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컴 호러 : 카드 게임 리뷰(스포일러 거의 X)
*본 리뷰는 던위치 레거시, 카르코사의 길, 잊힌 시대 캠페인까지 진행하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스토리에 대한 스포일러는 없도록 작성하였지만, 스토리의 진행 방법에 대한 대강의 내용은 들어있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에서의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이시면 빠르게 뒤로 가기를 누르시기 바랍니다.
*스포일러가 최대한 없게 하기 위해 사진은 넣지 않았습니다.
===============================================================================
스토리가 게임플레이의 중요한 부분이 된 보드게임이라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개념이 아닙니다. 그리고 매우 다양한 게임의 장르에서 스토리를 차용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스토리텔링 게임"이라는 장르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천일야화부터 시작해서, 추리물과 스토리를 결합한 게임으로는 타임 스토리즈, 셜록 홈즈 : 컨설팅 디텍디브, 디텍티브 : 모던 크라임 등이 있고, 최근에는 협잡(정치질) 게임과 스토리를 결합한 왕의 딜레마라는 게임이 나오기도 했지요. 생각보다 이 범위는 상당히 넓어, 심지어 이 분야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 같았던 유로 게임까지 발을 뻗쳐 일꾼놓기와 스토리가 결합한 게임으로 니어 앤 파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아컴 호러 : 카드 게임도 분명히 이러한 스토리가 결합된 보드게임이라는 기조에서 나온 게임입니다. 다만 이 게임에는 기존에 다른 게임에서 존재했던 굉장히 다양한 요소들이 섞여 있습니다. 고정된 보드판 위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카드를 이용하여 맵을 만드는 것은 7대륙을 닮았고, 기본적으로는 LCG의 시스템을 차용하였으며, 아이템 슬롯과 능력치가 게임에서 사용되는 형태는 엘드리치 호러나 아컴 호러와 비슷합니다. 고유 약점은 엘드리치 호러의 캐릭터별 보상/파국을 파국만 남겨놓고 변주한 버전과 같고, 파멸/단서야 아컴/엘드리치 시리즈를 하신 분들이라면 (완전히 서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익숙한 시스템이겠죠. 토큰을 뽑아 보정치를 적용하여 성공/실패를 결정하는 시스템은 사실상 엘드리치 호러의 주사위를 토큰 버전으로 바꾼 것과 같고요. 그러니까 약간 비빔밥같은 게임입니다. 이렇게 여러 특징들이 뒤섞여있는 게임이지만 이 게임이 가지는 주요한 특징으로 이 게임을 요약하면 결국 "스토리 중심 협력 LCG"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협력형 보드게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바로 게임의 시스템에 대하여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주 목적인 쪽에 가까운 게임과, 시스템에 대한 승리보다는 사람들 간의 협력 자체와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즐거움이 주 목적에 가까운 게임입니다. 물론 모든 게임이 한쪽 성향만 가진 것도 아니고, 디 크루와 같이 둘의 중간쯤에 위치한 게임들도 있긴 합니다만 일단 전자로는 로빈슨 크루소, 엘드리치 호러, 디스 워 오브 마인, 에이언즈 엔드 등을 꼽을 수 있겠고, 후자로는 더 마인드, 팀 3 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아컴 호러 : 카드 게임은 전자에 해당하는 게임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사람과 사람의 협력을 어떻게 재밌게 이끌어내느냐보다는, 시스템이 게임플레이에 있어서 얼마나 잘 설계되어 있느냐를 더 중점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죠.
아컴 호러: 카드 게임의 게임플레이 느낌은 굉장히 엘드리치 호러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할 일의 최적화된 방법이 정해져 있다는 점, 가장 효율적이고 안전한 목표 수행을 위해서는 각 플레이어가 특정한 역할이 있는 캐릭터로 플레이해야 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이 중에서 어느 게임에 쓰이든 간에 "플레이어블 캐릭터별로 플레이 방식이 어느 정도 정해져있다"는 특징의 장점은 캐릭터별 플레이 경험이 뚜렷하다는 것이지만, 반대로 게임을 섬세하게 설계하지 않으면 캐릭터별로 플레이해야하는 방식에 종속되어 마치 내가 어떤 캐릭터를 플레이하는 느낌보다는 캐릭터가 나를 플레이하는 느낌이라고 느낄 수 있다는 위험성이 같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아컴 호러->엘드리치 호러->아컴 호러 : 카드 게임으로 넘어오면서는 캐릭터별 특징을 더 뚜렷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아컴 호러 2판에서는 캐릭터별 능력치 상한선이 존재하지만 능력치 자체를 게임 도중에 조절할 수 있도록 해 놓음으로써 캐릭터 운용의 폭을 늘려주었습니다. 엘드리치 호러에서는 캐릭터별로 능력치가 고정되며, 능력치를 강화할 수는 있지만 그 상한선이 조금 작기 때문에 캐릭터 자체를 유연하게 다루기는 더 힘들어졌지만, 전반적으로 게임의 난이도를 더 낮추고 페이스를 더 느리게 하면서 동시에 보스의 기믹화를 강화하고 스테이지 개념을 도입함에 따라 예측 가능성을 더 늘려줘 숨통을 트이게 하여, 캐릭터가 행동할 수 있는 폭을 넓혀 주었습니다. 아컴 호러 : 카드 게임의 캐릭터 능력치는 엘드리치와 같이 고정되며 변할 수 없으며, 특히 이전의 아컴/엘드리치 류 게임에는 없었던, 팩션이라는 개념까지 생겨버려서 사용할 수 있는 카드 풀에 상당한 제약이 생기기 때문에 캐릭터가 내재적으로 가지는 플레이 방향성이 기존보다 더 뚜렷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팩션이라는 개념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고, 캐릭터별 플레이 방식의 특징이 뚜렷하다는 것 자체가 단점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게임이 굉장히 제한적인 선택의 폭을 가지고 있는 데에 반해 자율적인 덱 구성과 플레이라는 LCG라는 게임 형식의 특성을 그대로 가져왔고 이 둘이 충돌한다고 느꼈습니다. 일단 애초에 클리어 방법이 매우 타이트하게 정해져있기도 하고, 이 게임에서 카드를 이용해서 하는 행동이라고 해봐야 이동/조사/전투/회피밖에 없고 이동을 제외한 각각의 행동 또한 그냥 토큰 뽑기와 능력치 비교이기 때문에 LCG가 자랑하는 다양하고 자율적인 덱 구성이라는 장점이 약화되었다고 느껴졌습니다.
게임의 난이도 측면에 대해 이야기해 보면, 체감상으로 아컴 호러 2판의 난이도와 페이스를 가져온 엘드리치 호러 정도의 난이도가 느껴졌는데, 문제는 난이도를 높인 주요한 방법 중 하나가 "다음 상황에 대한 불확정성"을 높인 것이다 보니까 플레이어의 입장에서는 너무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게임이 LCG다 보니까 기본적으로 카드 뽑기의 운이 존재하고 서치&드로우가 강력한 능력이 되는데, 여기서 약점 카드의 존재로 인하여 또 확률적으로 카드를 뽑는 일이 손해가 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장소들은 기본적으로는 어떤 효과를 가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무조건 그 장소로 직접 들어가야 하는데, 플레이어에게 손해가 발생하는 장소 또는 들어갈 의미가 없는 낚시형 장소도 존재합니다. 매 차례마다 진행되는 조우 단계에서는 대부분 뭔가 나쁜 것이 튀어나오는데 무엇이 뽑힐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액트와 아젠다는 필수적으로 진행이 되거나 진행을 시켜야 하지만, 다음 액트와 아젠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이 불가능하죠. 시나리오 기믹에서 확률적 요소가 더 추가되는 시나리오도 존재합니다. 특정 시나리오들의 경우에는 "이걸 첫 플레이에서 깨라고 만든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불합리한 느낌이 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음 상황의 불확정성을 높인 것에 더해서 문제 해결에는 계속해서 토큰 뽑기라는 운이 작용하는데요, 일단 준비가 적절히 되어있지 않을 때 약한 능력치에 대한 체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기도밖에 할 일이 없으며, 능력치 상으로는 실패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아도 중요한 순간에 나온 촉수 토큰 하나에 큰 손해를 보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높은 난이도와 불확정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플레이어가 게임에 끌려다니는 현상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이 게임에서는 엘드리치 호러보다 게임의 캐릭터가 요구하는 덱과 플레이 스타일의 방향성이 매우 명확합니다. 거기에 높은 난이도가 합쳐져 "이 캐릭터의 특징은 이렇고, 잘 하는 일이 이것이니까 내가 이걸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런 행동을 하겠다"라기보다는 "이 행동을 지금 하지 않으면 크게 잘못되게 생겼으니까 이 행동을 해야 하겠다"는 느낌이 더 강해집니다. 거기다 보통 이 게임을 제대로 플레이하면 한 캠페인 내의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으로 진행하게 될 텐데, 중간에 캐릭터를 바꾸기도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발생하는 일종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시스템적으로는 덱의 업그레이드라는 요소를 만들어 놓았고, 시스템 외적으로는 새로운 카드를 발매하는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결국 완전히 새로운 덱이나 새로운 캐릭터로 플레이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이 한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단점은 극복하기가 힘들어 보입니다. 사실 이러한 단점이 단점으로 크게 다가오게 되는 이유는 이 게임이 스토리 중심 게임이기 때문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컴 호러 2판과 같이 문제 해결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는 종류의 게임이라고 느꼈다면 이만큼 크게 단점으로 다가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스토리 중심 게임에서 스토리를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게임에 끌려다닌다는 느낌은 크게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저를 더 실망시켰던 것은 게임 내내 플레이어가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무언가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게임이 선택과 결과가 중요하다는 말을 들어서 많이 실망했었는지는 모르지만..3개의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한번쯤은 플레이어가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나오기를 기대했었는데 너무 아쉬웠습니다. 플레이어는 캠페인을 진행해 나가며 각 시나리오의 시작이나 끝에서 뭔가 선택을 하나씩 하게 되지만 결국 그러한 부분은 플레이어가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선택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게임에서 "A 아니면 B를 골라!"라고 한 후 "골랐니? 너가 A(또는 B)를 골라서 이렇게 됐단다~"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전 시나리오(들)의 성공/실패에 따라서 스토리의 텍스트가 조금씩 바뀌거나 엔딩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이 게임을 하는데 시나리오에서 실패하기로 선택하려 하겠습니까. 이러한 점은 시나리오에서 승리하기 위한 동기를 부여해줄 수는 있지만 여전히 플레이어가 주체적으로 스토리에 개입할 수 있게 하지는 못합니다.
현재 시나리오 내에서 플레이어가 한 행동이 다음 시나리오(들)의 플레이에 영향을 주는 경우도 존재하는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다음 시나리오의 난이도 정도를 조절하는 정도이며 보통 무엇을 하는 것에 따라서 달라지는 보상(또는 페널티)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기가 너무 쉽기 때문에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미는 없습니다. 이외에 시나리오의 클리어 방법을 선택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이후 스토리가 바뀌는 경우들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부분은 의도는 굉장히 좋았으나 촉박한 시간 제한과 더불어 시간이 갈수록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특징과 게임의 높은 난이도, 그리고 시나리오에서 성공해야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는 게임의 특성 때문에 그러한 선택의 순간이 올 때는 대부분의 경우 결국 스토리상으로 고민을 하기보다는 클리어에 적합한 방향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하게 되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결국 스토리에 있어서 플레이어의 의지가 순수하게 반영되는 것만 따져보면 그냥 지문 읽고 선택지 고르는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게임플레이와 스토리가 분리된 것 때문에 이 게임이 LCG임에도 불구하고 안 그래도 떨어지는 리플레이성이 더 떨어져 버립니다. 일단 한번 클리어한 시나리오에서는 시나리오의 진행 과정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어디서 무얼 해야 할지 다 알고 있는 상태라 게임 플레이에서부터 리플레이성이 떨어지며, 다른 스토리 분기가 궁금하다면 그냥 캠페인 가이드만 읽어나가도 스토리에 있어서는 게임을 실제로 플레이한 것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스토리의 진행이 시나리오에서의 승/패에 영향을 받고 캠페인의 길이가 꽤 길기 때문에 성취감 정도야 조금 다를 수는 있겠습니다만..선택지의 양이라도 많았으면 좀 나았을 법도 한데, 그 양 자체부터 매우 적고, 그렇다고 스토리 자체의 품질이 그러한 부분을 완전히 무시할 정도로 엄청나게 뛰어난가 하면 그 정도는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차라리 같거나 더 나쁜 스토리라도, 이 스토리가 진행되는 과정을 게임플레이 안으로 끌고 들어왔으면 훨씬 더 괜찮은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게임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단점을 좀 많이 쓰기는 했지만 그래도 뭔가 많이 있기는 한 게임입니다. 그동안 좋은 LCG들을 만들어왔던 FFG에서 만든 LCG답게, 잔룰은 다수 있지만 게임의 시스템 자체가 망가지거나 플레이하기 싫어질 만한 정도로 질이 떨어지는 시스템은 아닙니다. 스토리의 품질이 엄청난 마스터피스 급으로 높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는 않기에 가볍게 장르 소설을 읽는 느낌으로 스토리를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게임 내의 여러 텍스트들과 함께라면 테마의 몰입도를 많이 도와주는 것 또한 장점이고요. 첫 플레이 때는 상황의 불확정성이 높은 만큼 게임이 루즈하다는 느낌은 몇몇 시나리오를 제외하면 크게 받은 적은 없었고, 카드를 활용한 상황에 대한 연출은 매우 잘 되어있어 시나리오당 첫 플레이 경험은 좋다고 느꼈었습니다. 스토리와 테마성이 결합된 부분에 있어서도 좋은 경험을 했었고요. 사실 리뷰를 쓰다 보니 게임보다는 연출에 집중한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생각은 들지만...게임의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그냥 LCG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도, 아컴/엘드리치 호러형 문제 해결 게임의 관점에서 봤을 때도, 스토리 중심 게임의 관점에서 봤을 때도 문제점이 있고 이들이 어우러진 하나의 게임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도 뭔가 어긋나 있는 너무 아쉬운 게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