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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하셨습니다~~

1,941 조회

2015.10.03 00:49

컴퓨터 게임 중에 문명이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15년 전 즈음에 대학원을 같이 다니던 친구한테 '주말에는 식음을 전폐하고 문명만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 게임이 그렇게 재미있나 하고 생각했었어요.

자취생들이 문명을 시작하게 되면 면식조차 할 시간이 없어서 쫄쫄 굶으면서 게임을 한다는 얘기도 그 친구가 전해 주었어요.

'문명이 그렇게 재미있나? 그 좋다는 면식도 안 해?'

어느 주말에 그 친구가 살고 있던 자취방에 가보니, 과연 그 친구는 식음을 전폐하고 문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명이 다른 게임(특히 삼국지)과 다른 메커니즘과 여러 승리 요건들에 대해서 주리줄줄 설명을 해주는데,

게임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이 친구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죠.

외교가 어떻드니, 문화가 어떻드니, 전투는 또 어떻고...

'문명이 그렇게 재미있나? 게임에 관심 없는 사람한테 침이 튀도록 얘기할 정도로?'

작년 이 맘 때 즈음에 교보문고인가 영풍문고인가에 들렀어요.

필요한 책들을 사고 나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보드게임이 쌓인 코너로 갔습니다.

그 코너에서 눈에 똭~~하고 띄는 '시드마이어의 문명'!!

'문명이 컴퓨터 게임 아닌가? 보드게임도 있네?'

갑자기 궁금증이 들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드게임을 구매했어요.

보드게임이라고는 장기, 체스, 부루마블만 알고 있던 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참 설레더라구요.

집에 와서 애들 재워놓고, 문명을 뜯어보니..

글쎄 온갖 컴포넌트(그 당시에는 두꺼운 종이쪼가리라고 얘기를 했었죠)들이 가득찬 종이 더미와, 30여페이지에 달하는 룰북이 있었습니다.

"여보, 이거 문명인데.. 되게 복잡하네. 매뉴얼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러게요. 되게 복잡하네요."

"나 매뉴얼 두번 정도 읽어보고 나서도 이해가 안 되면, 이거 걍 창고에 둘래."

침대에 누워서 룰북을 읽다가 집어 던져버렸습니다.

'뭐 이딴게 있어. 게임을 좀 쉽게 만들던가! 읽어도 이해가 안 되네.'

그리고는 문명을 창고에 고이 모셔두었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나니까, 이상하게도 문명을 해보고 싶은 오기가 생기더라구요.

대학원 같이 다니던 그 친구한테 전화를 했어요.

"내가 여차저차 해서 문명 보드게임을 샀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네가 와서 룰북 읽어보고 가르쳐주라. 내가 밥 거하게 살께."

"오케이. 언제라도 시간될 때 전화주셔!!"

그 친구를 만날 날을 잡으려고 스케쥴러를 살펴보다가,

뭔 생각이 들었는지 구글에서 문명을 검색하게 되었습니다.

'스팀은 또 뭐야. 이거 맥에서는 돌아가는 걸까? 맥용 문명 한글판은 없네?'

그리고는 스팀에서 문명V complete edition을 영문판으로 구매했습니다.

국문으로 바꾸려고 몇 번 시도해 보다가 잘 안 되서, 그냥 영문판으로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과연, 사람들이 문명을 시작하면 "문명하셨습니다~"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더군요.

다음날 동이 터올 때 즈음에,

'아, 한판 더 하고 싶다. 그래도 눈 좀 붙였다가 일하러 가야지.'

하고는 게임을 마쳤어요.

그 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애들을 재우고 나서는, 바로 문명V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동이 터올 때 즈음에

'아, 한판 더 하고 싶다. 어제는 잠을 잘 못 잤으니, 오늘은 조금 일찍 자야겠다.'

하고는 게임을 마쳤어요.

그 날도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애들을 재우고 나서는, 바로 문명V를 또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날 동이 터올 때 즈음에

'아, 한판 더 하고 싶다. 이틀 동안 잠을 잘 못 잤으니, 오늘은 조금 일찍 자야겠다.'

하고는 게임을 마쳤어요.

문명V를 하던 근 3일은 거의 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문명V를 컴퓨터에서 지워버렸습니다.

'이러다가 내가 정말 폐인이 되면, 우리 식구들 다 굶어죽겠다. 아예, 쉽고 재미있는 보드게임을 사서 애들이랑 하는게 오히려 낫겠다.'

그 이후로 서점에 들를 때마다 보드게임을 하나 둘씩 사 오기 시작했고,

보드게임 해외구매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온갖 게임들의 룰북을 읽다 보니 보드게임의 게임 메커니즘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황혼의 투쟁이나 C&CA, 영광의 길, 한니발 등등의 워게임 룰북을 읽다보니 '시드마이어의 문명' 룰북이 너무 쉽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Korea: The Forgotten War나 Virgin Queen 등의 룰북을 슬슬 보기 시작해야 나중에 애들이랑 워게임 진하게 돌릴텐데...'

룰북 읽는 법과 게임 메커니즘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다시 문명 보드게임을 딱 한번만이라도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여보, 나 문명 보드게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온갖 보드게임을 모아 놓다 보니까, 게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감이 와."

"아, 잘 됐다. 첫째랑 해보세요. 아빠랑 문명 해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데."

"첫째랑 해봐야지."

저번주 금요일에 드디어 문명 보드게임을 했어요.

'시드마이어의 문명'을 서점에서 사 오고 나서 거의 1년 만에 돌려본 셈입니다.

아들에게 대충 게임 윤곽에 대해 설명하고, 자잘한 룰은 진행하면서 설명해주기로 했습니다.

"아빠,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은데?"

"응. 아빠도 괜히 쫄았나 봐. 진짜로 문명을 사온 날에는 설명서를 읽어도 이해가 안 되더라구."

"코끼리 고기보다 안 복잡한 것 같아." (우리 아들은 C&CA를 코끼리 고기라고 합니다. 카르타고 군의 코끼리 부대를 처치할 때마다 코끼리 고기를 먹는 느낌이 난다나 뭐라나..)

"그러게, 거기는 유닛들끼리 외워야 할 사항이 많아서."

몇 턴을 돌리다 보니, 벌써 11시가 되어 갑니다.

"우리 이제 그만 하자. 이제 자야 내일도 시작하지."

"그래요 아빠. 그런데, 정말 재미있다. 딱 한 턴만 더 해요."

"그러자."

저번주 금요일에는 한 턴을 더 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오늘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보니, 첫째가 반깁니다.

"아빠, 우리 문명 하자."

"어, 근데 아빠 수영 다녀와야 하는데. 수영 마치고 오면 10시 10분인데, 그 때까지 안 자고 버틸 수 있어?"

"당연하지. 기다릴께요, 아빠."

수영장에서 수영강습을 받으면서도 제 머리 속에는 문명이 뱅글뱅글 돌아갑니다.

집으로 와 보니, 첫째는 잠을 자지 않고 말똥말똥 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아빠, 문~~명~~!!"

"그래 하자. 근데 오늘 한 다섯 턴 정도만 하자. 너무 늦었다."

"더 하고 싶은데. 오늘 하루 종일 아빠 기다렸다구요."

"세팅이 오래 걸리잖아. 에이, 그래. 하자. 딱 11시까지만 하고 자러 가자."

"그래요 아빠."

우리는 다시 문명을 시작했고,

우리는 타임머신을 탔습니다.

"어, 벌써 11시네. 자러 갈까?"

"재미있는데. 아쉽네."

"그래? 그럼 딱 15분만 더 하자."

"그래요."

우리는 문명을 재개했고,

우리는 다시 타임머신을 탔습니다.

"아, 11시 15분이다. 정말로 자러 가자."

"내일 또 해요, 아빠."

"그래 내일 또 하자. 재미있네."

온갖 보드게임을 해 오던 우리 부자는,

앞으로 몇 달 동안은 문명에 안착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부자는, 문명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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