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사는 게임의 진정한 승리에 대하여
(뻘글 주의)
언제나처럼 보드게임에 대한 갈증은 한여름만 같고, 물 한잔 마시지 못하는 카탄의 길잃은 항해사처럼 오늘도 저는 망망대해에서 표류 중입니다. 내게 물... 물과 같은 게임할 시간을 달라...
어쩔 수 없이 전 바닷물을 마시듯 게임을 삽니다. 보드라이브를 보니 쿠스코 게임이 너무 예쁘군. 이런 색감의 게임도 하나 집에 두면 예쁠 거 같아. 가보진 못했지만 포르투가 그렇게 여행하기 좋다는데 게임으로라도 구경을 해야겠어. 비보드게이머 친구들을 위해서 너도나도파티랑 디크립토 확장도 미리미리 준비를 해놔야지.
보드게임을 구경하고 골라서 구매하는 거 자체가 하나의 게임이라는 건 이미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소된 갈증은 금세 다시 갈증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내가 우리집의 주인인지 책장에서 무한증식하는 보드게임이 주인인지 모를 지경이 되고 말죠.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 게임을 사기만 하는 것은 게임 사는 게임에서 지는 게임을 하는 것이다. 게임을 사는 게임에서 이기려면 게임을 잘 사야 한다...!
게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투입 자원 대비 액션의 효율, 그것은 진리. 네, 바로 좋은 게임을 싸게 사야 게임 사는 게임에서 이기는 거였던 것입니다. 중고장터에서 사실 천원 이천원 아끼는 게 얼마나 가계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택배비 포함 불포함이 술집에서 맥주 500 한 잔 마시고 말고 하는 돈인데, 택배비 한 두 번 아낀다고 아파트 평수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하지만 게임 사는 게임에서는 이게 바로 이기고 지는 느낌인 거 같습니다. 시세가 5만원인데 택포 5만원이라고? 어맛 이건 사야 된다. 사면 내가 이 게임과 나와의 게임에서 이기는 거다! 그렇게 저는 사자마자 노플로 9.5만원에 팔았던 이스케이프플랜을 최근에 6만원에 다시 샀고, 시세가 6만원은 하는 트라야누스를 직거래로 5.5만원에 샀습니다. 심지어 저는 도미니언 본판과 장막과 아그리콜라를 다 합쳐서 6.5만원에 산 사람입니다...! 이 정도면 게임 사는 게임에서 고인물급이라 자평합니다...
그런데 오늘, 여느 때처럼 중고장터를 유유히 항해 중이었는데 자주 검색해보던, 시세 5만원의 게임이 택포 4.8만원에 올라왔습니다. 아니 이것은 택배비 감안하면 시세보다 7천원이 싼 것...! 오늘도 나는 이렇게 승리자가 되는 것인가 했죠.
그런데 오늘따라 갑자기 지난주가 떠올랐습니다. 어쩌다보니 택배 4개가 하루에 한꺼번에 왔는데, 그걸 배우자가 받았거든요... 배우자 눈치도 눈치지만 또 책장에 너무 노플 게임이 많아지는 현실이 불현듯 저를 현자로 만들었습니다. 중고 컴포만 확인한 다음 박스도 안 열어본 셰익스피어와 촐킨과 리스보아와 트릭케리온 및 아예 밀봉으로 쟁여놓은 다른 아이들이 떠올랐죠.
그렇게 저는 오늘 중고장터에서 본 그 게임을 안 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안 사기로 마음을 먹고나니 엇 이건 뭐지, 이게 찐엔딩인가, 이번에야 말로 내가 진짜로 이긴 것 같아...! 그 동안 이겨온 건 진짜 이긴 게 아닌 것만 같아...!! 뭐랄까, 게임을 싸게 샀을 때는 겨우 겨우 억지로 문화 올려서 찰리채플린으로 3점차 승리를 한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보기포 두 세트에 전투기까지 올렸는데 간디 집어서 아무도 안 때리는 관대함으로 이긴 느낌이랄까요...
그래, 이것이 게임 사는 게임의 찐엔딩이다. 진정한 승리다... 이 마음의 평화가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으나, 오늘만은 이 승리감을 만끽하려 합니다. 이러다 처칠에 두드려맞는 날도 오겠지만, 명예롭게 패배하는 날도 오겠지만, 오늘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기분을 만끽하겠습니다. 집에 가서 배우자에게 자랑해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