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에 진심인 모든 연령대의 독자와 게이머를 위한 이야기 - [검은손 탐정단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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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5 16:47

추석 연휴에 아홉 살배기 조카에게 '루시의 하루'를 (개봉 1회플을 마치고) 선물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온갖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세상에 이런 아날로그 게임북이 먹힐까 싶었는데 의외로 열중하는 모습을 보니 흐뭇하더군요.
하긴 인쇄된 종이를 직접 만질 때 느껴지는, 단순한 촉감에 그치지 않는 손맛이 없다면 게임북뿐 아니라 보드게임이라는 형식도 이렇게 굳건히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몇 번이고 루시의 여정을 따라갈 조카도 지금의 손맛을 잊지 않고 나중에 전략 게임이라도 슬슬 즐길 나이가 되면 저도 꼭 좀 끼워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 역시 오래전에 게임과 결합한 책들을 탐독하다가 자연스럽게 보드게임에도 흥미를 느끼게 되었는데, 그중 가장 사랑했던 것이 당시 해적판으로 나와 있던 ‘명탐정 게임’이었습니다.
적당한 난이도와 섬세한 그림들에 어린이 탐정단이라는 몰입감 넘치는 설정까지 더해져, 당시의 저에게는 끝장나게 멋있어 보이는 작품이었지요.
나중에 책의 원본을 알고 싶어 찾아보니, 독일의 작가 한스 위르겐 프레스Hans Jürgen Press의 저작이더군요.
원제는 ‘검은손 탐정단의 모험Die Abenteuer der »schwarzen hand«’이고 무려 1960년에 발표되기 시작한 작품이었습니다.
다른 국가들에서도 많이 번역 출간되었지만 워낙 오래전 책이다 보니 대개는 절판되었는데, 본국인 독일에서는 라벤스부르거를 통해 최근까지도 재판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마침 독일 어린이들의 영어 공부를 위해 분책된 영어 버전까지 있어서 아마존을 통해 구입해 보았습니다.

표지에서도 느낄 수 있듯, 세밀한 배경 묘사가 매력입니다.
책 속으로 들어가면 이렇듯 세밀하게 묘사된 사람들이나 사물들 속에서 단서를 찾아야 하는 과제들이 여럿 존재합니다.

독일에서는 이런 스타일의 책을 가리키는 숨은그림찾기책Wimmelbilderbuch이라는 표현이 따로 있고, 한스 위르겐 프레스도 이러한 스타일을 구축한 선구자 중 한 명입니다.
이후 미국에서 이를 계승한 ‘월리를 찾아라’가 등장해 크게 성공했고, ‘아이 스파이’나 ‘미크로 마크로’, ‘히든 포크스’처럼 색다른 변주들이 지금까지도 계속 등장하고 있지요.
이런 스타일의 원형은 르네상스 시대 네덜란드 지역에서 활동한 화가 브뤼헐이나 보슈까지 거슬러올라간다고 하는데,

당시 군상화를 보면 정말로 월리와 우프가 슬쩍 숨어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검은손 탐정단의 모험’은 총 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고, 각 에피소드는 다시 10~20개의 삽화들로 구성됩니다.
각각의 삽화마다 사건의 흐름이 소설 형식으로 서술되다가, 단서가 되는 그림과 함께 질문이 제시되지요.
질문에 대한 답을 그림에서 찾아낸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 삽화의 첫머리에서 자연스럽게 이전 삽화의 정답이 안내되는 형식입니다.

다음은 첫 번째 삽화입니다.
왼쪽 건물 꼭대기 층에서 숙제를 하다 지루해진 검은손 탐정단이 오른쪽의 수상한 저택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몇 년간 방치되었다는 저택 안에 누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을까요?

단서는 모두 그림 안에 있습니다.

두 번째 삽화에서는 저택 앞에 떨어진 구두 뒷굽을 단서로 삼아, 뒷굽 없는 신발을 신은 사람을 찾아내야 하고…

세 번째 삽화에서는 저택에 숨겨진 비밀 통로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림 안에서 엄청나게 수상한 통로를 발견하셨는지요.

참고로 다리 위의 아이, 보트에서 낚시하는 아이, 신문을 편 아이, 정원에서 요정으로 변장한 아이는 잠복 중인 탐정들입니다.

대충 찍은 거라 사진이 흐릿하긴 하지만 라떼는 말입니다, 후지게 인쇄된 해적판만 가지고도 초딩들이 이런 거 다 찾았지 말입니다.

단순히 단서만 찾으면 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그림을 찾거나 찢어진 종이를 맞추는 등 다양한 퍼즐들이 숨어 있으며 제법 추리력을 발휘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식의 삽화가 총 60편 이어지니 볼륨도 탄탄하고요.

저는 이전에 미크로 마크로를 플레이하면서 이 책을 많이 떠올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형식이되 관점에 따라서는 교육상 애매한 지점들이 있다는 점도 비슷하네요.
미크로 마크로는 그야말로 막장 범죄 도시가 배경이고,

검은손 탐정단이 활동하는 마을에서도 (어린이가 빨거나 쏘지는 않지만) 마약과 총기가 심심찮게 등장하며 어른들이 장면마다 담배를 뻑뻑 태우고 있거든요.
예전부터 새로이 번역해 출간하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하던 작품인데, 시대착오적인 요소와 60년 전의 빈티지한 매력 사이 균형이 아슬아슬합니다.

생각해 보면 먼 옛날의 어린이용 게임북은 빠꾸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해요.
망망대해에서 괴혈병 걸려 사망하기(‘서바이벌 게임’), 산 채로 서서히 화석 되기(‘공룡 박물관의 공포’) 같은 요소가 심심치 않게 등장했으니.

여하간 멋진 책을 다시 접하게 되어 반가운 마음을 어떻게든 표출하고 싶어 이렇게 소개해 보았습니다.

일곱 살 때였나, 직접 그림까지 그려 넣으며 한 권의 책을 완성하겠다는 야망으로 ‘검은발 탐정단’이라는 탐정소설 겸 게임북을 기획한 적이 있습니다.
제목도 구성도 영락없이 검은손 탐정단의 짝퉁인지라, 등장인물들도 저도 민망함을 이기지 못해 단 두 개의 사건을 끝으로 이야기는 종결되었지만요.
어렴풋한 기억으로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도 잠시 소개되는 굴뚝 청소부의 삽화가,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그 즈음 학습 만화에서 이름만 주워들은) 아르키메데스의 원리가 사건의 핵심 트릭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실물이 사라져 그 전후맥락을 알 길이 없는 지금도 가끔 생각합니다.
대체 뭘 어쩌다 그런 사건들이 벌어졌던 걸까.
탐정 이야기는 어째서 이리도, 여전히 마음을 설레게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