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인 : 소유자의 마음과 흔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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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시덥잖은 이야기를 지껄인 글입니다.
공감하지 못하신다면 얼마든지 당신이 옳습니다.
어차피 공감받기 위해 쓴 글이 아닙니다.
흔하디 흔한 사진 한 장 없는
흑백 텍스트의 압박이 부담스러운 분들은
섣불리 글 속에 발을 담그지 마시고
여기에서 돌아가시길 종용합니다.
이 글은 쓸데없이 너무 긴 나머지 2편으로 나눠서 올릴 예정입니다.
이글보다 차라리 2편을 읽으시길 권합니다.(2편도 안 읽으셔도 됩니다.)
1-1.
보드게임에 마음을 붙이고 관심을 기울이다보니
나무와 종이라는 물성에서 비롯한 인쇄, 출판, 판본 등의 생산 과정,
형태와 부피 등에서 비롯한 보관 방식과 공간의 차지,
햇볕과 좀벌레, 습기와 곰팡이라는 공통의 천적 등
여러모로 도서와 유사한 면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보드게임을 접하고 나서는
독서가 줄어들었다는 많은 분들의 간증을 감안해보면
사람을 끄는 매력과 채워주는 욕구도
서로 비슷한 면이 있는 듯합니다.
1-2.
전산화의 영향이 깊이 파고든 디지털 시대에
종이책은 웹과 전자책 그리고 데이터베이스에,
보드게임은 컴퓨터나 모바일이나 콘솔 게임 등에
점차 설 자리를 내주고 마는 건 아닌가하는 위기감까지 공유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제가 다니는 일터에서는
전자책과 종이책의 효용성에 관한 정책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전자책 출판을 위주로 사업방식을 변경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한 시도였기에
DB와 전자책 등의 성장은 뚜렷하지만
종이책의 위상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종이책의 시대가 이미 저물었다는 섣부른 결단은
사람의 물질에 대한 소유욕과 감각적 욕망을 간과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보드게임도 종이책도 실재하는 물성의 본질을 상실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와 함께하며 만지고 느끼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남아 있는 한
시대가 변화하더라도
나름의 존재 이유를 얻어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3.
옛 선조들의 한문 기록을 현대 국어로 풀어내는 일을 하는 저는
빌어먹고 살길이 책에 있는 직업이기에
천성에서 비롯한 어설픈 수집벽을 애써 정당화하면서
죽기 전까지 미처 다 펴보지도 못할 수천 권의 책들을
갖은 수단으로 근근이 모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철마다 반복되던 푸념과 원망에 지치고
바닥에 쌓이고 발길에 차이는 군색함이 없도록
비록 낡았어도 장서에 충분한 공간을 할애할 수 있는 반백년 된 주택을 마련하여
아내의 질시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상전처럼 떠받든 채 지내고 있습니다.
비록 목록은 포기했지만,
언제든 손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관리하기 위해
필요와 불필요 사이에서 적절하게 분류하여 갈무리해 두고서
장서인도 찍고 장서표도 붙이고 주기(注記)도 달면서 운치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1-4.
이따금 헌책이나 스승의 장서를 펼쳐보면 간혹 장서인이 정연하게 찍힌 모습에서
이 책의 이력이 드러나 새삼 뿌듯한 경우가 있습니다.
장서인을 찍는 행위가 지닌 의미를 되짚어보면
서책을 소중히 여기고 다룬 소유자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지학에서는 장서인을 통해 도서의 소유 이력과 장서 풍조의 변천을 연구하기도 하고,
명망 높은 학자나 지도자가 손수 밑줄 친 내용은 사상 연구의 효용성을 인정받기도 합니다.
게다가 헌책 시장에서는 장서인이 찍힌 서책에 값을 더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1-5.
물론
그토록 소중히 여기고 다룬 서책도
소유자 또는 상속자가 사정이 있어 팔거나 버리는 횡액을 당하곤 합니다.
그 행위가 못내 부끄러워 장서인을 지우거나 찢어 없애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책은 헌책’이며,
서가에 꽂힌 채 오직 한 사람의 소유로 정체되지 않고
언젠가 필요 있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기 전까지
모든 책은 '숨어있는 책'이라던 누군가의 말처럼
더 이상 필요를 상실한 사람이 버리고 훼손하여 그 수명을 끝장내지 않고
더 필요한 누군가에게 전하는 사고파는 그 행위가
책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한다는 점도 가치 있는 일입니다.
1-6.
가만히 생각해보니 보드게임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분들의 이야기와 글을 살펴보았더니
목록을 만들고, 넘버링을 하고, 포장을 하고, 각종 판본을 사 모으며
보드게임에 열성을 다하는 콜렉터는 많지만
이야기가 소유의 흔적을 남기는 데에 미치면 여지없이 인색해지더군요.
그중에는 소유물을 나타내는 자기만의 표식을 붙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깔끔하게 제거 가능한 시치미 스티커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보드게임의 존재 목적은 플레이에 있고
아무리 잘 간수해봐야 수명의 한계가 있는 소모품이라는 말은
본질에 가까운 답변이지만 내심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중고 판매가 활성화되어 있고
최대한 신품에 가까운 상태를 보존해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해도 가지만
애초에 수집 자체에 의미를 둔 콜렉터도 없지 않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자신의 소유 이력을 남기는 분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지금의 현실과 풍조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드게임 문화가 계속 발전해 나가고 다양한 수요를 반영한 시장으로 확장되어 간다면
언젠가 소유자의 즐거웠던 기억과 함께 했던 순간과 살뜰한 애정이 담긴 물건에
소유의 흔적을 남기는 것도 의미 있게 되지 않을까?
이전 소유자의 흔적을 가치 있게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을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