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인 : 소유자의 마음과 흔적(2)
2-1.
유희의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그 본질에 충실하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들었던 저는
예전에는 온갖 이유로 책과 와인을 사 모으는 취미를 가졌습니다.
이윽고 출산과 육아로 인한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봉착하게 되어서는
굳이 새로운 취미를 물색하여 자작 보드게임에 관심을 갖고
보드게임 개발을 위한 연구 자료 확보를 빙자하여 보드게임 구매를 시작하였습니다.
때는 아직 코로나가 유행하지 않았던 몇 해 전의 어느 날,
그렇게 저는 보드게임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2-2.
하지만 코로나와 육아의 문제로
모임에도 나갈 수 없고,
두 아이의 육아가 힘에 부친 아내에게 마냥 함께 해주기를 바랄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시시각각 쏟아져 나오는 흥미롭고 매력적인 보드게임들을
멀찍이 바라보기만 하고 흘려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어설픈 수집벽은
누군가 함께 해줄 이 없을 보드게임에까지 미쳐서
사그라지는 학문에 대한 열정만큼 비어가는 서가 한 편을 보드게임에 내주고
시나브로 일백수십 종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2-3.
애초에 수집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건만
개봉노플은 쌓여갔고
플레이 경험의 결핍이 거듭될수록 비뚤어진 콜렉터의 욕망은 점점 커져갑니다.
결국 얌전히 서가에 꽂힌 보드게임을 바라보며
이따금 혼자 꺼내 살펴보고 설레면서
새로운 욕망의 피사체를 찾아 소유욕에 끊임없이 군불을 지피고 있는 상황입니다.
‘부끄러움의 책장’을 ‘기회의 책장’으로 돌변시킨 정신 승리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그 강을 완전히 건너기 전에
애써 규칙서를 읽고 테플이나 솔플을 해보려는 시도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건만
단도직입하여 숙제처럼 해내지 않으면
현실 속의 예기치 못한 사고와 곤란한 사정에 치여
늘어가는 욕망의 부산물을 전부 소화해낼 수 없었습니다.
2-4.
콜렉터이기보다는 보드게이머이고 싶은 의지를 버린 것은 아닙니다.
단지 육아의 굴레가 헐거워지기를 조용히 기다릴 뿐.
보드게임에 남기는 소유자의 마음과 흔적에 대해 고민하던 차에,
도서에 찍던 장서인에 눈길이 갔습니다.
어차피 팔 것도 아니고 소중히 다루는 마음을 담아 의지를 쇠락하지 않겠다면
내 보드게임에 장서인을 찍어보는 것은 어떠할까?
생각이 미쳐서는 안 될 곳에 미치고 나자,
두 손은 주체할 수 없이 일을 치르고 말았습니다.
2-5
도서의 장서인은 책표지를 넘기면 으레 나오는 빈 페이지에 찍습니다.
옛날의 서적은 구하기 어렵고 비싼 물건이었으므로 소중히 다뤄졌고
수명을 다할 때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장서인은 최초 소유자부터 그 다음 소유자의 순서대로
페이지의 우측 하단에서부터 그 위로 점차 찍어나갔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장서인이 찍혀 있는 경우에는
장서인의 위치에 따라 소유의 순서도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보드게임은 어디에 찍어야할까?
가지고 있는 보드게임을 살펴보니
윗박스 안쪽에는 아무런 프린팅이나 코팅이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윗박스 안쪽 우측 하단에 장서인을 찍기로 정하였습니다.
2-6
일반적으로 장서인은 석재 인장에 글자를 새겨 넣고 붉은 인주로 찍는데,
인주가 번지거나 고르게 찍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하는 문구를 새길 수 있는 스탬프를 주문하여 장서인으로 사용합니다.
옛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나 자호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문구를 새겨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몇몇 의미 있는 문구를 택하여 장서인 몇 개를 만들고
입수 경위나 의미를 부여하여 장서인을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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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용하는 장서인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A. 운향만당 즉시천일(芸香滿堂 卽是天一) : 운초(芸草) 향기가 집안에 가득하니 바로 이곳이 천일각이다.
이 장서인은 주로 신상품으로 구입하였거나 기본적인 소유의 표식으로 찍었습니다.
운초는 방충 효과가 있는 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전근대시대에 장서가들은 운초 잎을 잘 말려 책 사이에 꽂아두어 좀벌레의 침입을 막았죠.
운초향이 가득하다는 건 집안에 책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천일각은 중국 영파(닝보)에 있는 유명한 장서각으로 천일각처럼 많은 보드게임이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B. 타산지석 가이공옥(他山之石 可以攻玉) : 다른 산의 돌도 옥을 다듬는 데 쓸 수 있다.
이 장서인은 주로 중고로 구입한 물건에 찍었습니다.
해당 문구는 중국 고대의 유가 경전인 <<시경>>에 나오는 구절로,
남의 산에 굴러다니는 쓸모없는 돌도 나에게는 큰 의미를 가진 유용한 물건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비록 남에게는 소용이 다하였으나 나에게 와서 의미를 가진 물건이 되기를 기원하는 뜻입니다.
C. 박아이문 약아이례(博我以文 約我以禮) : 학문으로 나의 지식을 넓게 해 주셨고 예로 나의 행실을 절제하게 해 주셨다.
이 장서인은 새로운 메카니즘이나 대표적인 고전으로
특별한 플레이 경험을 주었거나 저의 성장에 도움을 준 보드게임에 찍었습니다.
본래 해당문구는 공자의 제자인 안연이 학문과 인격을 수양하면서 공자에게 받은 가르침에 대해 평한 말입니다.
한 마디로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주었고 안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발전하고 성장하게 만들어주었다는 의미죠.
D. 득기인전 불필자손(得其人傳 不必子孫) : 적합한 사람을 얻어 전할 뿐 굳이 자손에게 전할 필요는 없다.
이 장서인은 어렵게 구하였거나 특별한 기억이 있는 것에 찍었습니다.
굳이 혈연에 구애받아 귀한 물건을 자손에게 물려주지 말고 정말 필요한 사람, 적임자에게 전해주라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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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이 몇 장의 사진을 나누고자
말의 빚을 산더미처럼 쌓았네요.
그럼에도 장서인을 찍어놓고 보니 부쩍 애정이 담깁니다.
물론 중고로 팔아치워야 할 날이 온다면
오늘의 선택이 후회로 남을지도 모를 테지만
지금은 그저 뿌듯함을 속 편히 즐기고 싶을 따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