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정리의 즐거음에 대하여
(뻘글 주의)
지난 금요일에는 모처럼 배우자에게 허락을 받아 퇴근 후 실컷 게임을 할 수 있었습니다. 꼭 해보고 싶었던 아컴호러 카드게임도 처음으로 해보고, 친구들에게 에이언즈 엔드도 가르쳐줘보고, 하나비, 렉시오, 마이티도 돌리고 꽤 알차기 보내긴 했어요.
하지만 저는 어쩔 수 없는 유로충... 유로게임을 하나도 못했더니 주말 내내 다시 몸이 근질근질 하더라구요. 하, 아무리 피곤해도 버밍엄 한 판 돌렸어야 했는데. 물론 버밍엄이나 가이아나 그웨트를 했더라도 몸이 근질근질한 건 같았을 거 같긴 합니다...
일요일 저녁 쯤 되니 게임을 만져라도보고 싶어서 보드게임 책장을 쓱 살펴봤습니다. 처음 책장을 들일 때는 그래도 빈칸이 절반쯤 되었었는데 이제는 빈칸이 거의 사라진,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운 게임 책장을 보며 아직 뜯지 못한 게임이 이렇게도 많구나. 어서 박스 바깥 공기를 맡게 해주어야 하는데, 에버델 미안해, 뜯어주지 못해 미안해! 하며 밀봉된 박스 속 미플들에게 위로를 한 마디 건넸습니다.
그래, 오늘 뭐라도 하나라도 정리를 해보자! 무엇을 정리할까 한참을 살펴보았습니다. 에버델은 그냥 수정 카드 덱 올 때까지 기다리자 패쓰, 아를은 친구가 룰을 익했다고 했으니 그 친구에게 배울 때까지 패쓰, 당분간 비보드게이머들에게 영업할 기회는 없으니 포르토도 패쓰, 중고로 구해 놓은 에머라의 왕관이나 블랙엔젤은 이제 좀 화제성이 떨어졌으니 패쓰. 이거도 패쓰, 저거도 패쓰 하다가 눈에 들어온 건 작년 말 코보게 할인마에 당한 리프트오프였습니다.
항상 정리하던 패턴대로 아랫면과 뚜껑 사이에 벌어진 네 틈을 따라 칼로 오려낸 뒤, 매직테이프로 비닐을 뚜껑에 씌웠습니다. 그리고 룰북 초반부를 보면서 구성품을 확인해가며 펀칭을 진행합니다. 오호, 이렇게 이렇게는 개인용 백에 담아야겠군, 이렇게 이렇게는 같이 소스통에 넣어야겠군, 이건 공용 지퍼백으로, 이건 소스통에 나누어서 착착착. 룰북을 보면서 펀칭 컴포와 미플 정리를 마친 뒤, 이제 남은 카드들을 봤습니다. 슬리브가 생각보다 많이 필요하겠네, 라고 생각하며 슬리브 박스를 열었죠.
그런데 이전에 이렇게 저렇게 배송비 아끼려고 사놨던 슬리브들이 정리가 안 된 상태로 수 십 봉지가 섞여있는 걸 보니, 아, 이거부터 정리를 해야겠구나 싶었습니다. 사이즈별로, 업체별로 골고루 사기도 샀구나, 생각하면서 사이즈별, 업체별로 모아 큰 지퍼백에 모아넣다보니 역시 제일 많이 산 건 5890과 6091 사이즈더라구요. 한 열 봉지씩은 있던데, 싹 정리해서 틴케이스 박스에 차곡차곡 넣으니 또 그 만족김도 꽤 괜찮았습니다.
이제 리프트오프 카드들을 한 장 한 장 씌우며 카드들을 빠르게 훑어봤죠. 음, 4단계 미션에 가면 점수 뻥튀가가 엄청 되는구나, 이건 룰 설명할 때 꼭 카드를 보여줘가며 설명을 해줘야겠다 생각하며 대충 한 삼백 장은 넘어 보이는 카드들 다 씌웠습니다.
이제 차곡차곡 정리된 컴포들을 박스에 담고 보니 의외로 러시안 레일로드가 떠오르더라구요. 아직 플레이도 안 해봤고 룰북도 쓱 한 번 읽어본 게 다지만, 박스 내부 생긴 거도 러레와 똑같고, 후반에 가서 점수 뻥튀기 되는 느낌도 그렇구요. 비록 근질근질하던 유로게임을 하지는 못 했지만, 그리도 러시안 레일로드 바로 옆에 정리된 리프트오프를 꽂아넣고 보니 괜히 만족스러웠습니다.
이게 뭐라고 보람도 있고 심지어 재미도 있네요. 친구들에게 말로는 슬리브 씌워주는 도우미가 있었으면 좋겠다, 룰 익혀서 가르쳐주는 도우미가 있었으면 좋겠다 투정하지만, 정리하고 룰을 읽는 것 자체에서 재미와 만족이 있다는 걸 이제 부정하진 못하겠네요.
청소와 정리정돈할 때 행복을 느끼는 빅뱅이론의 쉘든이나 프렌즈의 모니카를 보면서 저런 특이한 사람들이 있나 했는데, 이제는 그들이 얼마만큼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