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그 시건방진 놈들에게 되갚아줄 때가 왔다 - 던전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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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4 23:14

0. Dungeon Lords
우리들의 따뜻한 집. 그곳엔 풍족하진 않지만 배를 곯지 않기엔 충분한 음식들과 단란한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결코 깨끗하다고 할 수는 없다해도 누가 뭐래도 따뜻하고 포근한 침대도 있었고, 매일매일 화목한 웃음들이 끊이지 않았죠.
.....바로 그 악몽같은 녀석들에게 유린당하기 전까진 말이죠.

그 잔인한 놈들은 우리가 다가올 추울 겨울을 나기위해 없어서는 안될 음식들을 모두 털어갔고, 우리의 가족들을 사정없이 베고 찔러댔습니다.
녀석들은 우리가 피땀흘려 모아놓은 재산을 비열한 웃음을 띤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가버렸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부모님들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어린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웃음소리 대신 집을 가득 채웠으며,우리에게는 더이상 꿈도 희망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더이상은 당하고 살 수만은 없습니다. 바로 당신이 와주었으니까요.

우리는 우리를 철저하게 짓밟고 유린한 그놈들에게 우리의 의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지도 아래 단결해 따뜻했던 우리의 옛 시절과 우리의 존엄성을 되찾을 것입니다.
바로, 지긋지긋한 용사놈들을 해치움으로서 말이죠!!!!!!!

오늘 소개할 게임은 블라다 크바틸의 본격 던전 매니지먼트 게임, 던전로드입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시건방진 그놈들을 족치러 갑시다.

1. 어떤 게임인가?
흔히들 던전 게임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을겁니다.
플레이어는 용사가 되고, 던전을 탐험해 보물, 때로는 공주 등등을 꺼내어오고,
그런 플레이어들의 앞에 마왕의 졸개들이 나서고, 용사들은 모든 역경을 딛고 마왕을 처치하여 영웅이 된다.
크아아. 이 얼마나 뻔한 클리셰입니까? 던전로드는 이런 클리셰를 그대로 뒤집어버립니다.

플레이어는 던전로드가 되어 자신들의 던전을 경영하게 됩니다. 일꾼이 될 임프들을 고용하고, 던전을 확장하며
때로는 금을 캐기도 하고, 때로는 마을에 가서 식량을 사오기도 하고, 몬스터들을 고용하기도 하지요.
던전 곳곳에 함정을 설치하기도 하는 한편 마을에 가서 학원을 다니며 최신 트렌드를 배우기도 하고, 심지어 불법 조폐소를 짓기도 합니다.
이 모든것은 바로, 용사놈들을 응징하기 위해서지요.

▲금을 캐서 임프들 월급주랴, 몬스터들 뒷담화 안하게 월급 꼬박꼬박 챙겨주랴, 던전로드의 허리는 오늘도 휘어만 갑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겨울-봄-여름-가을까지 4계절에 거쳐 1년간 던전을 관리하고, 가을이 지나면 용사놈들이 여러분들이 정성스럽게 가꾼 던전에 쳐들어옵니다.
그리고 이 습격에서 여러분들의 소중한 피고용인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머리를 싸매서 용사놈들이 들어올 길에 함정을 파고, 몬스터를 매복시켜
그들에게 잠자는 마왕의 콧털을 건드리면 아주 개박살난다는걸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요. 아주 X되는거죠....라고 첫 용사들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다들 저렇게들 생각합니다.

2. 게임의 규칙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일꾼놓기를 베이스로 하는 전략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8장의 행동 카드가 있습니다. (레포갤의 느낌을 떠올려보세요) 이 여덟장의 행동카드중 세 장의 카드를 행동세팅칸 세 칸에 각각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다함께 첫 칸의 카드를 오픈해서 선부터 해당 행동 칸에 일꾼을 놓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카드를 뒤집고, 세번째 카드를 뒤집어서 반복하죠.
이렇게 모든 카드를 오픈 후 첫 번째 액션 칸 부터 규칙에 따라 순서대로 일꾼을 처리 합니다.

▲액션마다 세개의 칸이 있는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네명이 플레이중이죠.... 이쯤되면 무슨뜻인지 아시겠죠?

재미있는 부분은 각각의 행동은 최대 세 명의 일꾼만 일을 할 수 있으며, 몇 번 째로 들어가냐에 따라 액션의 효율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입니다.
예를들어 내가 이번 라운드에 음식이 꼭 필요한 상황이라고 해보죠. 음식칸은 들어가는 순서대로 2음식, -1원 / 3음식, +1악평/ 3음식, +1원, +2악평 이렇게 세 칸입니다.
음식 마련 카드를 놓는것은 너무나 당연하겠죠. 중요한건 몇번째에 들어가도록 조절해야 하느냐일겁니다.

만약 최소 3음식이 필요하다면 첫 번째 액션 카드로 음식을 놓는것은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게다가 제가 초반 턴이라면요.
다른 누군가 음식 카드를 먼저 오픈해주지 않는 한, 나는 첫 음식주자가 될 것이며 그럼 2개밖에 얻을 수가 없을테니까요.
그렇다고 마지막에 놓기에도 영 뒤통수가 쌔합니다. 악평은 둘째치더라도 마지막칸에 놓고 배불리려다가 앞선 플레이어들이 모두 음식칸에 들어가버리는 순간...(잠시 묵념합시다.)

▲돈이 1골드밖에 없는데 간발의 차이로 두번째 함정칸을 빼앗기면 피눈물이 흐릅니다.

물론 이러한 플레이가 전적으로 운에 의존하지 않고, 리스크를 지게 하기 위해 세 카드중 뒤쪽에 놓은 두 카드는 순환구역에 들어가 다음턴에나 되어야 손에 들어오는 등
최소한의 수읽기 개념 + 플랜을 세우기 위한 베이스는 마련되어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줄타기 하는게 재밌더라고요.

▲이 모든것은 용사를 주님곁으로 보내기 위한 밑작업일뿐.

이렇게 계절이 지나면 던전로드의 꽃, 용사들의 침략단계가 시작됩니다.
용사들의 침략단계는 총 4라운드의 전투로 이어지며 각 라운드마다 선부터 차례대로 던전에 들어오는 용사를 막기위한 세팅을 해야하죠.
싸울 장소를 정하고, 용사에 맞는 몬스터를 배치하고, 함정을 파서 최소한의 피해로 용사들을 저지해야 합니다.
그 와중에 비공개 정보인 <그 해 유행하는 마법> 때문에 플레이어들의 플랜이 무너지기도, 성기사의 난입으로 개판이 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과정이 매우 재밌습니다. 잘 만들어진 퍼즐을 푸는 기분이에요.
내 던전이 펑펑 터져나가는 동안 슬라임 몇마리로 용사들의 발을 묶는 상대 플레이어를 보면 던전과 함께 복장도 터져나갑니다.

그리고 용사들의 노략질이 끝나면 다시 폐허가 된 던전을 수습하고, 이듬해에 쳐들어올 용사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이렇게 2년차 침략단계도 마치면 게임이 종료됩니다.

3. 게임의 특징

스테판 펠트가 룰을 만들고 테마를 씌우는 디자이너의 대표라면, 이 게임의 작가인 블라다 크바틸은 테마를 만들고 룰을 씌우는 작가의 대표입니다.
후자의 경우 테마와 시스템사이의 연관성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당연하죠. 어떤 개념을 떠올렸으면 이걸 게임에 구현하는 식으로 게임을 다듬어가거든요.

예를들어, 던전로드의 전투페이즈때, 복도에서 싸운다면 함정 하나와 몬스터 하나만 배치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죠. 길이 좁으니까요.
하지만 고스트라면 더 배치할 수 있습니다. 하긴 그럴수밖에요 고스트라는건 유체라서 부피를 차지하지 않으니까요.
더불어 방에서 싸운다면 함정 하나와 몬스터 두마리까지 배치 가능합니다. 공간이 넓거든요.
하지만 복도와 달리 방은 공간이 2차원적이기 때문에, 모험가가 함정을 밟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함정 위에 모험가 유인용 1골드를 올려두어야 합니다. 인간놈들의 욕망이란...

위에서 언급했던 음식 조달 칸의 경우 차례로 2음식, -1원 / 3음식, +1악평/ 3음식, +1원, +2악평 을 얻게됩니다.
맨 처음으로 방문하는 던전로드는 1골드를 내고 음식 두개를 사가지요.
두번째로 방문하는 던전로드는 음식을 사려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이미 첫 던전로드에게 음식을 팔아 음식이 부족하게 되어 팔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 번쨰로 방문하는 던전로드는 마을사람들을 윽박질러서 3음식을 가져가지만 악평이 쌓이지요.
마지막으로 방문하는 던전로드 역시 윽박질러서 3음식과 1악평을 쌓아갑니다. 아? +1원과 추가 1악평은 뭐냐고요? 3음식을 빼앗아갈때 첫 던전로드가 두고 간 1원까지 같이 빼앗아갔거든요.

이런식으로 룰과 테마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결고리가 꽤나 유쾌하게 그려져 있기에 룰 설명이 지루하지 않은 편입니다.
따라서 게임 감각 또한 밝고 경쾌한 감각으로 진행됩니다. 하는 내내 던전패밀리들의 좌충우돌 시트콤을 보는 기분이에요.
솔직히 저는 전략게임하면서 지는걸 굉장히 싫어하는 성격인데, 던전로드는 지더라도 항상 재미있게 플레이를 할 수 있더라고요.

▲세팅부터 보면 그다지 가벼운 게임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는 한편 던전습격 파트에서는 추상전략의 느낌을 줍니다. 밀려오는 용사들을 한정된 리소스 내에서 최소한의 피해로 처리해야 한다는 부분은 꽤 큰 압박으로 다가옵니다.
용사들 역시 클래스마다 고유의 특성이 있어서 악평관리에 조금만 소홀하면 뜻하지 않은 클래스가 쳐들어오고, 그러면 겨우 세워놓은 계획이 물거품이 되기도 하거든요.
따라서 습격파트에서 용사들을 처리할 수단에 맞춰 경영파트를 운영해가며, 변수를 줄이고 최초 플랜대로 용사를 처리하는 과정은 나름의 무게감이 있게 진행됩니다.
최종 점수계산에서 몇몇 부문의 순위에 따라 추가승점을 주는 부분 역시, 운영의 큰 줄기를 만들면서 다른 던전로드들과 경쟁을 하게 함으로서 겹치는 전략, 겹치지 않는 전략 모두 의미가 있도록 해두는 등,
가볍고 유쾌한 테마의 게임이지만 전략성 또한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부분이 좋았습니다.

반면에 테마를 만들고 룰을 씌우는 게임들이 으레 그러하듯, 이 게임 역시 잔룰이 꽤 많습니다. 이 작가가 유난히 심한 편이기도 하고요.
몬스터만 하도 등장하는 모든 몬스터가 다 특징이 달라서, 나올때마다 하나하나 다 설명을 해주어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아이콘 구성같은 개념이 없어요.

룰 설명 하는 사람이 요령있게 설명을 한다면 듣는 부담이 덜하긴 한데, 룰북 자체도 꽤 복잡하게(하지만 재미있습니다) 구성되어있고,
게임도 경영/습격파트로 이루어져있다보니 룰의 양 자체는 사실 적은 편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으면 많았죠.

더불어 4인 기본으로 인원이 빠질때마다 더미 플레이어가 대신 들어가서라도 4인을 맞추도록 구성되어있습니다. 즉 4인일때가 가장 재밌다는것도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게임 규칙상 4인이 돌려도 다운타임이 길어진다거나 하는 부분은 잘 없지만 그렇다 해도 더미플레이어가 끼는순간 뭐랄까, 조금 맥빠지는 부분이 없잖아 있습니다.
보통 이런류의 게임은 인원수가 적어지면 선택 가능한 행동칸을 줄인다거나 하는 식으로 밸런싱을 하는데, 억지로 더미플레이어를 끼운다는 개념은 그다지 달갑진 않더군요.

어찌되었든 0.5인분 가량의 플레이영역을 확보해야 하기도 하고요.

4. 마치며
워낙에 테마성 강한 게임을 좋아하는 저에게 이 게임은 가히 맞춤형 정장같은 느낌을 줍니다. 더불어 게임 분위기가 밝고 유쾌하며, 룰도 재밌다보니 룰 설명만 해도 즐거운 편이에요.
쉽게 보기 힘든 테마, 괜찮은 전략성, 남들 터지는걸 보면서 즐기는 파티성까지 어느것 하나 빠질 게 없는 팔방미인, 던전로드였습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