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 - 한글화 하던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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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3 11:56

벌써 10여 년 전이다. 내가 보드게이밍에 갓 입문한 지 얼마 안 돼서 의정부에 내려가 살 때다. 모임가는 길에, 청량리역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에서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동대문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한글화를 하는 노인이 있었다. 내가 가진 게임 한글화 하나 해보려고 부탁을 했다. 소요시간을 굉장히 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금방 해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한글화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느리거든 다른 데 가 부탁하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기간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한글화 해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작업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하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업데이트하고 저리 업데이트하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한글화하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모임에 가는 차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한글화 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게임 하겠다는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한글화한단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차시간이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사우. 난 한글화 안하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한글화 해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한글화하다가 실수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한글화 하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JPG가 담긴 USB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한글화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한글화를 해 가지고 호응을 받을 턱이 없다. 사용자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의미없는 업데이트만 한다. 상도덕(商道德)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맞은 편 보드게임 상점을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였다.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殺)된 셈이다.

모임가서 와서 한글화된 게임을 내놨더니 사람들이 이쁘게 한글화 되었다고 야단이다. 집에 원본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한글화 해본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의 설명을 들어 보니, 폰트가 너무 크면 글간격이 좁아 읽기 힘들고 같은 번역이라도 여백이 빡빡하며, 폰트가 너무 작으면 보기도 힘들고 눈이 금방 피로해진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한글화는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사용된 한글화 방식은 스캐너로 콤포넌트를 모두 손수 스캔하여 고화질 JPG 로 바꾼다. 혹 명암이 다르게 적용되면 다시 스캔하거나 포토샵으로 명암 조절을 하면 좀처럼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저급 한글화는 오히려 이해가 안된다는 소리가 나오며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다. 예전에는 프로텍터에 씌워보기 전, 여백까지 정확하게 계산하여 한글을 배치한 뒤에 전체적으로 다시 조절했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한 뒤에 비로소 인쇄해본다. 이것을 생노가다라고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요새는 급하면 텍스트만 따로 프린트하여 프로텍터에 같이 넣어둔다. 금방 한글화가 된다. 그러나 오래가진 못한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한글화를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중고매매만 해도 그러다. 옛날에는 중고를 사면 보통 것은 얼마, 완전 플텍은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한글화한 것은 더 비싸다, 완전 플텍이란 수십 수백장의 카드를 전부 깔끔한 프로텍터에 씌운 것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다섯 시간이 거렸는지, 열시간이 걸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남이 보지도 않는데 팔려고 한장한장 플텍을 씌우고, 또 그것을 믿고 값을 쳐 줄 사람도 적다. 옛날 사람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중고매매를 하는 그 순간만은 오직 상대방에게 만족스러움을 주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중고게임을 포장했다.

이 한글화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한글화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젊은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한글화가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밀봉게임에 품절게임이라도 까서 같이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상경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동대문의 보드게임 상점을 바라보았다. 아담한 가게 지붕 끝으로 흰 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한글화를 하다가 유연히 지붕 끝에 구름을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 도연명(陶淵明)의 싯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도 아내와 게임을 하는데 아내가 한글화 된 카드를 들여다보고 있다. 전에 영어사전을 옆에 두고 하나하나 번역하며 하던 생각이 난다. 영어사전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한글판이 나온다는 소식도 들을 수가 없다. 문득 한글화 하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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