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간기 유럽의 운명을 바꿔보자 - 전체주의의 발흥(Rise of Totalitarianism)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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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1 21:07

1. 도입

대전쟁(Great War) 혹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The war to end all wars)이라고 칭해지던 제1차 세계대전이 막 끝이 났습니다. 이제 전후 처리 문제가 남았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전쟁에서 패배한 동맹국 세력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및 합스부르크 제국의 해체로 새로 태어난 중동부 유럽의 국가들에는 이미 사회적 불안이 퍼져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던 이탈리아 역시 민족주의자들이 거세게 반발하며 들고 일어났고, 설상가상으로 새로 태어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비에트 연방의 존재는 이러한 중부 유럽의 갈등과 불안을 더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죠.

이제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여러분은 선택해야 합니다. 사회민주주의 여당이 되어 독일과 이탈리아를 중산층의 경제 위기와 공산주의자 및 파시스트들의 폭력에서 지켜내겠습니까? 물론 그 길은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자유군단과 손을 잡고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일으킨 공산주의 지도자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 등의 살해에 일조했듯이 정당화된 폭력과 피로 이루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정부가 무너지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혹은 공산주의 지도자가 되어 소비에트 연방의 붉은 기치에 합류하고 사회주의 이념을 저버리며 세계 대전을 지지했던 사회민주주의 세력에 복수하거나, 파시스트 지도자가 되어 허약한 사민주의자들과 불순한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정부의 뜻에 따라 하나로 움직이는 파시스트 국가를 만들 수도 있겠습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당신의 적이 될 수도 있고, 동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과연 어떤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2. 소개

위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것과 같이, '전체주의의 발흥(Rise of Totalitarianism/이하 RoT로 호칭)'은 카드 드리븐 시스템을 택한 전략 게임으로 1920~1930년대에 걸쳐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 전체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는 원인을 만든 이념 갈등을 재현한 게임입니다. 게임에서는 파리 강화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인 1919년부터, 히틀러가 수권법을 통과시켜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린 1933년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게임에서 주요 무대로 등장하는 국가는 독일과 이탈리아이며, 그 외 소국(Minor Powers)으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리투아니아,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 총 11개국이 등장합니다. (소련과 터키도 있습니다만, 그 중요도가 높지 않습니다) 게임의 초판은 Calvinus games에서 2017년에 나왔고, 이후 4Dados에서 2019년 재판되었습니다.

게임의 목표는 간단합니다. 사회민주주의(Social-Democracy), 공산주의(Communism), 파시즘(Fascism) 중 한 세력을 맡아 독일과 이탈리아 및 기타 소국들을 최대한 자신의 이념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VP가 높으면 됩니다-_-;) 이를 위해 각 플레이어는 자신의 지지 기반이 되어줄 각 인구 계층에게서 정치적 자금을 받은 다음, 이벤트 카드 등을 사용해 특정 지역에서 (독일 및 이탈리아 내의 여러 지역, 기타 소국들) 선전(Propaganda), 불안정(Unrest), 폭동(Putsch), 체포(Arrest), 깡패 동원(Squads), 입법(Law) 등의 액션을 취해 향후 있을 선거에서 지지층을 확보하거나, 현재의 정권을 무너뜨리면 됩니다.

(사진 - Boardgamegeek 펌) 정말 아름답고 큰 게임판의 모습입니다. 좌측에는 독일, 우측에는 이탈리아가 표시되어있고, 중간에 스페인, 우측에 동유럽 및 발칸의 소국들이 보입니다. 게임판을 확대한 사진으로 차차 설명하지요.

게임판 좌상단에는 독일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쾰른, 함부르크, 베를린 같은 도시는 다른 지역들과 따로 구분을 해놨군요. 사진에는 북돌일, 남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 매클렌부르크, 포메라니아, 브란덴부르크, 작센과 슐레지엔, 동프로이센이 보입니다. 각 지역에서 보이는 모자들과 숫자들은 특정 인구 계층 및, 그 계층이 플레이어가 특정 액션을 취할 때 저항하는 값인 난이도를 나타낸 겁니다. 예를 들어서 베를린에 있는 검은 중절모가 4인 것이 보이시나요? 이 검은 모자는 공무원 및 관료를 나타내는 것으로, 특정 플레이어가 선전이나 불안정 같은 액션을 취할 때마다 최소 4의 값으로 저항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진영에 따라 보정을 받는데, 가령 공산주의 세력은 노동자를 상대로 액션을 취할 때는 난이도가 1 낮아집니다) 왼쪽 위에 있는 숫자와 네모칸들은 승리 점수(VP)를 기록하는 트랙입니다.

게임의 좌하단에는 소국들의 정권을 현재 어느 이념이 잡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소국 정권 트랙(Minor Nations Regime Track)이 있고요, 그 다음에 플레이 순서(Order of Play)와 라운드 트랙(Round Track) 그리고 맨 아래에 턴 트랙(Turn Track)이 있습니다. 플레이 순서는 유동적이나, 상대의 액션 다음에 바로 리액션(Reaction)할 수 있는 권한이 플레이 순서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에 내가 선을 잡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상대에게 선을 주는 것이 좋은지 머리를 굴려야 합니다. 턴 트랙은 각 세력의 핸드 제한 및 선거가 열리는 시점을 표시하는 용도입니다. 라운드 트랙 옆에는 체포되거나 구금된 지도자들을 놓는 칸이 있네요. 지도자 마커는 당시 정치 무대에 등장했던 정치가들이나 주요한 사상가들을 모아놓은 마커인데, 의회에 들어가 대통령 혹은 총리 후보가 되거나 특정 액션을 강화시키는 용도로 쓰입니다. 물론 실제 역사처럼 체포되거나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중앙에는 현재 각 인구 계층의 마커를 놓아, 이 계층이 정치적으로 어떤 세력을 지지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이데올로기 트랙(Ideology Track)이 있습니다. 잘 보면 여러 네모칸 바탕이 불규칙한 세 구역으로 나뉘어져있는 게 보이실 겁니다. 특정 인구 계층이 자신의 구역으로 들어올 때마다 정치적 지지를 받고, 또 자신의 이념에 가까운 네모칸으로 들어올수록 선거에서 더 많은 표를 확보하게 됩니다. 한편 리버럴(Liberals), 카톨릭(Catholics), 사회주의자(Socialists), 민족주의자(Nationalists)라는 기타 정당들 역시 등장하는데, 이 정당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자신의 동맹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고, 또 이 정당들과 힘을 합쳐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게임판 상단에는 의회 구역이 있습니다. 이 칸은 각 정당이 의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나타내는데, 선거에서 크게 이길수록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그에 따라 의회의 표결 확인이 필요한 이벤트가 나올 때마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게임판 우상단에는 독일 및 이탈리아의 경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경제 트랙이 있고, 그 왼쪽에 미국-영국-프랑스에게 독일이 지급해야 하는 배상금의 여부를 나타내는 트랙이 있습니다. 전쟁배상금의 지급이 지연되느냐 아니냐도 게임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진 우측에 있는 동부 유럽 및 발칸의 소국들이 보이시나요? 각 진영은 저 위에 큐브를 놓아 소국들의 안정도를 떨어뜨리고 정부를 전복시킬 수 있습니다만, 다른 국가의 정부가 불안정해질수록 그 국가에서 주는 승점 역시 낮아지게 됩니다.

위에서부터 각각 액션 치트(Action chits), 지도자 마커, 인구 마커입니다. 액션 치트에는 액션의 기본 포인트와 난이도, 지원할 수 있는 자금(=큐브)의 한계가 있고, 지도자 마커에는 지도자의 국적 및 특정 액션에 주는 보너스 정도, 그리고 사망 여부를 판정하는 숫자가 나와있습니다. (NA는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구 마커에는 이 계층의 국적과 선거시 지원하는 표의 수, 정치적 지지 여부 등이 나옵니다.

게임 카드의 경우 이렇게 생겼습니다. 각 세력마다 고유의 덱이 있고, 특정 시기가 될 때마다 카드가 추가됩니다. (참고로 이 게임은 시나리오 A-B-C 및 전체 캠페인으로 나뉩니다) 가운데 카드인 '카프 폭동(Kapp's Putsch)' 같은 경우에는 4점의 Political Point를 제공하면서 난이도가 7인 카드라고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각 카드에는 발동 조건, 카드를 놓고 할 수 있는 행동, 카드를 사용한 이후에 버려야 하는지 여부 / 혹은 위기 카드라면 위기 확인 여부 등등의 정보가 담겨있습니다. 실제 역사를 상당히 잘 반영했기 때문에, 전간기에 대해 지식이 좀 있는 분이라면 무난하게 플레이하실 수 있을 듯 합니다.

게임의 순서는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1) 정치 자금을 모으고, 플레이 순서를 정한다.

(2) 덱에서 전략 카드를 뽑는다. (탐탁찮을 경우 '멀리건' 이라 하여 전체를 다시 뽑을 수 있습니다)

(3) 위기 카드 덱에서 위기 카드를 뽑고, 각 플레이어가 사용할 전략 카드를 공개한다.

(4) 플레이 순서대로 특정 지역에 액션 치트를 놓고, 다 되면 공개한다.

(5) 액션의 종류에 따라 액션을 수행해 특정 지역을 불안정하게 하거나 특정 계층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오고, 나의 편이 되어줄 지도자를 추가로 데려온다.

(6) (3)에서 공개된 위기 카드를 체크한다.

(7) (5)에서 수행했던 각종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는 액션 치트들이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경제 상황을 확인한다.

(8) 수도에 폭동이 일어났는지 확인한다. (일어났다면 정부가 무너진다)

(9) 강대국 및 소국의 정치적 안정도를 확인한다.

(10) 선거가 있다면 선거를 실시한다. (독일 대선, 독일 총선, 이탈리아 총선 세 종류가 있습니다)

(11) VP 트랙을 업데이트하고, (1)로 돌아가 반복한다.

3. 기타 코멘트

게임의 작가인 Luca Cammisa는 오늘날 서구 사회가 제1차 세계대전이 1920년대 사회 계층에 가져온 것과 유사한 위기에 직면했다고 생각하더군요. (중산층 구매력 상실, EU 출범으로 인한 세계화, 사회 보장 제도의 붕괴 등등...) 이런 상황에서 포퓰리즘과 우익 운동이 부상하는 것이 100년 전과 비슷하게 느껴지며, 때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전체주의가 어떻게 등장했는지 사회적 메커니즘을 구현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고, 게임의 시스템을 통해 역사책을 읽으며 흔히 할 수 있는 '볼셰비즘이 러시아 밖에서도 성공할 수 있었을까? 파시즘과 나치즘의 집권은 필연적이었나?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이들을 막을 수 있었나?' 같은 질문에 답을 제공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작가가 참고한 서적 중에는 국내에도 번역되어 출간된 『극단의 시대』(에릭 홉스봄) 『강대국의 흥망』(폴 케네디) 같은 유명한 책도 있습니다.

아직 정식으로 게임을 돌려본 것은 아니지만, 화이트님이 번역을 부탁하면서 실물 게임을 맡기고 가셨기에 혼자 시뮬레이션해보고 이리저리 뜯어볼 수 있는 기회는 있었습니다. 우선 장점이라 한다면 소재의 독특함과 충실한 구성이겠습니다. 그 동안 바이마르 공화국을 소재로 다룬 보드게임은 간혹 있었지만 전간기의 독일과 이탈리아를 이렇게 자세히 다룬 게임은 흔치 않습니다. 그 동안 전간기 역사를 소재로 한 관심은 주로 스페인 내전이나 러시아 혁명기에 집중되었고, 가끔 마이너한 소재로 소련-폴란드 전쟁이나 핀란드 내전, 아일랜드 독립 전쟁 등이 나왔습니다. 반면 워게임은 아니지만 주목할 만한 소재를 가지고 세 이념이 상호작용하는 게임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뜻깊다고 생각합니다. 대체역사를 만드는 재미도 있기도 하고요. 저는 안토니오 그람시를 이탈리아 총리로, 로자 룩셈부르크나 헤르만 괴링을 독일 총리로 선출시키는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벌써 웃음이 나오네요. 특정 계층에게 영향을 미쳐 선거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할 수 있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부를 뒤집을 수도 있는 등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점도 괜찮아보였습니다. 오랫동안 선거를 소재로 하는 게임을 찾고 있었는데, 제가 기대하던 수준은 '디 마허' 외엔 없어보였습니다만 RoT로 가볍게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반면 단점이라 하면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아이콘들과 (특히 인구 마커는 최악입니다) 온갖 정보를 쑤셔넣은 카드... 가 우선이겠고, '매우 중요' 라는 말을 남발하는 규칙서에도 불만이 있습니다. 특히 총선 하는 법을 플레이어 보조 매트에만 실어놓은 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메커니즘 중 하나인데 너무하더군요. 처음 돌리는 사람에게는 '그래서 내가 뭘 해야 한다는 거야?' 하고 감이 안 올 수도 있겠다는 추측이 듭니다만 이것은 게임을 돌려봐야 알겠네요.

현재 RoT 규칙서의 번역은 거의 완성되었고, 검수 및 카드 한글화 작업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 당장 게임을 돌리라고 해도 돌릴 수는 있겠지만, 아마 전체 자료를 완성하려면 4월까지는 기다려야 할 듯 하네요. 자료가 완성되면 보드라이프에도 올릴 테니 많이들 관심가져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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