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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yŏ

고려는 피겨 그랑프리, 로얄 터틀, 프레즌트, 블랙스완, 츄츄트레인 등을 디자인한 김건희님의 작품입니다. 프랑스의 문스터 게임즈를 통해 퍼블리싱되고 국내외로 큰 인기를 끌면서 화제가 되었죠.

게임에는 9종의 캐릭터 카드와 2종의 이벤트 카드, 8장의 라운드 표시 카드, 그리고 선 마커와 코인(승점 토큰)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게임이 시작되면 라운드 표시 카드를 순서대로 쌓아두고, 인물 카드를 섞어서 해당 라운드에 적힌대로 나눠줍니다. 그 뒤 선 플레이어부터 자신의 턴을 받는데, 자신의 턴이 되면 손에서 한 종류의 카드를 몇 장이든 골라서 뒷면으로, 몇 장인지 모르게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모든 플레이어가 이렇게 카드를 준비하면 다시 선 플레이어부터 이 카드를 공개하고, 플레이에 놓인 카드의 능력을 발동합니다. 그런데 이 때, 카드의 능력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능력을 발동하려는 카드를 자신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발동할 수 있는 카드의 능력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1 초능력자: 지배력 타이 브레이커

2 스파이: 코인 훔치기/수호자가 없다면 로비스트 방어

3 정치가: 라운드 카드 제한 2장 추가

4 사제: 이벤트 카드 한 장 폐기

5 선주: 카드를 플레이할 때 한 종류를 내려놓는 대신 서로 다른 두 장을 플레이 가능

6 은행가: 코인 획득

7 수호자: 야만인 방어

8 정보원: 라운드 시작 시 카드 1장을 더 받고 시작

9 상인: 능력 없음

-1 야만인: 플레이할 때 다른 플레이어의 개인공간에서 카드 폐기

-1 로비스트: 플레이할 때 다른 플레이어과 개인공간의 카드 교환

각 플레이어가 돌아가면서 능력을 사용하고 나면 라운드가 끝나고, 라운드가 끝나면 각 플레이어는 라운드 카드에 표시된 제한에 맞추어 자신의 개인공간에 내려놓은 카드를 조정합니다. 단, 이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이벤트 카드를 먼저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런 뒤 버려진 카드와 사용되지 않은 카드를 모두 섞고, 다음 라운드를 진행합니다. 이렇게 총 8라운드를 진행한 뒤, 개인공간의 카드 중 자신이 가장 많이 확보한 것들의 점수와 게임 중 얻은 코인의 개수를 더하여 점수가 가장 높은 플레이어가 승리하는 것이죠.

게임은 이렇게 간단하고 빠르게 진행되며, 라운드 수도 짧아서 길어야 20분이면 한 게임이 끝나는데, 그 와중에 고민할 것은 꽤 많습니다. 일단 다른 사람보다 카드를 많이 확보해야 카드의 능력도 사용하고 점수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누가 무엇을 할 것인지 상황을 봐야 하고, 거기에 어떤 카드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유리할 것인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가령 게임이 끝나고 큰 점수를 주는 상인을 초반에 많이 내려놓으면 후반까지 지배력을 잃지 않을 확률이 높지만, 게임을 진행하는 데는 사실상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게임 중에 도움이 많이 되는 카드를 주로 내려놓으면 게임을 유리하게 이끌기는 좋겠지만, 최종적인 점수를 대량으로 확보하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라운드가 진행되면서 받는 카드는 줄어들고 보유할 수 있는 카드는 늘어나는데, 보유할 수 있는 카드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매 라운드 어떤 것을 남길 것인지 잘 결정해서 필요 없는 카드를 버리는 운용도 필요합니다.

고려가 전략적이라기보다는 전술적인 게임이라는 평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확실히 카드를 어떻게 받는가에 따라 플레이가 크게 달라지고, 운이 없어 다른 플레이어와 선택이 중복되었을 경우 영 좋지 않은 꼴을 당한다는 점에서는 운과 임기응변이 더 중요한 게임입니다.

하지만 초반에 사용한 카드가 후반까지 영향을 끼치고, 라운드 끝에 이것을 조금씩 수정할 수도 있다는 부분에서는 제법 전략적인 면도 있지 않나 싶고, 전술적인 카드 운용 자체에서도 꽤 깊은 묘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시스템 외의 부수적 요소 중에서 영 마음에 드는 구석이 별로 없다는 것은 다소 아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제목이 고려인 이유도 모르겠고, 고려인데 스팀펑크가 테마인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테마와 연관성이 큰 게임은 아니니까 한국인 디자이너가 만든 게임을 고려로 이름짓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만, 고려와는 아무 연관도 없는 테마의 일러스트가 들어간 것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러스트 자체야 수려하고 해외에서도 호평이니까 아무래도 상관 없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아예 일본 무사로 그려진 수호자를 보자면 게임과 제목과 일러스트가 완전 제각각인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게다가 카드 사이즈가 기상천외하다는 점도 영 마음에 걸리고, 아이콘의 명료성도 그리 신통치 않은데다 카드의 장수가 중요한 게임인 만큼, "러브레터"처럼 레퍼런스 카드 네 장만 더 들어있었으면 참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수많은 보드게임들이 증명해 왔듯이 보드게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고,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고려는 분명 좋은 게임입니다. "도미니언"이나 "레이스 포 더 갤럭시"처럼 몇 시간을 책임질 수 있는 킬러 타이틀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킬러 타이틀만 좋은 게임인 것은 아니죠.

고려는 누구에게나 소개할 수 있을 정도로 규칙도 간단한 편이고, 그러면서 이기기는 쉽지 않고, 게임 내내 상호작용이 끊이지 않으며, 빠르게 끝나고, 세팅이 간단해서 몇 번 연달아 하기도 좋습니다. 요즘 들어서 "하는 방법은 간단하면서 내용은 그리 가볍지 않은 게임"은 보드게임계에서나 모바일 게임계에서나 왕도로 여겨지는데, 그 왕도를 잘 포착한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빠르지만 가볍지 않은 카드 영향력 대결-고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