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그타운> 맨땅에 들이박는 제정신 아닌 개발기록 (상당히 감상적인 일기장 같은 제작기)
딱 맞는 게임을 만드는 회사 스위트게임즈 Suite Games
의 대표 손영익이라고 합니다.
뭐 말이 대표지 1인 기업이라 대표면서 사원이고 뭐 그래요...아무튼...
이번 글 이후로는 이름을 말씀 드릴 일이 없을 것 같아 처음으로 한번 이야기 해봅니다.
오늘 보드라이프에 게임을 등록하고, 보드게임긱에 게임 등록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면서 문득
맨땅에 헤딩했던 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예... 맨땅에 헤딩이요.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말이죠...
지금부터 스위트게임즈의 첫 게임 "디그타운"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프롤로그
스위트게임즈를 설립한건 올해 8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디그타운은 그보다 훨씬 앞선 올 연초부터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죠.
어쩌다 이런 게임을 만들게 되었냐면, 2021년 연말에 좀비 생존 장르의 보드게임을 하나 만들어봤습니다.
PC게임인 프로젝트 좀보이드에서 영감을 받아 생존, 파밍, 미션을 섞어 넣어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건 나중에 더 자세한 썰을 풀도록 할께요.
아무튼 만들다 보니 한가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무기와 캐릭터의 밸런스 잡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죠.
공격력 1을 올리냐, 공격횟수 1을 올리냐의 차이가 엄청 크죠.
플레이타임이 1시간을 넘어가다보니 밸런스 잡기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무기에 방어구에 캐릭터 체력도 신경써야 하고 소모성 아이템들의 효과까지...머리 깨질 것 같더라구요.
아무튼 그런 고민에 빠져있는 동안 잠시 머리를 환기 시킬겸 딴 생각을 했습니다.
전략 90에 운 10 짜리 게임을 만들다 보니
"그냥 운 100짜리 게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이르게 되었죠.
그래서 "주사위를 던져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레이싱 게임"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육각형
개인적으로는 육각형이라는 도형을 가장 좋아합니다. 정육각형은 평면에 놓았을 때 정말 안정적으로 필드를 채울 수 있고
정삼각형의 칸 진행은 너무 빠르고
정사각형은 대각선 규칙을 정하기가 힘든 반면
육각형은 모든 방향에 대해 균일한 듯한 느낌이 가장 좋았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비율 배치를 위해 참 많은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육각형 타일을 사용하는 게임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수준이죠.
어쨌든 새로운 게임은 육각 타일 위에서 움직이고, 모든 움직임은 육면체 주사위로 결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첫번째 버전의 모습입니다.
제작 과정은 사진을 찍지 않아서 플레이 하는 영상만 남았네요.
하드보드지에 라벨지 인쇄 후 붙인 다음, 투명 필름을 한 겹 덧씌워서 손에 묻어나지 않도록 처리했습니다.
이미 첫번째 설계 과정에서 기본적인 플레이 구조는 거의 다 짜여 있었어요.
1. 주사위를 던져서 플레이어 주변의 타일을 제거한다.
2. 빈 타일이 생겨야 주사위 눈 만큼 이동할 수 있다.
3. 직선방향에는 장애물 타일이 있어서 길이 뚫려도 한방에 중앙(=보물)까지 갈 수 없다.
4. 다른 플레이어와 만나면 주사위로 싸워 상대방의 보물을 뺏을 수 있다.
5. 진 사람은 자신의 출입구로 리턴.
6. 보석을 가지고 가장 먼저 탈출하면 승리
이런 간단한 규칙이었습니다.
나름 모듈형 구조를 차용해 부피를 줄여보려고 생각했는데... 실제 제품화 과정에서 포기할 수 밖에 없었죠.
일반인 대상 테스트는 의외로 많이 뜨거웠습니다.
좋은 의미로요.
아무래도 가까운 지인들을 모아놓고 하다 보니 1:1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트롤러도 나오고, 의도적으로 괴롭히는 플레이도 발생합니다.
자연스러운 고성과 욕설과...뭐 그랬습니다.
가까운 사람과 하기에 참 좋은 게임이라는 느낌이 팍 들었죠.
더 좋았던 것은 원래 이 게임의 주 목표였던 "쉽게 배우고 빠르게 플레이 하고 금방 끝나는 게임"
이 목표 그대로 달성되었던 것입니다.
함께 플레이 하는 멤버들의 구성이 참 독특한데요.
게임이라는 것을 잘 이해 못하는 분, 룰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분,
순식간에 게임 규칙을 파악하는 타입과 일단 한 명 마음에 드는 사람을 미친듯이 공격만 하는 타입 등등
어찌 보면 온라인 게임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한번에 다 모이더라구요.
덕분에 디그타운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올 여름이 오기 전 까지 대부분의 규칙을 완성한 채 저는 본업을 하면서 시간이 흐르고 있었죠.
#첫번째 인연
원래 본업은 영상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만난 분이 계신데요. 기업용 보드게임을 전문적으로 만드시는 분이 영상 의뢰를 자주 해주셨었습니다.
외주 작업으로 만나기 전 부터 이미 잘 아는 분이었는데 보드게임 만들기 시작하면서 생각나서 연락을 드렸죠.
그리고 그 동안 만들고 있던 세개의 게임을 검사 받으러 다녀왔습니다.
디그타운과 좀비게임 외에도 고속도로 운전과 관련한 게임을 하나 더 만들어뒀었습니다.
고속도로 게임은 완전 대차게 까여버렸죠. 게임성도 교육적 의미도 없는 이도저도 아닌 게임이라는 소리를 듣고 빠르게 포기.
좀비게임과 디그타운 둘 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되어 2023년 초에 출시를 서서히 계획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변에서는 보드게임 만든다는 소문이 서서히 퍼지기 시작한게 이 평가 이후 시기였습니다.
#두번째 인연, 그리고 마음대로 안되는 우연들
그 동안 궁금해하던 많은 분들에게 디그타운 정도는 보여드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저기 들고 다니기 시작한 시점이 올 여름 직전이네요.
그러다 함께 플레이 하던 지인이 문득
"회사에서 새로운 투자 아이템을 찾던데, 보드게임을 가지고 가보면 어떠냐" 는 질문을 합니다.
당연히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죠.
신생 회사의 첫 보드게임에 투자를 할 그런 분이 어디 있나요....?
그런데 만났습니다.
갑작스럽게 사업 계획 프리젠테이션 일정이 잡혀버렸고, 며칠을 밤새가며
태어나 처음으로 크게 긴장한 채 시간이 흘렀습니다.
감사하게도 게임이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와 함께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을 듣고서 긴장이 풀려 귀가 하자마자 쓰러져 잠들어 버렸습니다.
실은 프리젠테이션 하면서 마음이 참 그랬던게...
접대게임... 아시죠?
거 왜 게임 하다보면 져드려야 할 때가 있는거고 그렇잖아요?
와...근데...이거 주사위 운빨 게임이다보니...
제 마음도 몰라주고 투자사 대표님은 계속 진출 못하시고...
게임하면서 이기고 있는데 식은땀 줄줄 흐르는 그 기분 아시나요?
와 이걸 이기면 안되는데...아...재미있다고 느끼시려면 역전하시거나 해야하는데...야속하게도 1등 해버렸네요..
그래서 참 피말리는 경험 했었습니다.
몇가지 이야기는 건너뛰고
그렇게 투자를 받으면서 제 건방짐이 하늘을 찔렀나 봅니다.
#과대평가
게임 규칙 자체가 쉽고 타겟 유저 연령층이 넓다보니
"윷놀이 처럼" 가족들 모이면 꼭 하는 게임이라는 뭐랄까 망상회로 10000% 가동하는 꿈을 꿨습니다.
그리고 무참히 부서졌죠.
"아이콘 없이, 텍스트 없이, 디자인 호불호 안갈리게" 라는 생각으로
기존의 디자인을 뒤집어 엎고 새로운 버전을 준비 했습니다.
잡기 쉬우라고 모서리를 파보기도 하고
디자인을 최소화 하면 글로벌하게 먹힐 것 같다는 생각에 구멍을 숭숭 뚫은 버전도 만들어봅니다.
Theme Less 한 게임이 되어버린 것을 뒤늦게 깨달았죠
어디서 배운 객기인지 모르지만 보드게임 유튜버 두분께 이미지와 메뉴얼을 보내드린 후
아주 대차게 까이고 혼나고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처음 메일 받아보시고 나서 어이없으셨을 두 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감사 인사 드립니다.
허락 받지 않고 언급하긴 좀 그래서 누구신지는 말씀 안드리고... 아마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 두분 맞을겁니다.
#새로운 인연
그 이후 본격적으로 테마 작업을 서둘러 진행합니다.
그 과정에서 정말 귀한 인연들을 많이 만났는데요.
패키지와 디자인을 총괄해줄 현업 디자이너 한분과 더불어
디그타운의 아트웍을 담당해주실 화가분을 만나서 디자인 업그레이드를 합니다.
허락 받지 않았지만 몰래 자랑 좀 하자면
저희 아트웍 작가님은 게임 디자인도 하시면서 전시회도 준비 하셨더라구요
http://hhart.co.kr/31/?bmode=view&idx=13314986&back_url=&t=board&page=
열정 진짜 엄청난 분이십니다.
초기와 비교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엄청난 퀄리티 상승이!!
아트웍은 다시 봐도 정말 마음에 들게 잘 나왔었습니다.
물론 서로 조율하고 작업하느라 각자 울며불며 밤새며 일했는데
그 덕에 보람있는 결과물이 나왔죠.
이렇게 디그타운은 광산 테마의 느낌이 제대로 자리잡았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사업이 급격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면, 조언을 구할 생각도 안하고 어중간한 게임을 만들 뻔 했어요.
중간중간 있었던 다양한 인연들과 도움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겁니다.
이야기가 디자인 까지 오는데만 벌써 엄청 긴 장문의 글이 되어버렸네요.
쓸데 없이 횟수만 채우는 연재성 글 작성은 제 스타일이 아니지만, 이번엔 두편 정도로 나눠봐야겠습니다.
이번 편은 감상문 aka "나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편이고
다음편에는 진짜 실행 과정에서 경험한 "보드게임 제작과 함께 얻은 탈모" 편을 준비해 보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