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전 보드게임 잡담 #28 - 승리보다 값진 것

개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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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6-7 오전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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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연휴가 끝나 출근직후 퇴근하고 싶은 퇴근 전 보드게임 잡담의 남자, 개굴입니다.

쓸 이야기가 이래저래 쌓였긴 한데, 오늘은 가끔 있는 그 날이에요. 한 가지 주제로 말 길게하기(빠밤)

사실 지지난주 정도에 있던 일이라 거의 열흘 가까이 묵혀놨다가 쓰는 글입니다.

그럼 어차피 본문도 긴데 바로바로 고고 해 볼게요! 꼬!

1.
학교에서 시행하는 프로그램에는 반드시 교과교육적 의미가 내포되어있어야 한다...는 학교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체험 수학 연구회" 같은 동아리를 열어서 실제로 아이들로 하여금 행사를 개최하게 하고, 활동지를 작성하여 이를 토대로 생기부에 기재하고 하는게 대학 진학할 때 도움이 되긴 하거든요? 학교 입장에서는 저렇게 해서 한 명이라도 좋은 대학에 진학시키면 좋죠. 하지만 솔직히 저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그게 마냥 즐거운건 아닙니다. 그냥 하는거죠.

물론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학생의 심, 기, 체의 고른 발달이기 때문에 축구 동아리도 있고, 즐거움을 추구하는 나노블럭 동아리도 있고, 밴드부 등도 있습니다.

두 프로그램 모두 "체력 향상을 통한 건강한 신체와 정신의 도야"라는 목적이나, "나노블럭 조립을 통한 집중력 향상" 등의 교육적 목적도 있기도 하구요.

하지만 솔직히 보드<게임> 동아리는 조금 그래요. 아직 사회에서 <게임>이라는 단어는 <교육>의 대척점에 있으니까요.

아무리 "보드게임을 통해 여러가지 직업을 간접 체험하고, 논리적 사고력을 향상시켜 합리적인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한다." 라고 해 봤자,

결국 <게임> 이라는 타이틀을 겸하고 있는 이상, 학교 구성원들과 학부모의 시선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2.
이야기가 좀 다른데로 샜는데, 지금 근무하고 있는 학교는 다행히 이런 부분에서 교사의 자율성과 학생들의 선택권을 최대한 존중해줍니다.

제 입장, 그리고 아이들 입장에서는 매우 반갑기 그지없는 상황이죠. 심지어 저런 환경이다보니 선생님들께서 워낙에 다양한 동아리를 두루 개설하셨기에 동아리 수도 많아서 한 동아리 별 인원도 어느정도 타협이 가능하여 8명으로 2테이블을 돌리는 경이로운 운영을 하고있죠. 솔직히 직업만족도 300%입니다.

사실 두 시간 가량 여덟명을 데리고 하는 것만 해도 매우 감사한 일이긴 해요. 제가 갖고있는 게임과 동일한 게임을 하나만 더 사면 두 테이블을 4인플 돌릴 수 있긴 하거든요.

4명이면 베스트 인원이고, 두테이블 정도라면 혼자서 어찌저찌 케어할 수 있으니까요.

- 아, 물론 수업시간에 수업을 안듣고 딴생각하듯이, 설명할 때에 딴 생각 하는 녀석들이 의외로 많이 있었다는 뒷이야기가 있긴 하지만요.

어찌되었든 한 동아리를 여덟명만 데리고 할 수 있다는건 어찌보면 다른 선생님들로 하여금 부러움 반, 눈꼴시림 반 정도의 시선을 받을 수 있는 뭐 암튼 그런 좋은 환경이란거죠.

덕분에 아이들에게 흔히 하던 할루젠(...)에서 벗어나서 아발론도 시키고, 렉시오도 시켜보고, 언락이나 코린트 등 이리저리 평소에 접하지 못했던 게임들 위주로 돌려보고 있습니다.

뭐 덕후들 마음이 다 그렇잖아요? 입덕시키고 싶은 욕구가 드글드글하고, 사리사욕을 마음껏 채우는거죠.

그런데 사람이 좋은 환경에 있다보니 자꾸 배가 불러져서, 조금 더 아이들에게 매운 맛...이랄까, 조금 더 날것의 보드게임을 시켜보고 싶어졌습니다. 진드감치 긴 호흡으로 오래 할 수 있는 게임 말이에요.

마침 학교에서 사제동행 프로그램을 장려하기에 동아리 학생들 중 네 명을 선발하여 주말에 따로 학교에 모여서 보드게임을 하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3.
게임을 선정하는데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는데,

1) 최대 3시간~4시간 가량 즐길 수 있을 것
- 2시간 미만은 동아리시간에 하면 되니까요.
2) 잔룰이 적을 것
- 아이들은 우리들 이해력과 집중력이 굉장히 낮습니다.
3) 나 까지 5인이 가능할 것
- 저도 놀고싶었어요.
4) 개인 카드 등의 비공개 요소가 없을 것
- 저도 놀거라서 아이들의 핸드를 하나하나 봐 줄 수가 없습니다.
5) 인터액션이 활발할 것
- 아무래도 중간에서 제가 야부리(...)를 털어서 분위기를 끌어올리려면
인터액션이 활발한게 좋습니다.

▲ 그래서 나온 최종 선택..........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옛날 게임이긴 한데, 가지고 있는 게임 중에 하루 진하게 놀기에 가장 좋은 게임이 아닌가 싶더라고요.

테마도 생물의 진화와 경쟁, 멸종, 지구 환경의 변화와 연관지어져있다 보니 교육적인 부분이 있기도 하고, 얼핏 보면 복잡해보이지만 규칙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딱 1회만 해 본 게임이었는데 언젠가 다시 한 번 해보고싶다는 생각도 항상 갖고있었고요.

5인이면 인터액션도 터져나갈거고, 다운타임이야 다른 스피디한 게임들을 해 본 사람들이나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기도 하거니와, 미리미리 생각하자고 제가 좀 닥달하면 되는 문제니까요ㅋㅋ

암튼 게임 자체는 굉장히 성공적이었습니다.

최종 승점을 계산할 때 타일별로 영향력 점수를 얻는데, 아이들이 이 부분을 간과하는 바람에 압도적으로 제가 이기긴 했지만, 약 네 시간 가량의 플레이를 지루함 없이 해냈습니다.

이런 호흡이 긴 전략게임을 이 친구들도 처음 해보다보니, 어느 시점까지는 액션 하나하나에만 집중했는데

그 이후 부터는 자신의 동물의 특징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해가면서 전략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하더라고요.

2학기 때 나머지 동아리학생 4명을 대상으로 한 번 더 사제동행 프로그램을 신청할건데, 본인들이 한 번 더 하면 안되냐고 떼를 쓰며 활동이 끝났습니다.

주최한 지도교사 입장에서 최고의 활동 후 소감이었어요.

4.
지금부터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네요. 저는 메인보드의 인터액션에 대해서는 환호하는 사람이지만 스코어링보드에서의 인터액션에는 야유를 보내는 사람이에요.

다른 글에서 여러번 언급했듯이 저는 전략게임은 P2W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Pay To Win이 아니라 Play To Win요.

보통 두 시간 가량 걸리는 전략게임을 하나의 긴 마라톤이라고 하면 그 목적은 1위여야 한다...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1위를 목적으로 참가하고 1위를 목적으로 공정한 경쟁을 해야 게임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흘러가게 되거든요.

그리고 그런 흐름 사이에서 다른 사람의 맹점을 찌르거나 자신의 플레이를 멋지게 성사 시키는게 파인플레이라고 생각하고요.

물론 참가에 의의를 두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 사람은 다른사람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거나 누군가의 등을 밀어줘서 열심히 노력한 사람의 보상심리를 뒤흔드는 행동은 하면 안된다는거죠.

그러니 제 플레이는 태생적으로 모순을 안고 있어요.

제가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남의 승점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뽑아오는 사람이지만, 반대로 제 승리와 상관이 없다면 다른사람의 플레이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거든요.

그러다보니 가끔은 점수 트랙에서 한참 뒤쳐져 있어서 신경도 안쓰던 사람이 갑자기 치고 올라오면 "대체 뭘 하신거에요?" 하고 묻는 일이 발생하곤 합니다.

자연스럽게 제 성향의 정 반대인 "본인의 승리와 상관없이 남을 푸시하거나 끌어내리는 사람"이나 "본인의 승리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플레이를 도외시하는 사람"과 같은 테이블에 앉으면 게임 내내 고통을 겪어요. 뭐 예를 들면 푸에르토 리코에서 대놓고 건물을 잔뜩 올리는 플레이어가 있길래 테크 안겹치게 하려고 콘트리 타고 세관을 노렸더니만 갑자기 세관을 날치기하고서 저와 함께 장렬하게 3-4위를 기록한다거나 하는 사람 말이에요. 예측과 계산이 안되니 제 플레이를 할 수가 없다...라는 느낌입니다. 사실 이쯤되면 저도 "오늘은 빡겜하긴 글렀으니 즐겜이나 하자" 라고 생각을 고쳐먹긴 하지만, 솔직히 머리가 터져도 저는 빡겜이 더 즐겁거든요.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아무튼 요약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저는 굳이 다른 사람의 순위를 끌어올려주진 않아요. 소중한 액션을 다른사람에게 낭비할 수는 없으니까요.

반대로 다른 사람을 구태여 끌어내리지도 않습니다. (물론 제가 2등이고 상대가 1등이라면 얘기가 다르지만요)

그리고 제가 지도하는 학생들에게도 저런 행동은 다른사람의 빅토리플랜을 의미없이 망가뜨릴 수 있으니 정당한 이유가 없다면 하지 말아라...라고 가르쳐요.

당연히 이 아이들에게도 게임을 하면 이겨야지, Play To Win의 사고방식으로 게임을 하라고 가르쳤고, 그 날 이 친구들과 도미넌트 스피시즈에서 있던 일입니다.

▲ 굴지의 프로게이머 송하나 님께서도 이리 말씀하셨으니.

5.
한 친구가 게임에 대한 감을 늦게 잡아서 대놓고 꼴찌에서 허우적거리는 상황이었어요.

그 친구가 조류 동물을 잡았는데 이주 액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를 못하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툰드라에 비집고 들어가는 데에만 집착했거든요.

- 해당 플레이를 본 저는 "저게 바로 북극 비둘기다. 날지 못하고 걷는것을 봐라" 라고 평했습니다.

그래서 환경요소를 개인판에 붙여서 활동영역을 넓히고 이를 토대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승점을 끌어모으는게 좋지 않을까? 라는 정도의 조언은 해줬지만,

이걸로 게임의 메인 무대에서 싸우기에는 사실 조금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습니다. 그냥 무난하게 밑에서 누구와도 경쟁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상황이었죠.

그 때 신기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다른 플레이어들중에 당시 액면가 1, 2, 3위가 생각보다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서 누가 앞서나가냐 라는 긴박한 상황이었는데, 3위가 더 좋은 플레이를 제쳐두고 1위를 끌어내리고 2위가 5위를 끌어올리더라고요.

3위는 1위의 발목을 잡지 말고 본인이 순식간에 치고 올라갈 수 있는 플레이가 분명히 존재했으며, 2위는 5위를 끌어올릴 이유가 전혀 없었거든요.

심지어 저 액션이 "자신의 플레이로 인한 5위 친구의 반사이익"이 아니라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는 환경요소를 5위 친구가 멸종당하기 직전인 타일에 배치해줘서 멸종을 막아주는 플레이였습니다.

당연히 제 입장에서는 절대 이해가 가지 않는 플레이였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너네 지금 이거 무슨 플레이야? 납득이 가게 설명을 해봐" 라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이 다 같이 대답을 하더라고요.

"이렇게 해야 조류도 치고올라와서 같이 게임할 수 있잖아요"

머리를 망치로 맞은 기분이었어요. 반박의 말은 당연히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경쟁은 학교 교육만으로 충분하니까 우리끼리 재미있게 놀자고 만든 동아리인데, 저도 모르게 그 안에서 경쟁의식을 조장하고 있더라고요.

2위, 3위 친구 뿐 아니라 1위 친구 역시 저 말을 듣고서 다음 액션은 5위 친구를 위해 지역타일을 배치해주는 것을 선택했고 덕분에 순식간에 조류가 메인스트림으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친구들이 의도한대로 무대가 꾸며졌고 그 무대에서 자기네들끼리 쉴 새 없이 떠들면서 치고박고 헐뜯으며 노는 것을 보고 그 이후부터는 저도 플레이 방식을 바꿨어요.

누구 한 명이 지나치게 치고 나가거나 지나치게 뒤쳐지는 일이 없도록 전체적인 판세 조정에 힘을 썼죠.

▲ 매운 맛 체험중.

6.
이 에피소드 하나로 저의 보드게이머로서의 게임관이 흔들렸다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동화같은 이야기일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날 이후로 제가 아이들의 지도교사로서 취해야 할 스탠스와 제가 보드게이머로서 취해야 할 스탠스는 분리가 되었어요.

이제서야 저는 "승리보다 더 값진 것이 있다"는 그 관용적인 말을 마음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아마 앞으로 아이들을 지도 할 때에는 P2W가 아니라 P4E, Play For Everyone 모두 같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을 하자 라고 이야기 할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가 하고 있는건 <게임> 동아리잖아요?

덧) 그러고 최종 정리가 끝난 후의 승점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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