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화 잡담 4. 사람이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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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7 09:39

러브레터 프리미엄 에디션의 한글화 작업은 정말 쉬웠습니다.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되더라구요. 카드 장수도 적고, 포토샵으로 지워야 하는 것도 적으니. 체감상으로는 일러스트에 맞는 글꼴 찾는 것에 시간을 더 많이 쓰는 기분입니다. 절대로 그럴 리는 없지만요. :)

특히 영어의 이텔릭체와 한국어의 필기체는 느낌이 많이 다르죠. 고딕체도 묘하게 다른데, 영어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글꼴이 있는 반면 한국어에서는 제한적이다 보니 더 고민되기도 합니다. 사실 별 거 아닌데도, 어떤 글꼴을 아컴 호러 카드게임 하는 데에 넣었으면 어쩐지 호러 테마가 아닌 게임에서는 그 글꼴은 사용하면 안 될 거 같은 기분이 드는 거죠... ㅎㅎ

러브레터 프리미엄 같은 경우에는 카드 효과가 적혀 있는 칸의 글꼴이 일반적인 정체의 글꼴이 아니다 보니 똑같이 글을 많이 적어도 좀 고급스러운 느낌도 살면서 가독성도 해치지 않는 글꼴을 찾느라 시간을 조금 썼네요. 그래도 느낌이 괜찮게 사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싶습니다.

처음에는 Guard를 호위병이라고 번역했는데, 이후에 다른 리뷰 글을 보다가 경비병이라고 적혀 있는 걸 보고 ‘헉 바꿔야겠다’ 하고 바꿨습니다. 그런데, 작업을 다 마치고 나서 문득 보드엠에서 한글판을 팔았던 것이 기억나 보드엠에 들어갔더니, 4번 카드 Handmaid의 번역 용어가 제가 선택한 ‘하녀’가 아닌 ‘시녀’로 되어 있더군요.

사실 처음엔 Countess, Baroness도 백작 부인, 남작 부인이 아니라 여백작, 여남작으로 번역했습니다. 본 용어들이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는데, 굳이 ‘부인’이라고 하는 수동적인 느낌을 주는 수식어를 붙여야 되나 싶었거든요. 왜, 사람을 소개할 때에도 “누구 여자친구” “누구 남자친구”라고 하면 그 사람을 그 사람 자체로 보지 않는 것 같아서 그런 말을 피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룰북에 있는 캐릭터 설명을 보니, Baroness가 Baron의 부인이라는 점이 너무나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벌써 두 개째 단어를 바꾸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건 안 바꿀 수가 없잖아요. 원래 설정이 그런데.

그러다 보니 “에라, 하녀나 시녀나~”라면서 그냥 작업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쯤 되면 인간적인 귀차니즘인 셈이죠. 후...

지난 번에 한글화 잡담 3에서 너무 많은 분들이 수고했다, 고맙다고 댓글을 써 주셨어요. 정말 감사하구요, 이제부턴 한글화 잡담 글에는 그런 말씀들도 좋지만, 그보다는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 나누면 좋겠어요. ㅎ 이게 배가 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만...

한글화 잡담을 쓰는 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돌 맞을 짓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합니다. 되게 자랑질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 이거 했어요! 봐주세요!” 뭐 이런 느낌이랄까요? 사실 그런 의도는 전혀 아니라서 말입니다. 이미 한글화 자료 글에 붙은 댓글만으로도 뿌듯함은 넘쳐요. ㅎ

이를 테면 이런 이야기는 어디 가서 할 데도 없어요. 보드게임 안 하는 주변 사람들은, 제가 이거 붙잡고 하루에 서너 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거 자체를 이해하지도 못해요. 그리고 비하인드 스토리는 DVD에 있는 촬영 뒷이야기 보는 듯한 잔재미를 줄 수도 있겠다 하는 마음도 있고요.

결정적으로는, 한글화 작업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어요. 자료실에 자료만 올려놓으면 그냥 거리가 생기는 느낌입니다. 저 혼자만 좀 동떨어지는 느낌? 저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만나는 걸 좋아하는데,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 게 씁쓸하거든요. 이게 ‘한글화 자료 만들어 주는 사람’ 정도로 머무르게 되면, 나중에 어떤 논란이 생겼을 때 “한글화 자료로 협박한다”는 말이나, “이럴 거면 왜 공개했냐”라는 말을 또 보고 듣게 될 거 같아서 그래요. 그런 말을 보거나 들을 때면, 한글화 자료 만드는 사람이 자판기구나, 라고 생각하게 돼요. 그냥 애초에 안 올리는 게 맞았었나, 싶기도 하고...

요즘에는 룰북은 그냥 텍스트로만 번역하고 공개합니다. 초기에는 룰북까지 이미지작업을 하려고 했었는데, 그럴 시간 아껴서 내 다른 게임의 구성물 한글화를 해야겠다 싶거든요. 룰북 이미지 작업하시는 분들은 정말 존경스럽고 대단한 분들입니다. 저는 이미 한글화 할 것들 게임별 폴더 개수가 한글화 완료한 게임별 폴더 개수랑 똑같아요;;; ㅎ

그래서 사실 저는 제가 플레이할 게임만 한글화를 합니다. 가끔 게시글 중에서 한글화를 해달라는 글들이 올라오는 걸 보곤 하는데, 아우 여력이 없어요. 이번에 러브레터 프리미엄이야 제가 작업을 다 끝내 놓고 직접 한글화하면서 검수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문의글이 올라왔기에 다행이 짜잔~하고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한글화 작업 요청글에 답해서 만들어주시는 분은 진짜 대단한 분들이에요~~

그래서, 이 작업이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걸 이야기하는 것이, 이 잡담의 목적입니다, 네. 아마 앞으로도 한글화 작업을 하면 어떤 이야기든 하나씩 하나씩 올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사람이 하는 일이니 늦기도 하고, 하다 보면 멈추기도 하고, 좀 어설프기도 하고, 대충 할 때도 있고 그런 거잖아요.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할 말이 다 떨어지면 뭐, 그때는 그냥 한글화 자료만 올리겠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