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과 테마 : 자유 지하철도 리뷰

쉐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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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5-6 오후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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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부의 노예를 캐나다로 탈출시키는 노력, 자유 지하철도 게임입니다.]

게임에서 테마는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어지간하면 추상전략게임은 오래 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아무리 단순한 추상 전략 게임이라 하더라도, 그 위에 좋은 테마만 올라가면 즐겁게 즐길 수 있고요. 물론 테마 같은 건 제쳐두고 게임성만으로 좋은 게임도 있을 수 있겠지만(러브레터가 한 예겠죠), 테마와 게임 시스템이 잘 조화를 이룰수록 명작으로 꼽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팬데믹’을 처음 했을 때의 느낌이 생생합니다. 그건 가상의 적으로부터 가상의 세계를 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서, 바이러스로 인해 파탄의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해낸다는 비교적 현실적인 테마가 자극하는 정의감의 수준은 알고 보면 단순한(복잡한) 계산 게임에 최대한의 몰입을 이끌어내었습니다. 이후로 ‘플래시 포인트’와 같은 게임에서도 비슷한 사명감이 생겼는데, 그쪽으로 최고의 게임은 제게 있어서는 ‘자유 : 지하철도(Freedom : the Underground Railroad)’입니다.

‘자유 : 지하철도(이하 ’지하철도‘)’는 1790년부터 1870년까지 있었던 미국 남부 노예해방 운동입니다. 게임은 1800년도부터 1865년까지를 배경으로 다루고 있고요. 상세한 내용은 인터넷에 지하철도 운동이라고 검색해 보면 소상하게 나오니, 여기서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은 도망노예법이 제적된 1793년 이후의 미국의 노예제도를 테마로 하고 있습니다. 남부 대농장에는 노예들이 갇혀 있습니다. 이들을 미국 대륙을 수직으로 가로질러 북부 캐나다로 탈출시켜야 합니다.

[노예사냥꾼은 자기 색깔과 일치하는 경로 상의 칸에 노예가 하나 들어올 때마다 그 방향으로 한 칸 이동합니다. 또는

노예사냥꾼 단계에 주사위 굴림에 따라 이동하기도 합니다. 노예사냥꾼이 멈춘 칸에 있던 노예는 모두 잡혀서 노예 시장으로 팔려갑니다.]

플레이어들은 총 8라운드 동안 노예들을 탈출시킵니다. 8라운드 안에 몇 명의 노예를 캐나다로 보내면 되는가는 플레이어 인원수에 따라 다르며, 이는 각 승리조건 카드에 나와 있습니다. 또한 정해진 지원 토큰을 모두 구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라운드가 종료될 때까지 패배 조건을 채우지 않아야 합니다. 승리 조건 카드에는 잃은 노예칸이 다 차지 않게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라운드는 이렇게 진행됩니다. 맨 처음 지도 상에서 무작위로 노예사냥꾼이 움직입니다. 노예사냥꾼은 멈춘 칸에 있는 노예를 모두 잡아가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는 운을 믿고 가는 수밖에 없는 일이 잦습니다. 그런 다음 플레이어들은 그 라운드를 어떻게 이끌어갈지 계획을 짭니다. 승리 조건 중의 하나인 지원 토큰을 구매하는 것은 대부분 이 단계에 이루어집니다. 계획 단계에서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행동 단계에 들어갑니다. 행동 단계 동안 플레이어들은 노예를 농장에서 탈출시키거나, 탈출 중인 노예를 북쪽으로 보내거나, 돈을 벌어들이거나, 폐지론자들을 활용합니다. 폐지론자들을 통해서 이 단계에 지원 토큰을 구입하기도 합니다. 행동 단계가 끝나면 노예 시장 단계입니다. 노예 시장에 있던 노예들은 남부의 대농장으로 팔려 들어갑니다. 대농장에 노예를 놓을 빈칸이 다 차서 없다면? 이 노예들은 잃은 노예칸으로 들어갑니다. 마지막 랜턴 단계에는 반대 행동 카드가 발동될 수도 있고, 승리 조건 달성 여부를 확인하며, 다음 라운드로 넘어갑니다.

[노예 시장. 한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대농장에는 6-9명의 노예가 보충됩니다. 무시무시합니다.]

큰 흐름상 플레이어들은 세 가지 목표를 잡고 움직입니다. 하나는, 최대한 많은 노예들이 북부 캐나다로 가도록 하는 것. 이동 중에 노예 사냥꾼에게 붙잡힌 노예는 이번 라운드 노예 시장 카드에 올라가서 남부 대농장으로 다시 팔려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잃은 노예칸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 번째는, 농장에 최대한 많은 빈칸을 만드는 것입니다. 노예를 한 명씩만 북부로 올려보내면 이 게임은 정말 쉬운 게임입니다. 그래서 이 패배 조건이 존재합니다. 노예들은 각지로 탈출을 시도하게 되고, 노예 사냥꾼은 미국 영토를 전방위적으로 움직입니다. 위는 막혀 있고 아래는 터지려고 하는 상황 속에서 돈까지 벌어야 하는 게 세 번째입니다. 돈을 벌어야 지원 토큰을 살 수 있으니까요.

지원 토큰을 사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 게임의 구성물은 총 3개 시대로 단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1단계의 지원 토큰을 다 구매하면 그때부터는 1단계 구성물은 버리고 2단계 구성물을 사용하게 됩니다. 1단계에서 2단계로, 3단계로 올라갈수록 플레이어들이 이용하는 특수 카드인 폐지론자 카드의 내용이 강력해집니다. 총 8라운드 중에 3단계를 이동한다는 건, 3라운드쯤에는 1단계 지원 토큰을 다 구매하고 2단계로 넘어가야 진행이 잘 되고 있다는 의미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게임은 퍼즐성이 강합니다. 그런데 노예 해방 테마와 지도, 노예사냥꾼의 움직임 등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보니, 약간만 옆에서 잘 리드해주면 플레이어들은 어느 순간 ‘나무 토큰을 잃었다’가 아니라 ‘노예를 잃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테마에 대한 강력한 몰입은 이들 노예를 해방시키는 움직임에 대한 사명감을 갖게 해줍니다.

[폐지론자 카드들. 해리엇 터브먼은 실제로 당시 가장 많은 노예들을 탈출시킨 인물이라고 합니다.]

주의깊게 살펴볼 것은 폐지론자 카드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중요한 이유이기도 한데요. 폐지론자 카드는 앞서 간략히 언급한 바와 같이 플레이어들이 쓸 수 있는 특수 카드입니다. 폐지론자 열에는 다섯 장의 폐지론자 카드가 깔려 있습니다. 즉, 플레이어들은 한 라운드에 다섯 장의 폐지론자 카드 중 몇 장을 쓸 수 있는 셈입니다.

이 폐지론자 카드에는 당시 역사와 결부하여 실제 있었던 사건과 인물들이 나와 있고, 그들의 내용이나 행적이 플레이버 텍스트로 진술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내용이 실제 게임과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게 카드 능력으로 구성되어 있고요. 여기에는 반대행동 카드도 있습니다. 이 카드는 게임에 등장하고 있는 동안 지속적으로 패널티를 가하거나 혹은 해결하지 못하는 순간에 큰 피해를 입히는 카드들입니다. 이것 역시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합니다.

[반대론자 카드들. 폐지론자 카드들에 비해 게임 시스템으로 테마를 구현하는 부분에서 더 뛰어납니다.]

시스템에 좋은 테마를 입히는 일은 게임에 몰입하게 해 주는 요소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저는, 시스템이 어떻게 테마를 잘 구현하는가 또한 신경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팬데믹의 전염 카드는 이미 바이러스가 발생한 적 있는 곳에서 생물학적 위기가 더 높게 발생한다는 것을 토대로 갈수록 고조되는 긴장감을 잘 표현해 내었습니다. 확산과 치료의 개념 또한 테마와 잘 어우러지는 요소이죠.

지하철도는 이런 면에 있어서 게임과 테마가 시종일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플레이어들은 노예 해방의 목표를 가지고 노예말을 미 대륙을 가로질러 올라가게 보내어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한 명의 노예를 희생시키면서 나머지 노예들을 보내는 선택을 하기도 하고, 반대론자의 행동에 맞서고, 폐지론자들의 힘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어려운 난이도, 잃어가는 노예들을 지켜보는 상황, 그 중에 몇 사람이라도 살려내려는 노력 등이 모두 테마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승리조건 카드. 양면으로 구성되어 각각 쉬운 난이도와 어려운 난이도로 되어 있습니다. 탈출시킬 인원:잃은 노예수를 쉬움/어려움으로 정리하면

1인5:12/7:8 2인10:16/13:12 3인 16:18/20:14 4인 22:20/27:16입니다. 구하기보다 잃지 않기가 더욱 어려운 미션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근래에 들어 좋은 테마를 가진 게임들이 나오려는 노력들이 보입니다. 수저게임도 그렇고, 어제 본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게임도 그러합니다. 아마도 이 좋은 테마를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에 게임이라는 요소가 몰입도가 높고 좋아서 그런 시도들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아직 그런 게임들을 못 해보았기에 저는 뭐라고 말하기가 좀 어렵네요. 그러나 저는, 좋은 테마를 가져왔다는 데에만 의존해서 게임을 단조롭게 만드는 작업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게임을 만드는 작업은 테마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게임을 잘 아는 사람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고요.

만약 수저게임이, 상속된 빈부 격차가 존재하는 삶의 불평등함을 게임 시스템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저는 지지할 겁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테마로 한 게임이 관련 사적지의 위치를 알려주는 정도를 넘어서서 당시의 투쟁이 얼마나 긴박했는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싸워야만 했는지를 보여준다면 역시 지지할 겁니다. 과연, 다른 사람보다 먼저 전남도청에 도착한다는 것이, 그렇게 하는 사람이 우승한다는 사실이 당시 사건과 결부해서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것이 당시 사건에 대해 생각지도 못한 깊은 통찰을 가져다준다면 당연히 지지할 거구요.

[플레이어 캐릭터들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당시 실제 역사에서도 그러했듯, 그들에게는 은어로 철도와 관련한 호칭만 붙어 있을 뿐입니다.]

무난한 테마는 무난하게 가도 괜찮지만, 좋은 테마는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져야 그것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어설픈 시도가 실패의 사례로 남지 않는 것. 그리 하여 앞으로 이차 삼차 저작물이 만들어질 수 있는 계기를 가져가는 것. 그것이 오늘날까지 그 이야기를 잘 이어가는 노력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지하철도는 이렇게 잘 만들어진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잘 알려지진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지하철도는 높은 완성도의 게임이기 때문에 제가 소개하고 이야기할 거리가 되네요. 이 게임을 해보고 나서 우리나라 역사 중엔 이렇게 게임화가 가능한 것이 없을까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되고요. 보드게임이 상당히 활성화된 외국에서도 이런 게임들이 아직 많이 나오지 않은 걸 보면 아마 쉬운 일은 결코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그건 테마를 얻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된 게임으로 만드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겠지요.

*지인을 통해 한글화 자료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한글화 자료를 제작해주신 분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설명 차 이미지를 먼저 사용한 점에 대해 양해의 말씀 구합니다. 제작해주신 자료 덕분에 게임을 감사히 잘 즐기고 있습니다.

*이 글은 차후 수정을 통해 웹진에 기사로 등록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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