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클론 배경이야기-05. 코드네임 ‘그래스퍼(Grasper)’ 짐 킴
트레비 작가 세하입니다.
이제 보드게임 클론 배경이야기의 마지막 인물, 짐 킴에 대한 글입니다.
이 편을 끝으로 소설형식을 띈 글은 마무리 됩니다.
다음에는 보드게임 클론에 관한 다른 정보로 찾아뵙겠습니다.
꾸준히 읽어주시고 관심가져주시는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말씀 드립니다. ^^
클론 프롤로그-05. 코드네임 ‘그래스퍼(Grasper)’ 짐 킴
[2039년 4월 20일 15시 42분 군사지역 내 방어기지 제3벙커]
“근데 이건 무슨 소리냐?”
“응 뭐가? 안 들리는데?”
“전자식 타이머소리... 같은?”
조금 전 제거된 클론을 쳐다보는 스튜어트의 시선과 곧 이어진 굳은 표정을 보고 짐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그 와중에도 아이솔레이션 탭을 던지는 스튜어트에 대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짐은 재빨리 옆에 조금 패어진 구덩이를 향해 최대한 낮게 몸을 날렸다.
“삐이이이이이-, 쿠쾅~.”
뜨거운 초록의 불길이 뭉쳐진다 싶더니 반대편으로 쏠리는 느낌과 함께 큰 충격파가 밀려왔다. 그 때문에 짐 킴은 더 이상 생각이란 놈을 자신의 뇌에 담아두지 못했다.
[2039년 4월 22일 10시 22분 군사지구 내 비밀본부 응급처치실]
짐은 주변의 빛이 인식되며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는 걸 느꼈다. 하지만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아직 눈을 뜨지는 않았고,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 차 잠시 꼼지락대는 것이 전부였다.
“트리아졸람보다는 상담을 통해 심신 안정을 갖게 하는 것이 우선이...”
조금은 먼 곳에서 들리는 듯 느껴지는 소리로 판단하건대, 이곳은 안전한 곳이라 생각되었다.
두 사람 이상의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그들은 짐과 제법 떨어진 곳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비슷한 시기.... 실려... 확... 되네요.”
“동시라니? 이 자체가... 스럽지... 습니까? 어쨌... 유전... 조... 필요하... 최대한 빨... 탁드려... 펠츠... 령입니...”
“그건... 이해 하... 무조건 의... 다니요?”
심각한 내용이라고 생각한 짐은 깨어났다는 표시를 내지 않고, 그쪽으로 신경을 집중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이 모두 들리진 않았지만, 대충 이해가 갈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로 판단해보면, 그 둘은 닥터 몰리와 버두고 소령일 가능성이 컸다.
“... 확인... 꼭 필... 니다. 클... 능성이... 있...까요.”
멀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없었던 일처럼 사라졌다. 묘한 감정이 짐의 손끝에서 발끝까지 안개처럼 퍼져갔다.
‘유전자 조사라... 클론일 가능성을 확인한다는 거 같은데?’
심각했다. 뭔지 모르지만 자신의 안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정보를 엿들은 것이다. 예리하기라면 손에 꼽힌다는 버두고 소령의 당부가 닥터 밀러에게 있었다고 본다면, 아주 심각한 것이다.
짐은 두근대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깊고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2039년 4월 22일 16시 19분 군사지구 내 비밀본부 응급처치실]
15시 30분경 로버트가 응급처치실을 나간 걸 확인 후, 짐도 방금 의식이 깬 듯 행동했다. 이윽고, 20분에 걸친 버두고 소령과의 집요한 면담 후, 퇴원해도 좋다는 닥터 몰리의 말이 있었다. 또 그러자마자 짐에게 새로운 임무도 떨어졌다. 즉시 브리핑실로 오라는 전언을 들은 짐은 조용히 응급처치실로 돌아와 소지품을 챙겼다.
스튜어트는 여전히 잠자듯 누워있었지만, 마침 모하메드는 방금 깨어난 듯 일어나 앉아 있었다.
“살아 있으니 좋으냐?”
“크흐흐-.”
짐이 일부러 비꼬듯 묻자 모하메드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대답을 대신했다. 짐은 그런 모하메드의 표정과 얼굴을 보며 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적어도 넌 확인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네.”
그 말에 모하메드는 무슨 뜻이냐는 듯 고개 갸웃거렸지만, 짐은 자신이 들을 바에 대해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니, 꺼낼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짐의 입장이었다.
눈치 빠른 모하메드가 자신이 말에 잠재적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짐은 입을 다물고 브리핑실로 향했다.
“작전 가냐?”
짐은 의미 없이 묻는 모하메드의 말에 돌아보지 않고서 가볍게 손을 들어 긍정을 표현했다. 모든 것이 명확하고 확실한 것이 좋아서 GPS 기술을 익혀왔는데, 정작 지금은 그런 기술 따위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확실한 것 없이 애매한 추측만 남은 상황이 브리핑실로 향하는 짐의 발걸음을 조금 더 무겁게 했다.
[2039년 4월 25일 05시 17분 상업지구 내 지하철역 근처]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입구는 내려앉은 시설물로 인해 막혀있고, 지지대 역할을 하던 굽혀진 철근들이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오히려 지하철역으로 가려면 그 옆에 커다랗게 뚫린 벽을 통해 들어가는 게 나았다.
그 구멍 옆에는 플랫폼으로 이용되고 있던 부분들이 부분부분 바닥이 깨어지고 꺼져있어 마치 지진이라도 겪은 듯 난잡한 모양이었다. 그마나 멀쩡한 것은 지하철 선로였는데, 어차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엔 제대로 복구된 곳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도 복구하다가 만 듯해서 지하는 암흑으로 뒤덮여 있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역 근처에서 상가를 형성하고 있던 건물들이 대부분 파괴된 채이긴 해도, 일부 건물 벽과 꺼진 도로 등이 훌륭한 위장물과 엄폐물이 되어 주고 있어 작전에 용이하다는 것이었다.
“위잉~ 츠카갸갹~.”
희미하게 밝아져오는 새벽의 조명 아래, 짐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작동되는 서클커터로 방금 쓰러트린 클론의 척추에서 칩을 빼내었다. 클론들이 점점 개량되고 있는 지, 아님 원래 그런지 이번 클론은 좀처럼 칩을 꺼내기 힘든 구조였다.
‘이런 칩이 있다는 건, 모든 클론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는 건데...’
짐은 칩을 맥거핀에 꽂아 분석하는 중에도 주변을 탐지하는 걸 게을러 하지 않았다. 또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건대 뭔가가 엄습하고 있다는 감이 와서 상황을 유추하느라 분주했다.
‘확실한 건 이들이 NBSA 요원을 대상으로 클론화를 시도했다는 것과 앞선 방식보다 어려운 이 방식을 시도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는 거잖아. 그게 뭘까?’
생각을 멈출 수 밖에 없도록 주변에서 조심스런 발걸음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스사사삭, 사박-.사박-.”
짐은 재빨리 체열방사캡슐을 주변에 뿌렸다. 혹여나 체열감지기로 주변을 탐사하더라도 여러 명이 있는 것처럼 꾸밀 필요도 있고, 특히 찰나의 판단이 중요한 상황에서 체열방사캡슐은 주의를 돌리는 데 효과적인 도구였다. 유일한 단점은 작동 시간이 짧다는 것일 뿐.
짐은 저스트와 EMP-B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소형 드론형 정찰기를 공중에 띄워서 주변을 탐지했다. 포지션 스캐너를 쓴다면 더욱 정확히 다가오는 놈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테지만, 적도 비슷한 장비를 사용하고 있을 경우, 오히려 자신의 위치가 쉽게 노출될 것이 자명했다.
2시 방향으로 10여미터 지점에 2명의 사람이 체열방사캡슐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동작을 보건데, 훈련을 받은 전문적인 움직임이었다.
“틱-. 틱틱-.”
극소의 신호음을 내며 저스트를 작동시켜서 그들이 있는 곳에 정확히 던졌다.
“찌이이이이이잉-.”
저스트는 특유의 고주파 소리를 내며 작동을 시작했다. 그러자 그 두 명은 귀를 틀어막고 소리를 지르면서 괴로워하다가 쓰러졌다.
“엇? 사람이었네?”
저스트는 고주파음으로 인체에게는 고막과 뇌에 영향을 주거나, 전자장치일 경우엔 장치에서 나오는 주파수와 동일화하며 그 장치에 과부하를 주어 파괴하는 무기였다. 이로 보건대, 지금 공격당한 두 명은 클론이 아니라고 짐은 판단했다.
더 이상 주변에서 들리는 인기척이 없자, 짐은 그 둘을 향해 다가갔다. 1미터를 앞두고 보니, 그들의 귀에서는 피가 난 흔적이 없었다. 아차 싶은 순간, 갑자기 그 두 명이 몸을 순식간에 돌리며 자세를 잡더니 플라즈마식 총을 겨누었다.
짐은 지금 피한다고 해도 영락없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캉~.”
그 순간 한 발의 총성과 그 두 명의 머리에 파고드는 발사체, 그리고 터져 나오는 피의 분수. 울리는 총성으로 판단하기로는 틀림없는 NBSA 장비의 레일건 소리였다.
“크크, 바지에 지렸지?”
인이어 장비에서 들리는 허스키한 음성이 앞으로도 이렇게 반가운 적은 없을 거라고 짐은 생각했다.
“신세졌네.”
“뭐, 나도 손해 본 건 아니야. 네 덕에 내 갈 길 잡았거든. 흐흐.”
“무슨 뜻이야?”
짐 킴은 순간적으로 모하메드의 대답에서 일전에 응급처치실에서 무심코 자신이 던졌던 말에 대해 뭔가를 알아챘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 어쨌든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땡큐~.”
솔직히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짐으로서는 모하메드의 기분 나쁜 웃음이 의외로 반가웠다. 그리고 역시 세상은 오래 살 가치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4시 방향, 3명 접근. 이탈 요망.”
또 다른 목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마치 말하고 싶지 않은 듯 불필요한 군더더기 없는 간결하고 무뚝뚝한 말투. 로버트, 그도 이 지역에 있었다.
적들이 계속해서 오고 있다는 정보에 짐은 쓰러진 클론에게서 칩을 찾는 걸 포기했다. 신속히 시선은 4시 방향으로 유지하면서 벽이 있으면서도 구덩이가 패여 있는 쪽으로 몸을 밀착시켰다.
아까 띄워두었던 소형 드론형 정찰기는 클론이 죽은 자리에서 여전히 주변을 비춰주고 있었다.
“근데 왜 이렇게 모인거야?”
짐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말이야. 워낙 중요한 사항인지, 나까지도 긴급 명령으로 부르더라고.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중요한 작전이라나? 좀 피곤하지만 그래도 이 몸이 직접 올 수 밖에. 그나저나 모하메드 아니면 넌 오늘 이미 죽었다. 근데 그거 알아? 클론의 정확한 위치 잡아준 건 이 몸이라고. 내게도 감사해. 당연하게도 말이야. 그나저나...”
쉬지 않고 들려오는 언어의 연발탄.
“넌 좀...”
짐이 시끄럽다고 말하려는 찰나,
“그만.”
로버트의 간결한 목소리가 스튜어트의 말을 단박에 갈랐다. 스튜어트도 로버트의 깔끔함(?)에 길들여졌는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어찌나 효과가 빠르던지 순간적으로 짐은 스튜어트가 로버트에게 없던 약점이라도 잡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39년 4월 25일 06시 24분 상업지구 내 지하철역 근처]
환하게 밝아진 아침의 기운이 주변을 따뜻하게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은 선선한 공기가, 지구에 드리워진 암울한 미래가 긴장을 풀게 하지는 않았다.
“놀라운데? 이런 곳에 아직 제로모늄 제조 시설이 남아있다는 게?”
스튜어트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말을 꺼내었다. 추가로 떠들어댈 것이 뻔히 예상이 되는지라 짐이 먼저 말을 이었다.
“급하니까 정보를 풀었군. 이걸 못 지키면 희망이 사라지는 거군.”
로버트도 한 마디 보태었다.
“추가 시설이 예...”
“내 생각도 그래. 이 한 곳만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네. 우리에게도 보안이 걸린 걸 보면, 뭔가 더 있는 건 확실하지? 그렇다면 어딜까? 내가 보건데 말이야...”
스튜어트가 안 그래도 말이 짧은 편인 로버트의 말을 자르며 들어가자 모하메드가 한 마디 보태었다.
“닥쳐!”
“알아, 알아. 닥칠게. 근데 내가 어제 뭔갈 하나 주웠거든? 그걸 분석해보니까 그 뭐냐...”
“닥치라고!”
모하메드는 급기야 PK-5를 꺼내어 스튜어트를 겨누었다. 그러자 스튜어트는 장난스레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오른손을 들어 PK-5의 총구 감싸 쥐더니 여전히 장난끼가 낀 톤으로 울먹거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중에 클론이 있을 수 있다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지? 서로를 의심해야하는 거지. 그렇다면 우리 팀은 이미 해체된 거나 다름없어. 서로 믿을 수 없다고!”
스튜어트의 시작하는 말은 장난이었지만, 마지막 말은 장난기가 빠진 외침에 가까웠다.
“심지어 성격이나 기억까지도 이식되었다면 믿겠어?”
“오케이. 접수.”
이후 로버트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다들 더 이상의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각자의 맥거핀으로 이리저리 정보를 찾는 척 시간을 끌었을 뿐. 그건 짐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할 듯도 한데, 서로가 의심되는 상황에서 협력이나 공동의 의미가 사라진 지금, 그다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어느 새 태양은 한 때 지구의 랜드마크였던 최첨단 드로이언 백화점의 부서진 잔해의 끝에 걸치고 있었다.
“삐익-, 긴급 지령 하달합니다. 공업지역 내 녹턴 반도체공장 집결. 작전명 아임파인. 브리핑은 전송자료로 대체.”
“삐익-, 긴급 지령 하달합니다. 주택지역 내 서민 아파트 테러 발생. 작전명 가디언. 브리핑은 전송자료 참고.”
“삐익-, 긴급 지령...”
갑자기 인이어를 통해 각자에게 임무가 전달되었다. 어색함을 떨치려는 듯 모두들 분주하게 움직이며, 위치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짐은 자신도 출발하기 직전에 단거리 통신으로 모두에게 자신의 말을 전달했다.
“일단 지구를 지키자고, 그래도 우린 팀이지 않아? 적어도 살아남으려면 말이야.”
“라저!”
“크크흐-.”
“지구를 지키자라니, 풉. 뭔가 유치하지만, 나도 동의해~. 뭐, 일단은 애써보자고. 자자~ 살아남자고~.”
누구의 말인지 뚜렷이 구분되는 답을 들으며, 스스로를 납득시킨 짐은 제로모늄을 채운 바이크 크래프트의 시동을 걸었다.
“위이잉~ 큐웅~.”
먼지를 흩트리며 바이크 크래프트의 엔진이 과열되고, 엄청난 추진력에 비해 비교적 조용한 소리를 내며 큰 도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늘 명령을 듣고 움직여왔다. 우습게도 지금에 와서 내가 누구냐?는 철학적인 고민을 하게 되다니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답 없이 복잡하면서 번잡스럽고 낯선 생각들도 엔진음을 타고 줄기차게 따라오는 듯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