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이슈 관련 잡담. 감정은 조금은 내려놓고 이야기 하겠습니다.
(실은 저는 아무 감정 없는데 다들 흥분중이신거 같아서 좀 진정 하셨으면 하는 마음에...)
많은 분들의 의견이 갈리고 있네요.
원고,피고 당사자가 아닌 분들도 많은 부분에서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보다보니 칼로 자른 것 처럼 많은 분들이 두 회사 중 한쪽으로 마음이 쏠리시는 것도 되게 많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니 "비슷한 이슈로 전적이 있는 회사가 왜 그러냐" 라는 감정 실린 말씀도 충분히 나올만한 부분입니다.
반대로 팝콘측에서도 출시 전에 젬블로와 부딪힐 부분을 미리 인지하지 않았을까?
젬블로는 소송전에 이의제기 안하고 소송만 바로했던 것일까? 등 판결 외적으로 알 수 없는 궁금증들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보드게임 작가 입장에서, 새로운 게임 개발에 제한이 걸릴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는 측면을 보시는 분들의 의견도 이해가 됩니다.
한글이라는 공공재 자체가 어떻게 저작권으로 인정받을수 있는가 하는 주장 제기 자체는 하실 수 있다고 봤었죠.
이와 별개로 2006년부터 정품소프트웨어 사용을 주장하면서, 제가 일하던 곳 마다 저작권법 준수를 위해 노력해온 제 입장에서는
이번 판결 자체가 보드게임 업계에 의미 있는 판결이자 상당한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번 판례를 살짝 설명 드리면 저는 하이라이트된 외적인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1. 자음 타일과 모음 타일을 "특별한 방법"으로 선정한 접근 방식에 대한 인정.
2. 실질적으로 타일의 모양, 모음 타일의 종류는 영향이 없음.
3. 보드게임 규칙은 저작권법으로 여전히 인정받지 못함.
이 세가지가 이번 판결에 유효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1의 보충 설명으로 나와 있는 부분은 사전에서 나오는 자음 빈도를 기준으로 선정했다는 것이 "모든 한글 자음이 아니라 특별하게 선택한 저작물"로 인정을 해준 것이고
따라서 1의 자음 세트와 수량은 저작물적인 성격이 있다고 법원이 판단을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의도를 가지고 선택하고, 선별해서 제작했기 때문에 저작물로 보는 것이죠.
만약 모든 자음을 균일하게 가져왔다면, 이의 제기 하신 것 처럼 저작물로 인정을 받기 어렵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공공재의 형태를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죠. 굳이 인정받을 수 있는 부분의 타일의 모양과 한글에 사용한 디자인 저작권만 간신히 인정받는 수준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저작물 인정을 못받을테니 판결은 불리했겠네요.
2는 모음은 별 상관 없어보인다고 적혀 있었구요.
3의 경우 두 게임의 규칙이 다른데도 앞선 게임의 저작권이 인정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판시된 내용에도 "규칙서 자체는 저작물로 인정하나, 규칙은 아이디어로 인정받을 수 없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 규칙의 저작권을 인정해준다고 했다면 라온과 나랏말싸미는 전혀 다른 게임이어야 하니 저작권 위반이 아니게 되는 것이죠.
저작물이라 함은 아시는 분은 다들 아시겠지만, 누군가가 만들어낸 실체화된 것에 대한 보호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보드게임 저작권 알아보시면 나오는 얘기가 "비슷한 규칙에 디자인만 달라도 다른 게임" 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실체화된건 컴포넌트, 디자인적인 요소이며 규칙은 실체화되지 않았다는 의미죠.
아마 이런 이유로 1심 판결은 원고의 승리로 결론이 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판사가 보알못이라, 젬블로측 변호사가 역량이 좋아서, 출시일자가 빨라서 등등의 이야기 말고
여러분이 우려하는 그런 일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1) 이 판결 자체만으로 창작 활동에 대한 억제가 될까요?
저작권법의 입법 취지에 따르자면, 창작자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함이죠. 이번 판결은 그 입법 취지를 따르는 판결이라 보여집니다.
창작 행위는 먼저 공표한 사람의 것을 인정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창작하게 될 게임들을 제한하는 판결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위의 보충 설명에서 말씀 드렸듯이 "젬블로가 한글 자음을 골라서 게임으로 만들어낸 내용 중 [특수한] 부분들" 이 인정받았고, 이를 판결에 적용한 것이니까요.
창작자는 늘 남들과 다른 "특수한" 부분을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판결 덕분에 "남들이 따라하면 확실하게 티나는 특별함" 이라면, 모든 창작물들이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보드게임도 작가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이상 특별한 게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하는건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2) 한글 조합하는 게임은 더 이상 안나오지 않을까?
한글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는 게임은 더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보다는 "또 다른 형태의 자음 모음 조합하는 게임이 나올것" 이라는 기대를 할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라온에 적용된 "사용 빈도를 기준으로 추출해낸 자음의 종류와 수량" 이라는 기준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자음 모음을 추려서 게임이 나오고
다른 조합 방식을 사용해서 게임이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인간은 답을 찾을 것이다, 언제나. 라는 말 처럼 저작권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길을 찾을 것이라 봅니다.
(3) 비용 여유가 있는 기업의 횡포가 늘어날 것
이 걱정은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송전이라는게 길고 지루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부분이죠. 이 부분은 개인이 기업과의 싸움을 버티기가 상당히 힘들죠.
당연히 저도 공감합니다.
걱정이 덜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저작권법 위반으로 고소를 여러번 해보고 판결도 받아본 입장에서는
일개 개인도 저작권 고소 난사가 가능하긴 합니다.
이건 제 체험담이 있긴 한데, 이야기가 길어지니 패스하겠습니다.
어쨌든 스스로 원 저작자라고 생각하신다면, 기업이 아닌 개인 누구나 고소머신건이 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기업의 횡포가 걱정되는게 아니라 무분별한 저작권 고소 남발로 이어질게 조금 걱정됩니다.
"어, 내꺼랑 비슷한데?" 이러고 일단 고소 때리고 시작하는거죠.
개인 작가간에 발생하기 쉬운 일이라고 보여집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드게임 창작 영역에 제한이 걸리는 상황이 더 많이 발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난 분명 스스로 창작해서 만들었는데, 누가 자꾸 고소를 걸면 스트레스 받죠...
결론은...
뭐 딱히 없네요. 남의 소송이긴 하니까요.
우리끼리 의견 충돌하면서 감정 상하는 일은 좀 자제하시면 좋겠습니다.
대단한 저작권법 수호자 나셨네 라고 하셔도 됩니다.
저작권법 지키자고 온갖 욕먹어가면서 2006년부터 살고 있는 사람이라 유별나다는 소리 많이 들었었습니다.
일단 작가님들 입장에서는 법에 영향받는 당사자니 감정적 몰입은 어쩔 수 없이 발생하실 것 같긴 합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말씀 하시듯 한국 보드게임시장은 안그래도 작고 좁은데
앞으로 시장의 확대에 방해될까 걱정하시는 마음이 앞서는게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번 일에 쉽게 감정적으로 대하게 되는거 아니신가 싶네요.
조금 희망적인 부분 말씀드리자면, 저작권법이 오래전부터 동작하던 방송영상 업계에서도
온갖 저작권 위반 사례는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최근까지도 그래요.
그런데 넷플릭스에서 한국 드라마가 월드 탑1 찍기도 하잖아요.
어쨌든 난 내길 간다 하고
작가주의적 정신으로 만드는 분들이 계속 계시면 독보적인 작품은 나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