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에서 운은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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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6-17 오전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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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깊은데, 잠은 오지 않고.. 평소 생각해왔던 내용이 있어 남겨봅니다. 정리 없이 써내려가는거라 두서 없어도 양해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많은 보드게임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소위 수작, 명작이라는 놈들이 있죠. 지표 상으로 보면 긱 순위 200위 이내 작품들 정도 될까요?

그 중에서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던 게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몇 개를 꼽아서, "운"에 관해 조금만 말해보고자 합니다.

케일러스는 선 정하기, 시작 건물 배치를 뺀다면 "운"이란게 없는 게임입니다. 건물은 모두 공개되어있죠. 모든 플레이어의 자원, 행동 또한 공개입니다. 아그리콜라처럼 기습적인 설비, 직업도 없을 뿐더러, 워터딥처럼 게임 끝나고 뒤통수 치는 점수 계산도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게임은 명작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에 대해 상당 부분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운을 싫어하며, 전략 게임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케일러스가 정말 "완벽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도 운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케일러스는 밸런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돌 건물이 너무 강력하다는 것이죠. 안 쓰자니 상대가 많은 자원을 챙겨가고, 써도 상대는 자원을 챙겨갑니다. 그래서 케일러스의 양상은 대체로 돌 건물을 나눠먹는다는 전제 하에서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게 마련입니다. 운이 없다는 장점(?)은 게임의 양상을 어느 정도 획일화되는 단점을 낳았습니다.

많고 많은 보드게임 중에, 운의 요소를 배제하는 게임이 케일러스 뿐일까요? 아닙니다. 또 다른 수작이 있죠. 바로 러시안 레일로드. [이하 러시안]

선 정하기, 엔지니어 세팅을 제외하면 운이 없습니다. 점수가 펑펑 나기 때문에 가벼운 게임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러시안은 상당한 수준의 전략을 요구합니다. 기술자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서 전체적 게임 흐름을 좌우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초기 세팅이므로 큰 운은 아니라고 봅니다. 상대방의 진행 상황 또한 공개되어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태클을 걸 수도 있죠. 실제로 한 턴 차이로 삐끗하는 경우도 많구요. 그런 의미에서 러시안은 케일러스 못지 않은 긴장감을 줍니다.

하지만 러시안을 즐겨본 사람들의 평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전략 게임"이라는 평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게임이 눈에 "쉽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케일러스와의 근본적 차이는 바로 "감독관, 집행관"의 존재입니다. 케일러스에서 플레이어는 일꾼을 맘대로 배치할 수 없습니다. 자신보다 먼저 패스를 한 숭악한 플레이어들, 감독관 이동에 말을 둔 음흉한 플레이어의 존재는, 몇 칸 뒤에 놓아야지 안전하게 수행할 수 있는지 골 아프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다 깜빡해서 실수라도 한다면.. 중세 노동자들의 슬픔을 깨닫게 되죠. 일하라고 놓을 땐 언제고, 감독이 없어 일을 할 수 없다니..

이쯤에서 잠깐만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보드게임에서 운은, 정말 배제해야만 하는 요소일까요? 전 그렇지 않다는 예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게임을 들겠습니다. 네, 긱 순위 1위에 빛나는 그 게임, 제가 유일하게 콜렉터즈 에디션을 구입한 그 게임, 황혼의 투쟁이죠. (GMT는 반성해야합니다. 공지도 없이 일정을 차일피일 미루는 놈들..)

이런 말을 하면 많은 분들에게 몰매 맞을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황투는 요즘 말로 운빨 실력게임입니다. 운빨이 따르되, 실력은 작용합니다.

"아니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지?"

하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는데, 찬찬히 생각해보죠. 엄밀히 말해서 황투는 운에 많은 것을 의존합니다. 나오는 카드는 4가지의 용도가 있는데, 카드의 액션을 제외한 나머지 3가지 (쿠데타, 재조정, 우주경쟁)는 주사위에 의존합니다. 카드 자체가 주사위에 의존하는 카드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곰덫, 진창, 전쟁 카드들이죠.

그런 일은 드물지만, 운이 정말 안 따라준다면 패배는 거의 확정이나 다름없습니다. 우주 경쟁 하는 족족 성공하고, 상대방이 건 진창에선 벗어날 수가 없는데다 손에는 점수 카드만 주구장창 들어옵니다. 누가 대응할 수 있을까요? 황투는 카드 운, 주사위 운에 게임의 많은 부분을 넘깁니다. 저 또한 운의 쓴맛을 본 적도 있고, 달콤한 승리를 나꿔챈 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투가 실력 게임인 이유는, 이 게임은 한 판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 판을 한다면, 결국 실력을 따라가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게임 내에서 운을 테스트하는 것이 한 두번이 아니기 아니라, 수십 수백번에 달하기 때문에 오히려 운이 평균으로 수렴하게 되어있습니다. 물론 결정적 타이밍에 터지는 불운/행운은 탄식을 불러일으키죠.

생각해봅시다. 정말 "운"이 배제되어야할 요소였다면, 황투가 불후의 명작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운이란 요소가, 게임을 매끄럽게 흘러가게 하는 윤활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관점을 바꿔볼까요. 황혼의 투쟁에서 서로에게 가는 카드가 고정되어있고, 우주경쟁은 시도 횟수를 체크해서 1번하면 1단계, 2번하면 2단계가 되는 식이며, 쿠데타 및 재조정 등은 무조건 3이 나온다고 생각해봅시다.

전 그런 황투는, 황투가 아니라고 답하겠습니다. 플레이하기도 싫을 것 같고요. 왜냐하면, 황투는 가상의 역사 재현이자,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한번씩 터지는 운은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게임 전체적으로 봤을 때 불확실성을 심어줍니다. 다시 말해, 케일러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긴장감과 실재감을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운을 100% 배제하는 형식으로 게임을 플레이한다면, 황투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양 플레이어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모든 플레이를 진행해나가는 것이죠. 이는 결국 게임 전체의 재미와 리플레이성을 올려주는 효과를 줍니다. 한 판씩 터지는 운빨은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 금방 끝나고 다음 판 할거거든요.

제가 안 좋아하는 게임 중에 하나가 바로 카탄입니다. 제가 협상하는 것에 재주가 없기도 하고, 운 요소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파티 게임이라고 하기에는 길고, 전략 게임이라고 하기에는 운이 너무 크고.. 저하고는 별로 맞지가 않더군요.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게임에서의 운은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플레이어와 시스템으로 싸워야하는 협력 게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전략 게임들은 게임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치는 랜덤 요소들을 제공합니다. 상트에서의 카드 운, 트루아, 버건디 등에서의 주사위, 각종 덱빌딩에서의 카드 배치.. 이런 요소들은 게임에서의 불확실성 (일부에게는 짜증나는 경험이 될 수도 있겠지만.)과 긴장감을 함께 심어줍니다.

결론을 내려보자면, 균형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전략 게임이 과도한 운에 기댄다던가, 파티 게임이 지나칠 정도로 긴 시간과 전략을 필요로 한다던가 하면 자리가 어긋난 셈이니까요. 하지만 전체적인 시각에서 볼 때, 저는 보드게임에 운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운이 "아예" 없는 보드게임이라.. 존재할 수도 없겠지만, 혹 있다 해도 플레이하고 싶진 않군요. 싱글 플레이와 뭐가 다를게 있나 싶습니다.

P.S : 다 쓰고보니 뭔가 황희 정승 같네요. 허허 운도 좋다, 허허 전략도 좋다.. 너무 당연한 말 같기도 하구요.

혹 대단한 결론 기대하신 분들에게는 양해를 바랍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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