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 혼자 술 먹던 외국인에게 말 걸었던 썰
자리를 털고 일어나
카운터로 이동해 술값을 계산했다.
그리고 카운터 옆 좁은 자리에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는 외국인을 발견했다.
그리고 술 기운에 호기를 부려 말을 붙였다.
어디서 왔는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미국 캐롤라이나에서 왔다는 그 친구는 군인이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장난스럽게 그의 팔뚝을 만져보고는
당신은 군인이 맞군. 이라고 말했다.
일년동안 한국을 여행하고 있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팔자가 참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한다고 하니까,
자신도 한국어를 잘 못한다고 했다.
한국인들은 미국에 대한 친근감이 있다고 했다.
빽투더퓨쳐, 인디아아 존스, 스타워즈 같은 영화들을 열거하며
영화문화들 때문에 그렇다고.
나의 기분을 맞춰줄려는 것인지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그 친구는 영화 한 편을 더 언급했다.
007? 그건 영국영화 아니야?라고 묻자, 미국영화라고 답했다.
우리는 통성명을 나눴다.
난 농담반 진담반이라고 쓰면서, 사실은 진담에 더 가깝게
너가 여자였다면 좋았을텐데 말한다.
난 게이는 아니야, 난 너의 폰 넘버가 알고 싶어. 괜찮아?
그리고 난 아마도 결코 너에게 전화를 걸진 않을꺼야 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알려줘.
그는 아주 잠시 망설이다가 곧 자신의 번호를 알려준다.
난 그 번호를 7년된 핸드폰에 입력했고, 그가 알려준 이름과 함께 저장한다.
내가 그 번호로 전화를 걸자, 테이블에 올려놓은 그의 폰에 내 번호가 뜬다.
다시 술에 취하는 날이 오면, 자신에게 전화하는 거 아니냐는 말에
난 빵 터지고 만다.
난 문득 영화 트루로맨스(1993)에서 헐리우드의 한 호텔 객실에서
자신의 망상 속 엘비스가 불렀던 노래의 가사 생각나서,
어쩌면 난 너무 외롭기 때문일지 몰라. 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그만 지인이 밖에서 기다리고 이제 그만 가봐야 된다고 말한다.
그는 서투른 내 영어의 끝에 적당히 알아듣고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밖으로 나오니, 지인이 밤거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상황을 설명하고, 우리가 몇 시간 전에 만났던 홍대입구역 3번 출구로 향했다.
좋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만남이 조금 아쉬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어느 순간, 쿨한 척 작별인사를 했다.
사람들의 시선들을 (특히 남자들의) 끌어당겨 잠가 가둬버리는,
그런 뒷모습을 가진 여성을 뒷따라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러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소변이 너무 마려워 조금 길고 긴 지하도를 사람들 사이로 뛰었다.
강서구청에 다달았을 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맞을만한 비였다.
다른 모임이 있는 그 장소에 도달했지만, 이미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난지 2년쯤 되었을까
이태원에서 알게 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2개의 번호 다 모두 이젠 없는 번호로 나왔다.
아무 곳에도 닿을 수 없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횡단보도의 신호등을 기다렸다.
신호대기 중인 버스가 쏟아내는 헤드라이트의 불빛에 빗줄기가 선명히 비춰지고 있었다.
빗줄기들은 그대로 아스팔트 바닥에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유혹하듯 탐스러운 엉덩이에서 뿜어져나오는 자동차의 빨간 테일램프,
내 머리 위의 신호등의 저 초록 불빛, 그리고 저 밤하늘의 오색찬란한 술집과 모텔의 불빛들이
비에 젖은 검은 아스팔트 바닥 위에 어지럽고, 아름답게 흐드러지고 있었다.
아무도 그것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냥 그것은 그곳에 있을 뿐이다.
밤이고, 비가 오면, 언제나 그곳에 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그래서 나도 외롭지 않은 척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