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딸 라세르다. 현실은 세줄 요약되지 않는다.

1,126 조회

2024.10.02 17:22

안녕하세요. 하자하니입니다.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팬이 참 많은 보드게임 작가인 비딸 라세르다에 관한 글을 적어보는데요. 제가 비딸 게임을 전부 다 해보진 않았지만 비딸 게임들을 하면서 느꼈던 공통적인 감상을 포착하여 글로 썼습니다. 제 개인의 생각이니 언제나 다른 의견은 항상 환영합니다.

비딸 라세르다(Vital Lacerda) , 포르투갈 태생의 보드게임 작가, 짙은 테마와 복잡성을 가진 보드게임을 만드는 대표주자이다. 보드게임 작가가 아무리 유명하더라도 우리가 작가를 기억할 때 작가의 대표 게임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비딸 라세르다 작가의 게임은 비딸 게임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만이 가지고 있는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작가의 게임을 소개할 때 단순하게 비딸 게임이라고 소개를 하고 이를 소개받는 보드게이머는 간단히 수긍해버리는 상황이 있을 정도로 이 작의 게임은 강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강한 특색 덕분에 비딸 게임이라면 무조건 하고 보는 게이머도 있고 반대로 비딸 게임은 일단 거부하는 게이머도 있는 호불호가 강한 작가로 여겨진다. 이번 시간에는 이런 비딸 게임을 관통하는 여러 특징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비딸의 팬이라면 내가 왜 이 작가의 게임을 좋아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며 비딸을 꺼려하는 사람이라면 왜 내가 꺼려하는지 아는 계기가 될 것이다.

참고) 이 작가의 경우 가벼운 게임도 제작을 하나(geek weight 2.5~) 비딸 게임으로 알려진 경우도 적고 대중들이 흔히 인식하는 비딸 게임은 아니기 때문에 웨이트가 높고 테마성이 강한 비딸 게임에 대한 설명을 할 예정이다.

테마성

보드게임 긱 인터뷰에 따르면 비딸 라세르다는 게임을 만들 때 특정 테마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는 몇 달 동안 테마를 탐구하고 이에 맞는 게임의 메커니즘을 구상하는 방식으로 게임을 제작한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즉 작가에게 테마는 보드게임이 표현하고자 하는 궁극의 존재이자 플레이어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게임을 제작하는 여러 방식이 있으며 많은 경우 메커니즘을 만들고 이에 맞는 테마를 찾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예시로 스테판 펠트의 본파이어가 게임을 만들었는데 이에 맞는 테마가 없어서 직접 테마를 만든 케이스이다. 비딸 라세르다의 경우에는 테마 혹은 주제를 생각하고 이에 대해 면밀히 탐구하고 이 주제가 가지고 있는 구조를 게임으로 탁본하여 게임을 구상한다. 여기서 다른 작가들과의 차별성이 나오게 되는데 라세르다의 경우 굉장히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하는 과정을 최소화하며 현실 혹은 테마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많은 게임들의 경우 테마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 테마가 가지고 있는 특정 부분을 강조하고 복잡한 부분은 덜어내는 작업을 하는데 비딸의 경우 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부분마저 테마의 일부분으로 보고 게임에 활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현실과 잘 대응되는 테마 혹은 현실 속에 숨겨있는 설계도를 이 작가는 가져와서 우리에게 체험시켜주며 우리는 이를 통해 강한 테마성을 느끼게 된다.

작가가 사랑하는 테마.

이런 면밀한 시선의 밑바탕에는 작가 자체의 테마에 대한 강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보드게임긱 인터뷰에서 그는 보드게임 작가 꿈나무들에게 자신이 열광하지 않는 주제 혹은 좋아하지 않는 주제로 게임을 만들지 말라는 충고를 하였다. 그가 게임을 만드는 방식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포르투갈 태생의 작가이다보니 포르투갈과 관련된 테마를 굉장히 많이 사용하였다. 비뉴스의 경우 와인 테마인데 포르투갈 지역의 와인과 관련된 보드게임이며 리스보아의 경우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을 재건하는 테마의 게임으로 작가의 자국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과학에 대한 테마 또한 그가 애정하는 테마인 것을 알 수 있다. CO2(해보진 않았지만), 온마스, 인벤션, 웨더머신 등이 과학과 관련된 테마를 가지고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심도 있게 해석하고 나름의 게임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갖는다.

작가의 대표적인 보드게임 ‘비뉴스’를 예시로 들면 비뉴스는 포르투갈 와인 산업을 테마로 한 보드게임이다. 포도의 수확에서부터 시작하여 와인의 제조, 저장, 수출까지 와인 산업의 전반적인 모습을 보드게임에 투영하였다. 여러 지역의 다양한 떼루아의 포도들, 빈티지에 따른 포도의 퀄리티 등 여러 현실의 요소를 게임의 요소로 녹여냈다. 생산한 와인이 와인 산업에 어떤 식으로 활용되는지 박람회, 수출, 식당 납품을 통해서 표현하였고 대금 납품을 통해 계좌로 들어오는 현금의 유동성까지 게임으로 표현하였다.

<비뉴스는 포르투칼 와인산업의 전반적인 모습을 그렸다.>

/출처 보드라이프

유기성

그가 소개하는 테마가 복잡하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테마의 유기체적 특성을 게임에 담아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체는 부분의 합으로 표현할 수 없는 구성 요소 간의 상호작용, 의존성을 전반적으로 게임에 반영하였다. 따라서 전체를 파악하기 전까지 부분들은 의미 파악이 어려운 영역으로 남아있고 이들을 모두 학습하고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 파악하는 과정을 거쳐야 게임 규칙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완성된다. 정리하자면 총체된 주제 하나가 존재하고 이를 구성하는 다양한 구성요소들이 존재한다. 이 구성 요소들은 서로가 상호 의존적이며 단독으로 의미부여가 힘들다. 많은 여타의 보드게임의 경우 다양한 구성요소가 존재한다면 이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여러가지 일들을 동시에 진행하는 멀티태스킹적 사고가 도입되거나 구성요소를 단순화해서 하나의 구성요소 내에서 모든 것이 이뤄지게 제작하는데 반해 비딸의 게임의 경우 한 행동이 다른 행동에 미치는 여파 등을 고려하여 흐름을 만드는 사고가 반영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비딸의 게임은 포인트 샐러드가 아니라 포인트 용광로(point’s melting pot)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테마적 유기성뿐만 아니라 작가는 의도적으로 플레이에서도 유기성을 체감하도록 게임을 제작한 것으로 느껴진다. 다른 사람 행동에 따라 자신의 행동이 달라지는 킥아웃 액션이나 인벤션에서 도입된 체인 액션들이 이러한 유기성을 잘 보여주는 요소이다. 이러한 유기적인 규칙과 테마는 헤비 게이머들에게 규칙을 배우는 것 자체에 도전의식을 느끼게 하는 점이며 어찌보면 게이머들의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는 희열을 전달해준다.

유기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로는 ‘온 마스’를 들 수 있는데 온 마스의 자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호 의존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물’은 ‘식물’을 생산하는데 필요하고 ‘식물’은 ‘산소’를 생산하며 ‘산소’는 ‘인간’이 정착하는데 필요하며 ‘인간’은 ‘광석’을 채취하며 ‘광석’은 ‘전기’를 생산하는데 사용하며 ‘전기’는 다시 물을 생산하는데 사용한다는 일련의 유기적인 흐름이 존재한다. 이런 유기성은 과학자 보드에서도 강조하였다. 과학자 보드는 과학자를 가져오는 비용, 과학자를 사용하는 곳, 과학자가 최종적으로 얻는 점수가 유기적인 흐름의 체인에 있는 자원들로 각각 이뤄져있다. 예를 들어 수문학자를 가져오기 위해서 물을 만들 수 있는 ‘전기’ 자원이 필요하며 수문학자는 ‘물’과 관련된 건물을 무료로 활성화할 수 있으며 수문학자는 ‘물’로 생산하는 ‘식물’ 관련하는 건물에 대해서 점수를 얻는다. 시스템적으로 작가가 의도적으로 유기성을 강조한 부분이다. 또한 화성과 궤도에서의 액션 또한 연결 되어있는 점이 유기성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온 마스의 여러 자원의 유기적인 흐름은 결국 화성에 균등한 성장을 촉진한다.>

복잡한 규칙

깊은 테마성, 그 속에 내재된 유기체적 특성이 결국 게임의 복잡성을 올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작가는 그것에 대해서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분만으로 전체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과 계속해서 상호작용을 생각하며 룰을 파악하기 위해서 계속 반복적으로 이전 요소를 생각하는 원형(cyclic)적인 구조는 룰을 선형적으로 배치할 수밖에 없는 글 자체의 한계를 느끼게 하고 이것 만으로 룰 공부를 하기는 구조적으로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총체적인 테마를 구현하기 위하여 비딸의 게임은 전략의 단일화가 많이 이루어져 있으며 반대로 다양한 구성요소를 활용하기 때문에 전술의 다양화가 이루어져있다. 하나의 테마성을 위하여 최종적으로 플레이어는 모든 구성요소를 적절히 이용하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때문에 점수는 최종 테마를 얼마나 잘 구현했는가를 표현하는 하나의 지표가 되고 다른 플레이어와의 결국 하는 것이 경로가 어떠하든 비슷하게 된다. 하지만 다양한 구성요소를 활용하고 이들은 모두 연결되었기 때문에 미시적으로는 일련의 흐름은 다른 플레이어마다 다르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즉, 비딸 게임에서 전략의 다양성을 느끼기는 어렵고 이에 따른 높은 리플레이성을 느끼기 어렵다.

결론

지금까지 비딸 라세르다 작가의 게임들의 특징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의 작품은 생명체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하나의 요소라도 없으면 생명체로서 작동할 수 없고 생명체의 부분만 바라봐서는 그 생명체로 바라볼 수 없다. 각 작품은 각각 다른 생명체이고 비딸은 이를 발견한 생물학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인 생각은 그가 만들어둔 완결성 있는 생명체는 그가 게이머가 바라보길 바라는 관점을 고정시켜준다는 느낌이 든다. 한편의 엔딩이 있는 인터렉티브 무비를 본 기분이 든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