다.

스토리가 길어 총 3부작으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부디 재밌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

지난 포스팅 : [나스카 보드게임 제작일지 - 1부 다시보기]

나스카 보드게임 제작일지 2부 - UX 개선

지난 포스팅에서 나스카의 아이디어 구상과 구체적인 규칙을 만드는 과정을 다뤘다면 이번 포스팅의 주제는 바로 보드게임 UX의 개선입니다. UX라는 단어가 생소하신 분들을 위해 잠깐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UX는 'User eXperience'의 약어로 국내에선 '사용자 경험'이라고 해석합니다. 사용자가 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접하고 경험한 모든 느낌을 총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죠. 이처럼 UX의 범위는 굉장히 넓습니다. 보드게임에서 UX의 첫 시작은 진열대에서 처음 게임을 마주쳤을때의 인상, 더 가깝게는 박스의 포장을 뜯는 순간과 카드의 촉감, 타일을 펀칭할때의 두근거림, 게임을 플레이 할 때의 편리성, 마지막으론 게임이 끝나고 정리한 뒤에 느끼는 감정까지 포함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걸 아울러 제품 기획을 하는 행위를 UX Design 이라고 칭합니다.

보드게임은 특히 손으로 직접 만지는 제품이기 때문에 이런 사용자 경험들이 더욱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플레잉 카드를 만들때 카드의 두께와 가운데 들어가는 코어, 재질 등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홍보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온라인 게임이나 모바일 게임과는 달리 이런 물리적 요소들이 실제 플레이 할 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그래서 보드게임은 실제로 목업을 만들고 오프라인 테스트를 많이 해보는게 필수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니터로 봤을때는 괜찮아보였던 글씨나 아이콘이 실물로는 너무 작거나 구분이 힘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스카도 이렇게 UX적인 부분들을 항상 염두하며 디자인되었는데 그 중 가장 애를 먹였던 부분은 바로 '가림 타일'의 개발입니다.

따라서 나스카 개발 과정의 여러 요소들 중 이번 포스팅에선 대표적으로 이 가림 타일의 UX Design 과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나스카의 게임 특성상 가림 타일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상 게임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죠. 게임의 규칙에 의하면 가림 타일의 목적과 쓰임은 매우 명확합니다.

"그려진 그림을 6개의 타일로 가린다."

"게임 중 가림 타일을 하나씩 제거한다."

매우 간단한 이 쓰임새에 처음엔 가림 타일의 개발을 가볍게 생각하고 접근했습니다. 그냥 그림 위에 6개의 네모난 타일들을 올려놓자고 말이죠. 그렇게 처음 완성한 목업, '나스카 Mark1' 은 이런 형태입니다. 지난 포스팅에서 한 번 소개되었었죠.

<나스카 Mark1>

보시다시피 네모난 타일에 손잡이(?)가 달려있는 형태입니다. 그림을 그린 뒤 타일 6개를 올려놓으면 되는 구조입니다. 제 머릿속 구상으론 손잡이를 잡고 타일을 빼면 매우 편리하고 간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렇게 만들게 되었는데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방식은 매우 불편했습니다. 이제 그 이유를 살펴봅시다.

불편 포인트1 : 타일의 크기가 너무 작아 손잡이를 잡기 힘들다.

말 그대로 타일이 너무 작았습니다. 초등학생 정도의 손가락 두께라면 딱 맞을지 모르지만 어른의 손으로 저 손잡이를 잡기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죠. 이렇게 1차원적으로 불편한 경험을 시켜주는 형태는 잘못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편 포인트2 : 타일을 잡고 올릴 때 옆 타일을 건드리게 된다.

타일이 서로 붙어 있기 때문에 타일을 들어올릴 때 필연적으로 옆쪽 타일을 밀거나 건드리게 됩니다. 게임의 규칙상 딱 오픈하는 한 부분만 공개되어야 하는데 너무 빠르게 타일을 제거하려다가 그 옆쪽 그림도 살짝 살짝 보이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렇게 불편한 포인트를 짚었으니 이제 개선해봅시다. 우선 고려해봐야 할 가장 손쉬운 개선 방안은 타일 크기를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는 기각 하기로 합니다. 타일 크기를 키우게 되면 우려되는 문제점는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첫째, 타일 크기가 커지면 시트지와 박스 사이즈도 필연적으로 커지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시트지 위에 그림을 그리고 타일로 그 그림을 덮는 구조이기 때문에 타일의 사이즈업은 다른 모든 요소들의 크기를 좌우합니다. 올린스튜디오 보드게임들의 중요한 컨셉은 '휴대성'입니다. 작은 박스로 부담없이 들고 다닐 수 있는 보드게임 개발을 지향하기 때문에 박스가 커지는 선택은 우선 고려하지 않기로 합니다. 둘째, 캔버스가 커지면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늘어납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분들에겐 큰 캔버스도 부담이 없지만 실제로 테스트 플레이 과정에서 그림에 자신이 없는 분들에겐 캔버스의 크기가 작은 편이 그림을 그리는데 조금 더 편하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단 크기 변경은 패스!

또 다른 개선 방안은 구조의 변경입니다. 현재의 손잡이 형태에서 탈피해 퍼즐 같은 형태가 되면 어떨까 고려해봅니다. 퍼즐의 큰 특징은 우선 테두리에 프레임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각 조각들이 서로 맞물리는 구조를 가지고 있죠. 테두리에 프레임을 만들어준다면 타일을 하나 떼어낼 때 주변의 다른 타일들이 바깥으로 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퍼즐의 특징인 각 조각들이 맞물리는 구조는 불필요한 듯 합니다. 퍼즐은 애초에 끼워진 피스를 제거하는 게임이 아니며 오히려 한 번 피스를 끼워서 고정하면 견고하게 맞물려 떼어내기 힘들게 만들어야 액자나 완성품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나스카는 타일의 제거가 주 목적이기에 각 타일들에게 퍼즐 같은 구조를 접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듯 하여 기각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타일을 감싸는 프레임이 생기고 기존의 손잡이가 사라지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세팅된 타일을 손으로 잡아서 떼어내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고민 끝에 프레임에 손톱을 넣을 수 있는 홈을 파서 타일을 꺼내기 용이하게 만들어보기로 합니다. 이렇게 결정이 되었으니 바로 만들어서 테스트를 해봐야겠죠? 완성된 '나스카 Mark2'는 이런 모습입니다.

<나스카 Mark2>

해당 모델로 다시 테스트의 반복!

테스트를 거치며 장점과 단점에 대해 피드백 시간을 가져봅니다.

우선 장점은 타일 주변을 잡아주는 프레임의 효과는 꽤 좋았다는 점입니다. 확실히 타일을 하나씩 제거할 때 주변의 타일들이 바깥으로 밀리지 않아서 안정감 있게 플레이할 수 있었습니다. 또 아래에 깔린 시트지와 프레임의 크기가 같기 때문에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이 프레임은 타일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되는구나' 라는 직접적 가이드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게 됩니다. 파여진 홈에 손톱을 넣어 타일을 꺼내는 방식도 나쁘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조는 단점이 없는 것일까요? 역시나 문제는 발생합니다. Mark2 버전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내구성입니다. 저는 손톱을 기르지 않아 짧은 손톱을 유지하고 있지만 역시 손톱을 이용해 타일을 꺼내는건 타일에 자잘한 데미지가 가해지는게 느껴집니다. 많은 플레이를 거치면 타일이 손상될 것은 불 보듯 뻔했습니다. 결국 '나스카 Mark2'도 불완전한 버전임이 드러났고 타일의 구조를 해결하는게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문제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연구!

많은 스케치와 재질 연구를 통해 돌파구를 찾아보기로 합니다. 이때는 타일이라는 고정관념도 버려가며 최대한 많은 아이디어를 나열해봅니다.

Q.내구성이 문제라면 재질이 플라스틱이면 어떨까? A.커스텀 플라스틱의 생산은 매우 높은 단가로 리스크가 커서 패스.

Q.그럼 나무 재질은 어때? A.고급스럽겠지만 역시 높은 단가가 문제. 나스카를 5만원에 팔 생각임?

Q.그렇다면 모바일앱으로 만들어볼까?! 버튼 누르면 하나씩 타일 벗겨지고! A.음, 그럼 그냥 모바일 게임 아니야?

이런 수 많은 고민과 사고의 반복들..

<각종 구조 스케치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타일이 힘들다면 투명한 카드를 이용해 그림을 가리면 어떨까? 마침 컴퓨터 옆에 버드 트럼프의 추가 리워드로 받은 투명 카드가 있어 자세히 살펴봅니다.

오호라 이거 가능성이 조금 있겠는데? 얼른 문구점에 가서 얇고 투명한 아크릴 판을 사서 테스트 해보기로 합니다. 목표는 6개의 투명한 카드 제작하기!

세부 플랜은 이렇습니다.

1.우선 그림을 그리는 종이의 크기와 딱 맞는 사이즈로 아크릴 판을 잘라 6개의 투명 카드를 만든다.

2.해당 투명 카드들을 6등분해 한 부분씩 검은색 매직으로 칠한다. (실제 제작에선 블랙으로 인쇄)

3.카드들을 그림 위에 차곡차곡 모두 겹치면 6면이 모두 가려짐.

4.하나씩 카드들을 제거하면 일부분씩 그림이 드러나게 된다! 야호

너무나 완벽한(?) 계획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신나게 투명 카드를 만들어봅니다.

그렇게 완성된 '나스카 Mark3'로 본격적인 테스트 시작!

<나스카 Mark3>

테스트 결과 일단 플레이는 되지만 생각 외에 자잘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선 카드를 싱크에 맞게 잘 겹쳐서 쌓기 힘들다는 문제! 고민 끝에 이는 게임의 사바리 박스를 활용해 보기로 합니다. 게임의 아래 박스를 비우고 내부 사이즈에 딱 맞게 시트지와 카드를 만들어 차곡차곡 넣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상하나 좌우로 카드들이 흔들리는 부분도 없을테구요. 그렇지만 깊은 박스 내부에서 카드를 하나씩 꺼내기가 힘듭니다. 손잡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럼 이건 어떻게 해결해야할까요? 이렇게 또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겨납니다. (이처럼 UX의 개선은 계속해서 발생하는 문제들과 그 해결의 끝 없는 줄다리기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핸드폰 게임을 하기 위해 사놓았던 스마트폰용 게이밍 조이스틱이 문뜩 떠오릅니다. 이 게이밍 조이스틱은 아래에 고무로 된 일명 '뾱뾱이'가 달려 있습니다. 카드는 플라스틱 재질이니 유리에 흡착하는 이 구조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해서 바로 테스트 해보기로 합니다!

<뾱뾱이 테스트>

이 조그만 뾱뾱이가 생각보다 투명 카드를 잘 흡착합니다. 이런 형태라면 깊숙히 넣어서 겹쳐진 투명 카드들을 위에서부터 한 장 씩 빼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업을 마무리하고 또 사람들을 모아 플레이 테스트를 진행합니다. 이처럼 보드게임이 하나 완성되는덴 무수히 많은 테스트 플레이가 뒤에 존재합니다. 혼자 고민하던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봐 줄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건 문제 해결에 정말 큰 도움이 되거든요. 결국 이 테스트 플레이 모임에서 최종적으로 나스카의 구조에 대한 실마리를 찾게 됩니다!

매미가 울기 시작한 이른 여름, 서울의 한 카페에서 여러 작가들이 모여 각자의 게임을 테스트하기로 합니다. 여기서 '나스카 Mark3'로 플레이 테스트를 진행하던 중 새로운 구조적 문제가 발견됩니다. 그건 바로 투명 카드들이 정전기나 습기에 의해 서로 밀착된다는 점입니다. 카드를 한 장 씩 들어 올려야 하는데 카드끼리 밀착되어 2장, 3장씩 딸려 올라오는 문제가 발생해 또 다시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뾱뾱이를 가지고 놀던 한 작가분께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 올린님, 이 뾱뾱이 그냥 일반적인 펀칭 타일도 붙는데요?", "네? 뭐라구요?!"

<종이인데 뾱뾱이가 붙는다?!>

그렇습니다. 종이라고 생각해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던 펀칭 타일도 뾱뾱이로 붙는다는 사실! 펀칭 타일은 보통 내구성과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코팅 과정을 거칩니다. 유광 혹은 무광으로 말이죠. 코팅이라는건 자세히 살펴보면 얇은 비닐로 덮는 것인데 비닐의 본질은 바로 플라스틱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동전 토큰으로 사용되는 펀칭 타일도 뾱뾱이에 붙는 것이었죠. 이런 발견을 통해 나스카의 구조적 문제 해결은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뛰어난 구조와 디자인에도 내구성 때문에 포기했었던 '나스카 Mark2'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최종 버전에 가까운 '나스카 Mark4'의 제작에 착수합니다.

우선 Mark2의 특징이자 장점이었던 프레임을 가져가면서 타일에 손상을 주는 홈 부분을 없애고 6개의 세부 타일들은 일반적인 네모 모양으로 만듭니다. 전체적인 타일의 크기는 하단 박스의 내부 사이즈에 맞춥니다. 이를 통해 게임 도중 흔들림을 방지해줍니다. 프레임의 상단은 하단보다 조금 더 크게 만듭니다. 이 영역을 통해서 그림의 제목을 가리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팅된 타일들은 뾱뾱이로 하나씩 안전하게 꺼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