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이었던 자], 또는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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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6 17:32

책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탐정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땅딸막한 체구의 성직자 브라운 신부가 탐정으로 등장하는 단편 ‘푸른 십자가’, ‘이상한 발소리’ 등을 접하신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들은 영국 출신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G.K.체스터턴이 남긴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대표작으로, 매 편마다 브라운 신부가 프로파일링을 통해 범죄자들의 심리를 간파하는 대목이 매력적입니다.

체스터턴은 대표작인 ‘브라운 신부’ 시리즈 외에도 몇 편의 소설을 남겼는데, 지금 소개하려는 ‘목요일이었던 자 : 악몽The Man Who was Thursday : A Nightmare’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간략하게 제 멋대로 줄거리를 요약해 소개하자면...

주인공인 사임은 시인이자 런던의 비밀경찰입니다.

그는 정체를 숨긴 채 임무를 수행하던 중 우연한 사건에 휘말려 런던의 악명 높은 무정부주의자 조직에 새로운 ‘목요일’로서 위장 가입하게 됩니다.

조직은 초인 같은 용모의 총재인 ‘일요일’과 각 요일을 대표하는 위원들로 구성됩니다.

‘일요일’의 뜻에 따라 다른 위원들은 런던에 혼란을 일으킬 테러 계획을 세웁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 두려워하면서도 남몰래 폭탄 테러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 과정에서 ‘금요일’이 주인공을 의심하고 둘은 갈등을 빚으나, 결국 ‘금요일’도 비밀경찰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에 두 사람은 동지가 되어 다른 무정부주의자 위원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기로 의기투합합니다.

그런데 위원들을 처리하려 할 때마다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도 비밀경찰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알고 보니 ‘일요일’을 제외한 모든 위원이 사실은 경찰이었던 것입니다.

용기를 얻은 위원들은 ‘일요일’을 꺾기 위해 작전을 벌이나 오히려 시민들의 공격을 받고, 자신들을 제외한 세상 모두가 무정부주의 세력이 된 것 같다며 절망합니다.

그리고 절체절명의 순간, 그들은 ‘일요일’이 과거에 자신들 모두를 비밀경찰로 임명했던 신비로운 고위직 인사임을 알게 됩니다.

결국 그들 모두는 같은 편이자 다른 편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남습니다. 그들은 경찰인가, 혹은 무정부주의자인가.

이야기는 긴장감 넘치는 호흡으로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작품의 부제 그대로 하룻밤의 악몽처럼 끝이 나 버립니다.
그럼에도 한 번 더 같은 꿈을 꾸고 싶어질 때가 있듯, 저는 처음 책장을 덮었던 날 이래로 오랫동안 이 작품의 기묘한 매력에 이끌려 왔습니다.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가 만들어 낸 거대한 세계의 힘이겠지요.

여기부터는 제가 소설 ‘목요일이었던 자’에 영감을 받아 개발 중인 게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직 완성되지도 출판되지도 않은 게임을 소개하는 건, 이 작품이 제 머릿속에서만 펼쳐지다 그대로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또한 혹시라도 소설로부터 이어진 이 게임의 세계에 흥미를 느끼고, 더 나은 작품으로 완성할 수 있도록 소중한 조언을 해 주실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원작 소설 ‘목요일이었던 자’에서 매력을 발견하셨다면, 그러한 매력이 게임으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비교해 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게임 인원은 2~5명, 플레이 시간은 40~60분, 난이도는 긱웨이트 기준 2.7 정도입니다.
중심 메커니즘은 비밀 유닛 운용 + 세트컬렉션이며, 여기에 블러핑, 주사위 굴림, 핸드 관리, 소거법 요소 등을 가미했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면서 매 라운드 요원 점수와 세력 점수를 획득하는 것이 게임의 기본 목표입니다.

각각의 플레이어는 게임 시작 전에 자신의 정체를 결정할 세력 카드 1장과 요원 카드 1장을 비공개로 받습니다.
세력에는 경찰, 무정부주의자, ‘수상한 친구’가 있습니다.
요원은 '목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하고서 각 요일을 대표하는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입니다.
‘수상한 친구’는 일종의 중립 세력으로서, 홀수 인원 플레이에는 반드시 포함되며, 짝수 인원 플레이에는 포함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게임은 총 3라운드로 이루어지며, 각각의 라운드는 게임 내에서 1개월의 시간을 나타냅니다.
각 플레이어는 자신의 차례마다 지역 카드 1장을 공개하며 사용합니다.
카드를 사용하면 표시된 날짜만큼의 시간이 달력 트랙에서 흘러가고, 해당 지역이나 요일에 대응하는 요원 1~2명을 이동시켜 임무에 도전하게 됩니다.

각각의 임무를 달성하려면 2~3개의 속성을 처리해야 합니다.
해당 지역에 위치한 요원, 임무 주사위, 도구 카드를 조합해 이들 속성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임무에 성공한 요원은 무정부주의자 점수를 획득하고, 플레이어는 해당 지역에 공개된 이벤트 카드를 획득합니다.
임무에 실패한 요원은 테러를 저지한 셈이므로 경찰 점수를 획득하고, 플레이어는 도구 카드를 획득합니다.
이 과정에서 ‘목요일’이나 ‘일요일’은 함께 있는 요원들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특수한 역할을 합니다.

라운드가 종료되면 각각의 요원은 이번 라운드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업적 토큰을 획득합니다.
28일이 지나기 전에 요원들이 모든 임무를 달성하면 무정부주의자 세력의 점수가 올라가면서 라운드가 종료됩니다.
반대로 모든 임무를 달성하지 못한 채 28일이 지나면 경찰 세력의 점수가 올라가면서 라운드가 종료됩니다.

마지막 라운드는 세력 점수의 비중이 더 크며, 만약 특정 세력이 3회의 라운드를 모두 승리하면 반대쪽 세력은 게임에서 탈락합니다.
‘수상한 친구’ 세력의 경우 이러한 균형을 교묘하게 중심으로 돌려놓아야 세력 점수를 획득합니다.

임무에 성공할 경우 획득하는 이벤트 카드에는 4가지 유형이 존재하며, 이들을 균형 있게 획득하면 이벤트 점수를 획득합니다.
특정 카드는 즉시 플레이어나 요원에게 영향을 미치고, 특정 카드는 1회성으로 사용이 가능하며, 특정 카드는 지속적으로 효과를 발휘합니다.
총 23개의 각기 다른 효과가 존재하는데, 개중에는 ‘배신’과 같이 게임의 양상을 뒤집는 카드도 있습니다.

세 번째 라운드가 종료되면, 탈락하지 않은 플레이어들끼리 고발 단계를 진행합니다.
첫 번째 고발자부터 원하는 방향을 선택해 상대의 담당 요원을 고발합니다.
지목당한 플레이어는 아직 자신의 정체를 공개하지 않은 채로 다음 고발자가 되어, 첫 번째 고발자가 지목했던 방향대로 바로 옆 플레이어의 담당 요원을 추리해서 고발합니다.
이후 정체를 간파당한 플레이어는 요원 토큰 1개를 버려야 합니다.
고발 단계가 종료되면 1) 요원 점수, 2) 세력 점수, 3) 이벤트 점수, 4) NPC 점수를 더해 승자를 결정합니다.

이 게임은 제가 사랑하는 많은 소설과 게임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원작인 ‘목요일이었던 자’ 이외에도 H.G.웰스의 단편 소설들, 코넌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 등이 게임의 분위기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메커니즘 측면에서 영감을 준 게임들은 ‘에메랄드빛 연구’. ‘장미의 이름’, ‘엘더 사인’, ‘탑 시크릿 스파이’ 등입니다.
재미있게도 마틴 월리스의 ‘에메랄드빛 연구’ 역시 원작인 닐 게이먼의 동명 소설뿐 아니라, 체스터턴의 소설 ‘목요일이었던 자’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프로토타입을 위한 미술 요소로는 에두아르 마네와 윌리엄 모리스의 작품들을 주로 활용했습니다.

사실 이 게임은 연초에 별빛바다에서 기획했던 가짜 보드게임 공모전에 제출해 1~2차 심사를 통과하고 3차 심사를 기다리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다 퍼블리셔의 내부 여건 때문에 공모전 일정이 무기한 연기되면서 빛을 볼 날이 요원해졌지만,

친구가 없어서 퍼비 인형과 테스트 플레이를 진행하던 저 같은 사람에게도 조언을 주는 분들이 계셔서 느릿느릿하지만 꾸준히 아이디어를 보완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