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도 회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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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6 18:26

1. 프롤로그

최근 코보게에서 1862가 출시되었다. 와, 이제 18시리즈도 한글판이 출시 되는구나 싶다. 게이머의 저변이 넓어진건지, 억지로 넓히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게이머의 입장에서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이제는 영문 룰북을 헤딩 해가며 18시리즈의 요모조모를 파헤칠 필요도 없으니, 참 기쁘지 아니한가. 1862에 대한 글을 잠깐 읽다보니 문득 예전에 써놓은 이 게임의 리뷰가 생각났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한참 전에 씌여진 이 리뷰를 여기에 올리는 것으로 나의 기쁨을 대신하려 한다.

원래 이 게임의 리뷰는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올렸던 게임의 리뷰는 한 게임을 향한 나의 마음을 모두 담아내고 싶어 쓴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리뷰를 쓰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아, 이것도 담아야 하는데! 이 말도 써둬야 하는데! 이러면 안되는데! 자꾸 이렇게 사족이 길어지니 한참을 써두다 '에이 덮자' 하는 글들이 점점 쌓여만 갔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쓸 만한 적절한 게임을 찾다 보니 이 게임의 리뷰를 작성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 감상이 뭐, 쓰니 마니 할 정도로 무게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내가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남긴다 해서, 이 게임이 폄훼될 이유도 없다. 그저 개인이 이 게임에 대해 감상을 남겨보아야겠다고 느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게임은 그에게 어떠한 인상이든 남겼다고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악플보다 나쁜 것은 무플이라. 좋으나 싫으나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그 게임에 대한 애정 또한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주면 그 자체로도 좋을 듯 하다.

2. 경영과 주식

여러 보드게임이 있다. 그 중 경영을 주 테마로 하는 게임 중 팍 떠오르는 게임이 뭐가 있을까? 아, 그라운드 플로어. 말 그대로 찐 경영게임. 환경을 예측하고 상품의 수요나 공급망, 마케팅까지. 어찌보면 제조업 기반 회사의 경쟁을 그대로 보여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경영 테마의 게임을 굳이 회사에 한정하지 않아도 좋다. 적당히 발전에 포커스가 맞추어진 게임이라면 광의의 경영이라 볼 수 있겠다.

한편 주식거래를 기반으로 한 보드게임도 참 많다. 어콰이어나 샤크, 블랙 프라이데이라든지, 합 운트 굿(한글판 이름을 갑자기 까먹었다)도 있다. 내가 얼마나 큰 손인가에 따른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주식 게임의 범주 또한 참 넓다.

(그라운드 플로어. 개인적으로 사진처럼 초판 느낌의 청사진같은 보드가 더 마음에 들긴 한다만...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image/1711059/ground-floor)

경영과 주식, 양자는 실제 사회에서 제대로 융합되어 굴러가고 있다. 그런데 불가분의 관계 같은 두 테마는 왜 따로 떨어져서 출시되는걸까?

가장 큰 이유는 게임의 볼륨 때문이라 생각한다. 담을 수록 룰도 복잡해지고, 게임 시간도 길어진다. 컴포넌트도 많아져 게임의 가격 상승 원인이 되리라 짐작한다. 또한 그에 대한 반동으로 접근성과 인기는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두 테마의 융합이 이루어진 게임은 없을까? 물론 있다. 대표적으로 18시리즈가 그렇다. 18시리즈는 위의 여러 한계에 손을 뻗었다고 보아도 좋을 듯 하다. 특히 초기작은 주식과 경영을 융합한 댓가를 톡톡히 치른 듯 했다. 최소 5인 이상은 모여야 흥미진진한 게임을 즐길 수 있었으며, 엄청나게 큰 보드를 펼친 후 엄청난 시간 또한 들여야 했다.

(1829 (1974년 작)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image/224206/1829)

이 게임은 즐길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게임 중 하나이지만, 아쉽게도 그 미약한 접근성 때문에 차마 도달할 수 없는 여건에 머무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희소성이라든지, 언어의 압박이라든지, 진득하게 이 게임을 즐기기 어려운 시간적 한계라든지, 복잡한 룰의 게임은 되도록 피하려는 플레이어라든지, 혹은 잔혹한 룰을 피하려는 성향이 있다든지.

그래서 18시리즈도 룰이나 인원의 제약을 벗어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1889나 18al, 18릴리퍼트 등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깎은 디자이너들의 열정과 피땀이 눈에 선하다. 날 봐줘! 너희를 위해 요즘 유행하는 시스템도 넣고, 아니! 맵도 줄이고, 카드도 줄이고, 열차도 줄이고... 아, 이제 보드도 없앨 게!

경영과 주식 테마를 한 게임에 융합하기 위한 시도, 그러면서도 간결한 룰 등으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 이 어려울 것 같은 두 가지를 기어코 비비려 한 게임이 있었으니, 바로 이번 리뷰의 주인공 동인도 회사이다.

3. 동인도 회사

각 플레이어는 무역회사를 경영해야 한다. 총 5라운드로 구성되어있고, 5페이즈가 끝나면 한 라운드가 종료된다. 그 안에 인도 및 아시아로부터 물건을 떼와서 유럽에 팔아야 하는데, 몇 가지 상품의 수요와 공급을 예측하여 특정 물건을 파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행위를 보다 더 잘 하기 위해서는 선박이나 항구 등 사내 설비가 충족되어야 한다. 해당 회사는 각각 주식이 발행되며, 회사의 실적이나 주식 매매에 의해 주가가 변동된다. 게임 종료 후 주식의 현재가치와 회사의 자산을 합한 액수를 비교한 후, 등수를 가린다.

이 게임은 이 정도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방금 글을 쓰며 한 번 더 느꼈지만, 게임 내 요소를 보면 있을 건 다 있다. 회사의 무역, 수요, 공급, 그리고 주식까지. 문제는 이 게임이 이를 얼마나 게임에 잘 녹였느냐이지만.

가만 보면 매 라운드 변동되는 시장의 수요와 공급을 일부만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나, 항구와 선박을 장만하여 누구보다 빠르게, 그리고 많은 양을 선적할 수 있는지의 여부, 각종 부대시설로 상품 구매 및 판매에 여러 메리트를 제공하는 재미 등 여러 요소가 꽤나 알차게 버무려져 있다.

(동인도회사의 보드판)

주식 매수나 매도 타이밍, 혹은 그 사이 벌어지는 꼼수나 편법 등도 꽤 쏠쏠해 보였고, 나만 아는 수요와 공급으로 블러핑을 치는 재미도 있을 법 했다. 인도 및 아시아 지역에 상품을 구하러 갈 때는 싸구려 배를 마치 대단한 척 다른 곳에 보내고, 진짜배기는 내가 목표하는 상품을 구매하기 위한 장소로 스윽 밀어 넣는다. 그런데 이게 웬걸? 수요 칸을 미처 조사하지 못해 상품이 펑펑 떨이로 판매되기 시작한다. 망했다!

아, 그래. 내가 무슨 장사냐. 다른 것 필요 없다. 너 경영 잘하니 너에게 모든 걸 맡긴다. CEO에게 경영을 일임하고 나는 배당이나 챙기련다. 뭐 이런 류의 플레이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렇듯 1시간에서 1시간 반 전후로 꽤 재미있는 놀이가 가능하다. 운영의 묘와 주가 예측으로 인한 자본시장의 흐름을 룰 안에 잘 녹인, 참 기특한 게임이다. 요 간단한 룰에 이걸 다 녹이다니. 참 볼 수록 신기하고 요상하단 말이지. 요리조리 둘러봐도 이 게임은 구색이 정말 잘 갖춰진 게임임에 분명하다.

(선박 운용과 수요 공급칸의 조율은 회사 부흥의 지름길)

음, 그래. 잘 만들어 졌는데... 그런데 뭔가 조금 이상하다. 게임을 즐기고 나면 거나하기 보다는 약간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보드에 눈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있거나, 수요와 공급에 탄성이 터질만한 긴장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잘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이런 시스템이라면 빵빵 터지거나 긴장감이 들어야 할 것 같은데, 돌아보면 어 이번에는 내가 망하겠네, 저게 뜨겠네 싶은 기계적 리액션만 남았다.

분명 간편한 룰로 경영과 주식을 모두 녹여내는 과업을 달성했지만, 18 시리즈에서 느끼는 흥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뭘까. 무엇이 이 게임을 심심하게 만들었을까. 여기에 들어가야 할 MSG, 그게 뭐지?

물론 이 게임과 18시리즈를 직접 비교할 수는 없다. 18시리즈는 트레샴 이후로 수많은 디자이너의 손을 거쳐 디테일이 다듬어진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18시리즈는 이 게임과는 단순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디테일? 디테일이라. 어찌보면 디테일은 게이머를 미치게 하지 않을까. 와 이런 것도 구현이 되어있어? 속된말로 와! 개쩐다 싶은 디테일은 게임을 갓겜과 그저 그런 게임으로 나누는 분수령이 되기도 하기에.

그렇다면 18시리즈에서 나오는 디테일은 무엇일까? 테마와 절묘하게 결합된 철도회사의 성장,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회사의 발전과 철도로 그릴 수 있는 예측 가능성, 그럼에도 빗나가는 결과, 상대의 견제, 미래를 생각한 실적의 압박, 내가 들고 있는 주식이 휴지조각이 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 등 열거하자면 수 없이 쏟아질 게임속 재미 요소가 있다. 수 시간을 이어가야 하는 게임임에도 일어서서 철도를 빤히 바라보며, 남의 차례임에도 수익을 곱씹어야 하는 흡인력은 말할 것도 없이.

(1830 플레이 사진)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히 동인도 회사에도 수요 공급 예측이나 선박의 속도 등으로 즐길 수 있는 눈치 싸움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8시리즈에서 느껴졌던 쫄깃함이 잘 들지 않았다. 보다 안전해서? 창고 등으로 대변되는 적당한 회피수단이 존재해서? 그냥 게임이 보다 라이트해서?

이론 상 분명히 잘 만들어진 게임 같은데... 왜 심심하지? 분명히 재미있어야 하는 게임인데 왜 터지는 재미가 왜 없지? 솔직히 고백하자. 겉으로 보아서는 이 게임에 뭘 더 추가해야 좋은지 잘 모르겠다.

경영과 주식 모두를 잡은 게임. 이론 상 내 취향에도 맞고 분명히 재미있어야 할 게임인데, 갓겜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듯한 느낌. 딱 그렇다.

4. 마무리

이 게임의 팬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의 평가가 상당히 박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아니, 적당히 즐기는 게임인데 뭘 바라는거야? 무슨 18시리즈랑 비교를 하고 있어?

근데 이 게임, 18시리즈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주식과 경영을 융합한 게임 치고 18시리즈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본다. 5시대에 1시대 갤리온이 사라지는 것도 그렇고, 주식페이즈와 운영페이즈의 구분도 그렇고. 물론 몇 가지 창의적인 면도 있긴 하지만, 묘한 기시감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시스템이 게임으로써 잘 작동한다는 것과, 그 게임이 재미있다는 건 역시 별개의 문제 같다. 이 시스템은 분명 게임으로 충분히 잘 작동하는, 딱딱 어우러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 이야기를 계속 언급하는 이유는, 이 게임이 못 만든 게임과는 결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싶기 때문이다. 잘 만들어졌다. 좋은 게임이다. 그런데 내가 플레이 하고 보면 뭔가 부족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뭐가 부족한지는 잘 모르겠다. 참 무책임하다.

아마 18시리즈를 플레이하며 느꼈던 포만감이 여기에 대비되어 그런지도 모른다. 동인도회사에서 18시리즈의 기시감을 느끼지만, 그 예전 18시리즈를 플레이하며 느꼈던 모든 재미까지 끌어오지는 못하기에 느끼는 아쉬움. 그 쫄깃함을 모두 전달하지 못해서 그런걸까?

그래, 따지고 보면 18릴리퍼트도 비슷했다. 18시리즈가 대단해서가 아니다. 룰을 축약하고, 가지를 치는 과정에서 삭제된 재미요소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짧은 시간에 즐길만한 이 게임에, 최소 6시간 이상 해야하는 18시리즈의 재미를 갖다 대며 비교한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이 게임은 각박한 제약 속에서도 나름의 요소를 충실히 담고 있지 않은가.

아, 게임 하나에 내가 원하는 모든 걸 바라는 게 도둑놈 심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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