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코보게에 실망했는가에 대한 고찰.

1,150 조회

2024.11.15 12:47

최근 논란에 대해 많은 분들이 보드라이프에 각자의 의견을 남겨주시는 걸 보고, 저 또한 개인의 생각을 여러분과 나눠보고자 미뤄뒀던 회원 가입을 했습니다.

저는 한 때 코리아보드게임즈의 온라인 서포터즈로도 활동했었고, 코보게 공모전에도 창작 보드게임을 여러 번 출품할 만큼 코보게에 호의적이었습니다. 2025 공모전도 출품을 준비 중이었구요. 그래서인지 이번 사건에 더 큰 실망을 느낍니다. 허무함이 분노로 바뀔 때쯤 머리를 식히며 차분하게 돌이켜 보았습니다. 무엇이 나를 실망하게 했는가, 코보게는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인가?

번역은 단순히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원작에 내포된 의미나 상징, 사회 문화적 배경, 주어진 환경이나 맥락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할 때 비로소 가치있는 작업이 되겠죠. 해당 관점에서 코리아보드게임즈는 작품의 배경과 맥락 상 부자연스러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명백히 오역입니다. 첫 번째 잘못입니다.

그러나 코리아보드게임즈는 이 단어를 수정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단어가 가진 의미가 긍정적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보드게임에 게임 밖의 의도나 사상이 반영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설령 그 의도가 선한 의도라고 해도 말입니다. 플레이어가 게임 밖 제작진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하고, 그것이 옳은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면, 그 과정이 플레이어가 게임을 게임으로 즐기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수많은 보드게이머가 코리아보드게임즈의가 남긴 오역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살피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저 단어일 뿐이라고, 누군가는 특정 집단의 선전선동 전략이라고, 누군가는 기업 대표의 과거 행적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누구의 생각이 정답일 지는 알 수 없지만, 명확한 건 그들 모두 <메디컬 미스터리>를 게임으로서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동안 의심없이 즐겨왔던 코리아보드게임즈의 다른 게임에는 아무 의도가 없었을까요? 앞으로 발매할 작품들은요? 있다면 그 의도의 선악을 우리가 올바르게 구분해낼 수 있을까요? 결국 코리아보드게임즈는 플레이어가 게임의 메커니즘, 스토리와 캐릭터, 구성물과 디자인, 전략과 같은 본질을 즐기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 잘못입니다.

끝으로 이는 해외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해당 작품의 원작자를 비롯해 코리아보드게임즈를 통해 유통된, 유통될 수많은 작가의 작품에 색안경을 씌운 셈입니다. 세 번째 잘못입니다.

따라서 저는 언론에 보도되는 자극적인 제목처럼 코리아보드게임즈가 단순히 어떤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실망한 것이 아닙니다. 특정 사상을 가진 집단으로 낙인찍거나 사상검증을 요구하고 싶은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저 위에서 언급한 잘못들을 저질렀다는 것에 실망했고, 비판적인 리뷰와 댓글을 숨기면서 개선의 여지를 보이지 못한 것에 더욱 실망했습니다. 이 실망감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의 솔직한 생각을 담은 이 글이 여러분에게도 공감과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