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ālanā Agroplex, 도심에서의 농업
안녕하세요, 베크렐입니다.
열심히 카드게임을 하다가 눈에 띄는 카드가 있어 썰을 풀어보려고 합니다.
이전에 어떤 후진 글에서 밝혔던 바와 같이, 저는 농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입니다. 이번 글에서도 농업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앞서 농학을 전공한다고 말씀드렸지만, 제 정확한 세부 전공은 원예학입니다. 원예라는 단어를 들은 독자분들은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갈 것입니다.
네, 주로 꽃이나 꽃꽂이 등의 화려한 꽃과 관련된 이미지들이나, 아름다운 정원 가꾸기(가드닝) 등의 이미지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예학에서는 이런 꽃과 정원 등도 물론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원예학에서 다루는 식물을 살펴보면 식용을 목적으로 하는 다양한 채소와 과일들이 좀 더 많습니다.
어째서 원예학에서 꽃 뿐만 아니라 채소와 과일도 다루는 것일까요? 간단하게 어원을 살펴볼까 합니다.
원예(園藝)는 동산 원(園)과 재주 예(藝)자를 붙여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동산 원(園)은 공원이나 정원, 학원 등의 단어에서 쓰이는 글자입니다. 그 뜻은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널리 알려져 있으며, 울타리가 쳐진 땅을 의미합니다.
재주 예(藝)는 예술이나 예능 등의 단어에서 쓰이는 글자입니다. 위키의 설명을 참고하면, 갑골문에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아 양손에 풀이나 나무를 들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합니다. 즉, 원래 이 글자의 의미는 ‘식물을 심고 가꾼다’ 입니다.
물론 이것은 영어의 어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원예(Horticulture)는 Horti- 와 culture를 이어 붙여 만든 단어입니다.
Horti-는 라틴어 hortus에서 기원하였으며, 울타리가 쳐진 땅을 의미합니다.
culture는 라틴어 cultra에서 기원하였으며, 식물을 심고 가꾸는 농업 활동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원예는 ‘울타리를 치고 식물을 기르는’ 행위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왜 울타리를 쳐야만 했을까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기르는 식물이 비싼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훔쳐가는 것을 막으려 했거나, 울타리를 쳐 두지 않으면 동물들이 와서 식물을 뜯어먹거나 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외부의 여러 위협으로부터 식물을 보호하려는 농업의 방식을 원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꽃 뿐만 아니라 채소나 과일 등 중요하고 비싼 식물들을 기르는 행위를 원예 행위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원예학은 점차 발달하며 식물을 더욱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 결과 나타난 원예학의 세부 학문이 바로 시설원예(Protected Horticulture)입니다. 울타리를 쳐서 식물을 보호하던 것을 뛰어넘어 작정하고 시설(건물)을 지어 식물을 능동적으로 보호하겠다(Protected)는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이런 목적으로 지어진 시설 중 대표적인 것이 온실(Greenhouse) 입니다. 한 겨울에 식물원에 가서 덥고 습한 공기 사이를 헤치고 다양한 식물들을 보신 적 있을 것입니다. 온실이 식물원의 상징처럼 된 것은 역시 그 안에 있는 식물들을 벌판에 심어 두었다면, 우리나라의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생지를 벗어난 다양한 식물을 기르기 위해서는 그 식물에게 위험한 환경(예: 겨울의 추위)으로부터 식물을 보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서론이 길어졌는데, 여기서 제가 게임을 하다가 만난 카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안드로이드 넷러너에 등장하는 팔라나 식품(Pālanā Foods)과 팔라나 아그로플렉스(Pālanā Agroplex) 카드입니다.
팔라나 식품은 근미래의 인도를 배경으로 하는 뭄바드 사이클에서 두 번째 팩인 사업 우선에 등장한 진테키의 ID 카드이고, 팔라나 아그로플렉스는 같은 팩에서 등장한 진테키의 자산 카드입니다.
넷러너가 놀라운 게임인 이유는 단순히 재미있기 때문이 아니라, 간혹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확하게 미래에 현실이 될 기술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팔라나 식품과 팔라나 아그로플렉스 카드는 이런 점에서 제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카드입니다.
팔라나(Pālanā)는 인도이란 어파에 속하는 마라타어(Marathi) 단어로, 불교적인 어원을 가진 Pali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팔라나(Pālanā)의 의미는 보호하다(protection과 guarding, keeping 등) 입니다. 현대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어린 아이의 요람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 같습니다. 역시나 내부의 무언가를 보호한다는 의미는 일맥상통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식물을 보호하면서 기르는 회사의 이름으로 이보다 적절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카드의 일러스트를 살펴보면, 팔라나 식품의 건물과 팔라나 아그로플렉스의 건물은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잘 쓰이는 카드는 아니지만, 넷러너 드래프트 팩 중 하나인 Hardwired 팩에서 등장한 드래프트 전용 진테키 ID 카드인 Synthetic Systems 카드에서도 유사한 건물의 형태가 나타납니다.
도심에 위치한 고층의 빌딩, 그리고 그 내부에서 식물을 재배하는 광경은 지난 번 제가 작성했던 테라포밍 마스 관련 글에서 한 번 접하신 적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건물 내에서 다양한 식물을 기르겠다는 개념을 수직 농장(Vertical Farm)이라고 부릅니다. 수직 농장의 개념은 1909년 라이프 매거진(Life Magazine)에 Rem Koolhaas가 제안한 것이 최초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컬럼비아 대학교의 생태학 교수인 Dickson Despommier가 1999년에 마천루에서 식물을 기르는 방법에 대해 체계화를 시작하였고, 그가 2010년에 발간한 책 Vertical Farm을 통해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약 30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에서 생산하는 식물로 50,000여명에 달하는 인원을 먹일 수 있다고 합니다.
수직 농장은 기상 변화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식물을 기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식물을 보호하여 외부 환경과는 별개로 길러낼 수 있다는 점이 시설을 이용한 농업의 큰 장점입니다. 또한 인구가 많은 도시 내에서 식량을 생산하기 때문에 신선한 상태로 식물을 공급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수직 농장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기술이 필요합니다. 건물 안에 식물을 기르기 위한 흙을 채우는 것은 건물의 내구성에도 문제를 일으킬 뿐 아니라 병충해 등에 취약해지므로 수경재배 방식으로 식물을 기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또한 넓은 들판에 비해 좁은 공간에서 효율적으로 다량의 식물을 기르기 위해서는 공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할 것입니다. 여러 일러스트에서 나타났듯이 식물이 광합성을 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기 때문에 식물에게 필요한 충분한 양의 빛을 공급하는 방식도 연구를 통해 알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수직 농장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할 다양한 문제점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도시 내에서 인구가 먹을 식물을 기르는 가장 큰 이유는 운송 거리를 줄이기 위함입니다. 식재료로 사용되는 식물을 재배하는 곳과 실제로 소비되는 도시가 멀리 떨어져 있다면 운송에 연료비 등 여러 비용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용을 절감하는 양 보다 수직 농장을 건설하는 데 드는 비용이 더 크다는 문제는 결국 경제성이 없다는 지적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식물을 재배하면서 모자라는 태양 빛을 보충하고자 전구나 LED 등을 사용한다면, 전기를 생산하는 데 비용과 부수적인 환경 오염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또한 식물이 자라면서 광합성을 하는데 필요한 재료인 이산화탄소를 공급하는 것은 요즘에는 널리 사용되는 기술입니다. 그러나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인 400 ppm보다 더 높은 농도로 공급하면 오히려 대기중으로 이산화탄소가 빠져나가 온실효과를 일으킬 위험도 존재합니다.
도심에서의 농업은 현재 소규모의 인원들이 취미를 목적으로 하거나 정서적인 안정 등을 목적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테키’와 같은 대기업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도심에서의 농업은 도심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식품을 제공하는 사업이 됩니다. 이러한 사업은 그 규모가 클수록 이익을 많이 발생시키고, 집약적인 생산 방식과 고도화된 농업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팔라나 아그로플렉스 카드의 플레이버 텍스트를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건설 비용은 극도로 비싸지만, 전통적인 농사법에 비해 매우 효율적인 아그로플렉스는 식량 산업의 필연적인 기업화의 상징입니다(Expensive to build but dramatically more efficient than traditional farming, agroplexes are emblems of the inevitable corporatization of the food industry).”
넷러너에 등장하는 기업들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여줍니다. 게임의 배경이 되는 안드로이드 세계관은 꿈도 희망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이버펑크 세계관입니다. 인간의 생활에 필수적인 건설업(웨이랜드 컨소시엄)이나 미디어(NBN), 노동력(하스-바이오로이드)등을 장악하는 다른 거대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진테키가 식량 산업을 장악하려 한다는 설정이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제 생각에는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실제로 아그로플렉스가 도심에 세워질 것 같습니다. 싱싱하고 값싼 식품을 공급하여 도시민들을 먹일 수 있는 첨단 기술의 집약체가 될 것인지, 거대 기업의 사익을 위한 도구로써 작동할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쓸데없이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