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무엇을 번역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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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5 23:27

새해가 되어 문득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엇을 해왔나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미흡하기 그지없는 제가 그나마 당당하게 잘 했다, 말할 수 있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번역이었습니다. 올해로 번역을 시작한지 10년째더군요(년수로만 치면 11년차입니다만 1년 꽉 채운 단위로 계산해서 10년으로 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2000년대 초창기 인터넷에 번역물들이 많이 없어 답답한 마음에 아마추어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영상물의 자막이나 웹소설, 웹코믹 등을 허가 받으면서 번역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가족이나 지인들과 함께 즐기기 위해 번역을 시작했는데, 컴퓨터를 포맷하기 전 CD로 굽기는 용량이 크고 날리기는 아까워 무료 도메인 자료실(그때 한참 유행했었죠ㅎㅎ)을 이용하여 자료를 올렸습니다. 아마 일본 게임 록맨 시리즈의 웹코믹 번역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예상 외로 반응이 좋아 뭔가 흐뭇한 마음에 번역을 계속 올리게 되었습니다. 2~5년차까지는 소위 말하는 공명심에 번역을 계속 했던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이나 팝송의 노래 가사, 일본 교양 프로그램의 자막, 여러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자막 등등. 야후 재팬의 지식보따리(한국의 지식iN과 비슷한 서비스입니다)에서 활동했던 것도 이때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사람의 덧글이 달리니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더군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렇게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번역을 취미로 삼고 하게 되었습니다. 번역을 위해 다소의 프로그래밍과 HTML, 포토샵과 동영상 편집 기술을 독학한 것과 프리랜서 번역가로 짧게나마 활동했던 것도 이때였습니다. 5~9년차에는 저작권법의 파동이 불어 한국 번역계가 크게 주춤하였습니다. 소위 "'에뮬게임'을 필두로 한 한X루 등의 굴지의 한글화 팀들이 많이 폐쇄되었습니다. (원사운드 님께서 이걸 소재로 만화를 그리셨는데 그 당시 한국에서 황무지였던 한글화계를 일으켜세운 팀들의 노력과 정신을 다소 폄훼하여 표현하신 듯하여 지금까지 다소 유감스럽습니다. 만화적 재미를 위한 왜곡이셨을 것이라 추측하고는 있습니다만...ㅠㅠ) 이때 잠시 번역을 쉬면서 작업물을 되돌아보니 약간 장인 정신(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하진 않습니다만^^;)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서당개도 10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식견 비슷한 게 다소 생긴지라, 예전에 했던 번역물들에 흠이 보여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철없이 들떴었던 예전보다 조금 조심스러워지더라고요. 여러 번역에 대한 논문도 읽기 시작하고,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게임 번역 프로젝트에 참가했고, 대부분의 번역물을 비공개로 돌리거나 지인에게만 공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인생 최고의 게임이었던 던전 크롤이라는 로그라이크 게임을 번역한 때가 아마 이때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던위치 호러도 이때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10년차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밤 키보드를 두드리다 문득 의문이 들더군요. '나는 왜 번역을 하고 있는가?' 이런다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예전처럼 덧글 하나하나에 가슴 뛰는 나이도 아니다. 몇 시간 며칠 몇 달이 걸리는 작업을 왜 하고 있는가? 던위치 호러 번역에는 대략 2년이 걸렸습니다. 물론 중간에 쉬기도 많이 쉬었지만, 작업에 매진할 때는 하루 8시간씩 컴퓨터를 붙잡고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친구들에게 농담 삼아 '도 닦듯이' 번역한다고 말하고 다니곤 했습니다. 배경지식을 쌓기 위해 러브크래프트 원문 소설과 황금가지판 번역본을 비교해 가며 읽기도 했고, 거장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게임이라 생각하니 번역의 표현 하나하나의 문학성을 신경쓰며 타이핑하게 되더군요. 중간에 성에 안 차 작업을 뒤엎은 것은 무릇 기하인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오타와 오류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를 빌어 오타, 오류를 제보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ㅠㅠ) 한 번 잡은 일은 대충 하지 못하는 성미인지라 그리 고생했던 듯합니다.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가? 보드게임계의 핸드메이드 논란을 계기로 던위치 호러 자료를 비공개 처리하고 고민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번역 자체에 대해 비방을 하기도 한다. 어쩔 땐 욕까지 듣는 번역을 굳이, 왜 하고 있나? 계속 고민하면서도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황색의 왕 번역은 계속하고 있더군요. 결론이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길었지만 결론 자체는 간단했습니다 "내가 좋아하니까. 그리고 그 자료를 나만 쓰기 아까워서." 저는 번역 그 자체를 좋아합니다. 번역은 언어와 언어 사이를 넘나드는 지적 유희라고 생각하며, 제가 쓴 표현 하나하나를 다시 찬찬히 살펴볼 때 아귀가 잘 들어맞으면 그 어떤 성취감까지 듭니다. 게임이나 영상매체 같은 직관적인 재미는 없지만, 번역 그 자체만 줄 수 있는 특수한 그 어떤 재미가 저를 매혹시킵니다. 그리고 공개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 제가 번역한 자료는 어떻게든 날아갈 것입니다. 저장한 웹사이트가 망할 수도 있고, 하드가 백업 전에 수명을 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껏 번역한 자료, 남들도 다같이 쓰게 하는 것이 더 유용한 활용법 아닌가? 예전도 지금도 제가 번역물을 공개하는 이유는 그저 이것에 다를 바 없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간에 오늘도 내일도 저는 번역을 할 것입니다. 덧글 등으로 칭찬해주시면 정말 감사하지만, 귀찮으시면 그냥 자료만 즐기시고 가셔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이 잠깐 즐거우셨다면 만족합니다. 공개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다른 번역자 분들도 비슷한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아니라면 죄송합니다ㅠㅠ) 그러나 적어도 섣부른 폄훼나 인격에 대한 비난은 조금만 더 자제해주신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사람인지라 그런 말에 간혹 속이 상하고 마음이 자꾸 흔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ㅠㅠ... 훗날 올 어느 날에 여러분과 함께 보드게임을 하다가, 우연찮게 이 글을 다시 읽고 아, 이땐 이런 일이 있었지. 그래서 이런 글도 썼었지, 하고 웃음지으며 회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차례 기지개를 죽 편 후, 그때에도 이런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무엇을 번역할까!" 간밤에 주절주절 말이 길었습니다. 여기까지 장문을 읽어주신 보드라이프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항상 즐거운 보드게임 라이프 즐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