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내밀한 어떤 즐거움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고, 만두가 있으면 더욱 즐겁습니다.
안녕하세요,
목성에서 책도 읽고 게임이나 이것저것을 상상하는 목성의독서가라고 합니다.
다음주 주말인 10월 28일/29일에는 양재 aT센터에서 인디보드게임마켓이 열립니다.
날것 그대로의 개성을 가진,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원석 같은 인디 게임 100여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축제입니다.
전에 없던 규모의 행사이니만큼 관심을 부탁드릴 겸,
또 저의 게임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 놓을 겸 조심스럽게 글을 남깁니다.
지난가을, 우연한 기회에 처음으로 도쿄게임마켓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벅찬 경험이었기에 당시에 끄적끄적 후기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시작은 사진 한 장 : 도쿄 게임마켓 2022 가을 참가기
이를 계기로 올봄에도 디미디움과 한 팀을 이루어 참여를 이어 나갔으며,
다가올 12월에도 새로운 게임으로 참여를 앞두고 있습니다.
도쿄에 다녀올 때마다 한국에서도 이런 규모의 축제가 열리면 어떨까 상상하곤 했습니다.
인디보드게임마켓은 이러한 상상을 현실로 이루려는 여러 사람의 노력이 이룬 첫걸음이 아닐까 합니다.
코로나 시대 이전에 열렸던 비콘도 에너지가 가득한 행사였지만,
이번에는 그러한 에너지에 규모까지 더해져 새로운 시너지를 낳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상상하고, 소량이라도 직접 만들며, 그 즐거움을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
검증된 명작이 넘쳐나는 시대에 새로운 게임을 상상한다는 게 늘 성공적일 수는 없겠지만,
뭔가를 상상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또 감동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그런 감동과 함께 재미까지 느낄 수 있는 행사가 되길 기대하며,
‘목성문고’라는 이름으로 제가 준비하고 있는 [트릭 덤플링]과 [오리오리 탐관오리]도 소개해 보려 합니다.
[트릭 덤플링]은 제목 그대로 덤플링, 즉 만두를 테마로 삼은 게임입니다.
어쩌다 뜬금없이 만두가 이 게임에 등장하고 만 것일까요.
발단은 트릭테이킹이라는 장르에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트릭테이킹 게임을 처음 접했던 무렵, 가장 큰 의문은 왜 플레이어가 리드 수트를 따라야 하는가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설명할 방법을 찾다 보니, 분주하게 만두를 빚는 주방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각각의 수트는 서로 다른 종류의 만두이고, 조리사들은 셰프의 지시대로 정해진 만두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트럼프 수트는 오늘의 특선 만두라고 이해할 수 있을 테고요.
왜 다른 요리가 아닌 만두인가 하면,
(하나하나 셀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역시 제가 만두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네요.
구체적으로 조리 과정을 떠올리자면, 각각의 만두는 종류별로 찜통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만두는 섬세한 요리이기 때문에, 하나의 찜통에 무작정 여러 개를 집어넣을 수는 없어요.
초과분의 만두는 아쉽지만 버려질 수밖에요.
그렇다면 아예 질(트럼프 수트)보다 양(트럼프 넘버)을 우선시하는 방향은 어떨까.
이렇게 해서 ‘질보다 양’, ‘한 판에 만두가 (최대) 10개’라는 [트릭 덤플링]의 좌우명이 탄생했습니다.
(정작 저는 만두를 1개만 먹어도 벌써 배가 부릅니다만...)
이에 따라 높은 랭크의 카드가 순식간에 최약의 카드가 되기도 하는, 역동적인 즐거움을 이끌어내고 싶었습니다.
저에게 게임이란 플레이할 때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트릭 덤플링]의 플레이는 언제나 소소한 만두 토크로 시작됩니다.
셰프는 자신의 취향대로 만두의 인기 순위를 지정할 특권이 있거든요.
상대의 만두 취향을 용납할 수 없다고요?
그렇다면 당신이 새로운 셰프가 되어, 땅에 떨어진 만두의 도리를 바로 세워 주십시오.
그리고 게임이 끝날 때쯤에는 모두들 적당히 출출해져,
승자가 추천하는 만두 가게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이어 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고, 만두가 있으면 더욱 좋기 때문입니다.
[오리오리 탐관오리]는 어쩐지 조선 왕조를 닮은 오리오리 왕조의 혼란기를 배경으로 한 클라이밍 게임입니다.
살아남으려면 어디에든 붙어먹어야 한다는 현실감 넘치는 테마 속에, 민중의 역사에 대한 경의를 담고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생은 사또 뒤에서 호가호위하는 아전처럼 살고 싶지만서도...
이 게임은 지난가을 도쿄 게임마켓에서 [いいカモになった方がいいかも]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직역하자면 “좋은 오리가 되는 쪽이 좋을지도…”인데,
‘좋은 오리’가 일본어로는 ‘만만한 호구’를 뜻하는 은어라는 점,
문장 앞뒤로 ‘이이카모’라는 발음이 반복된다는 점을 살린 제목입니다.
(솔직히 말해 제목이 잘 뽑혔다 싶어서 게임성은 생각하지 않고 도쿄에 가져갔습니다.)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에게는 난해한 게임 아닐까 반신반의했고,
실제로 현장에서도 그리 많이 판매되지 않았는데,
감사히도 게임을 직접 즐겨 주신 분들의 평가가 조금씩 퍼져 나가면서
해외의 게이머들로부터 가늘고 길게 문의가 이어져 왔습니다.
덕분에 (우체국 직원에게 마약상으로 오해받지 않을까 걱정하며) 세계 곳곳의 게이머들에게 소포를 보내고,
시차를 두고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수탈과 혁명의 씨앗을 퍼뜨리는 기묘한 경험을 할 수 있었지요.
개중에는 관련된 역사적 맥락에 호기심을 보이더니
이를 FAQ 형식으로 보드게임긱에 게시해 준 노르웨이의 게이머도 있었고,
가을을 맞아 현지의 풍광이 담긴 엽서를 보내 준 키르기스스탄의 게이머도 있었습니다.
모두 이 게임이 이어 준, 재미있는 인연들입니다.
저는 여전히 ‘보편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즐기는 무언가를 다른 누군가도 즐길 수 있다는 데서 조그만 용기를 얻습니다.
그건 아마도, (마치 아전처럼) 가늘고 길게 지금 같은 즐거움을 좇아도 괜찮으리라는 용기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분들이 10월 28일과 29일,
이틀 간의 축제에 찾아와 용기 있게 빛나는 원석들을 발견하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홈페이지에서 100여 개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있으므로
취향에 맞는 작품을 찜하고 찾아와 직접 플레이하고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혹 토요일에 목성문고의 부스를 찾아주신다면 저도 꼭 비열한 플레이로 섭섭지 않게 맞이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