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전쟁" - 팍스 르네상스
글을 잘 못 쓰기도 하고, 잘 안 쓰는 데, 간혹 "캬아~ 이 게임은 꼭 리뷰를 써보고 싶다!"하는 보드게임들이 있습니다.
'하이 프론티어'가 그랬고, '앤티쿼티'가 그랬었죠.
이런 게임들은 대체로 저에게 보드게임 그 이상의 경험을 선사하는 게임들입니다.
'하이 프론티어'는 미지의 우주로 더 나아가고 싶은 인류의 호기심과 탐험심을 간접 체험해볼 수 있었고, '앤티쿼티'는 중세 시대 척박한 땅에서 개척하고 살아가는 혹독한 농노의 삶을 느껴볼 수 있었죠.
게임의 승패를 떠나 한 세계관에 몰입하여 그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다가 빠져나오는 듯 한 체험을 하게 해 준 게임들이었습니다.
'팍스 르네상스'도 그런 게임들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게임은 역사 문외한인 저로서는 배경 지식도 별로 없고 이런 류의 역사 게임들을 해본 경험이 많지 않아 섣불리 리뷰를 쓰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럼에도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것은 이 게임의 플레이 경험 역시 보드게임 이상의 무언가를 주었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네요.
때는 2023년 1월, 겨울 날씨답지 않게 따뜻했던 어느날. 연남동의 한 보드게임 까페.
역사하면 근현대사 보다 우주 전쟁사(?)에 더 관심 많은 뼛속까지 이과인 저는, 그곳에서 따뜻한 남방에서 온 귀인 "별밤"님으로부터 한 게임을 배우게 됩니다.
그 게임이 바로, 르네상스 시대의 은행가가 되어 1460년부터 1530년의 유럽의 여러 나라와 권력의 흑막으로서 역사를 주무르는 "팍스 르네상스"라는 게임이었죠.
솔직히 처음 배웠을 때 이 게임, 너무 어려웠습니다. ㅠㅠ
나름 영향력 게임을 비롯해 다양한 게임을 해봤다고 생각하는데 '팍스 르네상스'(이하 팍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들은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게임들과 너무나 달랐거든요.
그간의 영향력 게임들은 내 자원을 쥐어짜서 영향력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뿌리느냐였다면 팍렌에서의 영향력은 그런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내 카드를 사용하여 기물을 보드에 놓았는데, 이것이 어느 순간 나를 향해 칼을 겨누고, 좀 전까지는 내 상인을 날린 해적인데 다음 순간에는 내 용병이 되어 나를 위해 싸우고... 이런 배신(?)과 변신의 과정이 매 턴마다 일어나 정신을 못 차리겠더군요.
그래서 게임의 반의 반도 이해 못 한 채로 첫 게임이 끝났더랬죠.
그래도 어설픈 첫 게임이었지만 유럽 대륙 보드 판 위에서 마치 살아있는 듯 움직이던 다채로운 기물들의 전쟁, 투쟁, 모략은 너무나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꿈에도 막 나올 지경으로요.
그럼 팍렌의 무엇이 그토록 저를 사로잡았을까요?
일단 차례에 개인이 하는 행동 수의 설계가 미쳤습니다.
팍렌의 메커니즘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팍렌은 시장에서 카드를 사와 자신의 태블로를 구성하고 여러 가지 승리 조건 중 하나를 달성하는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차례에 다음 여섯 가지 행동 중 "2가지"를 선택하여 수행하게 됩니다.
1. 카드 구매
2. 카드 플레이
3. 카드 판매
4. 동부/서부 무역로 활성
5. 동부/서부 활동
6. 승리 선언
여기서 포인트는 할 수 있는 행동이 '2개'라는 점입니다.
팍렌처럼 게임의 판세가 쉴새없이 변화하는 게임에서 차례에 할 수 있는 행동이 "2개"라는 것은 게임을 완전히 뒤집지도 않고, 대세가 기울었을 때도 무력하게 끌려가지도 않게 만드는 절묘한 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테면 세력이 비등할 때는 두 번의 행동을 카드 구매에 사용하여 힘을 비축할 수 있고, 급하게 손을 써야 할 때는 카드 구매 후 바로 플레이 해서 판세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게임은 승리하기 위해서 혜성(아래 왼쪽) 카드를 구매한 후 4가지 승리 조건(아래 오른쪽) 중 하나를 활성화시키고, 조건이 달성했을 때, 별도의 행동을 소모하여 승리 선언을 해야 하는데, 이 규칙 덕분에 승리 조건이 달성되면 조용히 숨죽이고 있다가 날치기로 이기는 게 안되고, 혜성 카드를(승리 조건 활성화 카드를, 게임의 끝이 다가옴을 알린다는 점에서 징조를 나타내는 혜성으로 표현한 점도 감동 포인트) 사서 내가 어떤 승리를 노리고 있는지를 상대에게 드러내야 하지요.
혜성 카드와 승리 카드
이때부터 차례에 하는 2개의 행동은, 하나는 상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데 쓰고, 하나는 나의 승기를 잡기 위해 쓰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게임의 양상이 시시각각 변하면서 막판 역전도 나오는 등 드라마틱한 장면이 많이 연출되더군요.
두 번째는 테마와 연계한 각 카드의 기능 설계가 미쳤습니다.
이 부분은 역사를 잘 아는 분이라면 더 크게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겠지만 학교 다닐 때 잠결에 들어 어렴풋이 알고 있는 저 같은 사람에게도 재밌는 카드들이 꽤 많더군요.
팍렌ver. 사랑과 전쟁
(게임에서 대관식은 일종의 결혼 행동인데, 위의 성실청 카드의 헨리 8세 기능은, 헨리 8세가 역사적으로 대단한 여성 편력과 6번의 결혼으로 유명했기에 결혼 행동 규칙을 깨버리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물을 제어하는 행동들의 설계가 초초초 미쳤습니다.
사실은 이게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인데요.
이 게임에서 보드에 놓인 형형색색의 기물들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각자 자신만의 기작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룩/나이트는 지배 계급을, 폰은 피지배계급을 나타내고, 배 기물은 용병이자 해적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각각의 기물들의 색은 해당 기물이 속한 종교를 의미합니다.
기물과 색의 의미는 단순히 상징성을 떠나 특정 행동을 할 때 어떤 기물들이 가담하고 어떤 기물들이 빠질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특히 여러 가지 전투 행동들에서 각 기물들의 기작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를테면 농민봉기라는 행동은 피지배계급과 지배계급의 충돌이므로, 농민봉기가 일어나는 지역의 폰들이 공격자가 되고 그 지역 내부의 룩/나이트들이 방어자가 됩니다.
농민봉기 (칼이 공격자, 방패가 방어자)
또 음모는 권력을 가진 지배계급과 그 권력을 뺏으려는 억압된 지배계급이 부딪히는 것으로 그 지역의 억압된 상태에 있는 룩/나이트가 공격자가 되고 지역 내부의 룩/나이트들이 방어자가 되고요.
음모
또한 종교 전쟁은 종교 전쟁을 일으킨 색의 기물들이 공격자로 가담하고 그 외의 색 기물들은 이교도로서 방어자가 됩니다.
종교전쟁
이밖에도 캠페인, 투표 등 여러 가지 행동들에서 각 기물들은 각자의 알고리듬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실제로 권력이 군중을 움직이고 여론을 형성하는 방식을 기가 막히게 담아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개인은 각자 자신만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다양한 개인을 통제하여 하나의 덩어리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권력자들에게 항상 숙제였고, 때로는 무력으로 조성한 공포를 이용하기도 하고, 또는 종교나 정치적 신념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팍렌'에서는 입체적인 개인을 한 가지 문제에 대해 투사하여 평면적인 존재로 만들어 피아를 구분하는 식으로 통제하는 거죠.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어...
다양한 입장을 지닌 고차원적인 존재일 때는 피아 구분이 안되는 기물들이, 계급이나 종교, 민족 등의 투사를 통해 단순화했을 때는 서로 간의 차이가 선명하게 부각되게 됩니다. 분할통치라고도 하고, 소위 바둑에서 말하는 갈라치기죠.
팍렌에서는 매 차례마다 이 과정이 일어납니다.
카드 원샷 하나 하나에 대해 기물들의 이합집산을 시뮬레이션하고, 이들을 어떻게 잘라 놓아야 나에게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를 끊임없이 계산하게 되지요.
제목에서 언급한 "그림자 전쟁"은 선전포고를 통한 공식적 또는 직접적인 전쟁이 아닌, 자국의 개입 사실을 숨긴 채 특정 국가의 중요 시설을 공격하거나 그 나라의 요인을 암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그림자 전쟁'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팍렌에서 플레이어가 흑막으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역사에 개입하는 방식이 그와 유사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입체적인 개인을 통제하는 방식이 한 가지 문제에 투영시켜 단순화시킨다는 점에서 마치 그림자끼리 싸움을 붙이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기물들은 종교 전쟁이든, 계급 투쟁이든 각자만의 명분을 가지고 움직이지만,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희생시키는 플레이어의 입장에서는 무엇을 기준으로 이들을 갈라 서로 대적하게 만들지가 중요하지, 어떤 대의와 명분을 갖는지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죠.
숨은 권력이 조용히 역사에 개입하는 과정을 너무나도 잘 체감할 수 있는 미친 게임 설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임 디자이너 Matt Eklund가 규칙서에 'Why Not The East?'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수록한, 왜 '이슬람의 황금기' 시대를 거친 유럽 동부과 4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중국에서는 르네상스가 꽃 피지 못했는가 하는 내용의 에세이 및 여러 각주들이, 그 주장에 대한 근거의 진위 및 동의 여부를 떠나서, 보드게이머들 사이에서 Eklund 부자의 역사관에 대한 논란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갈라치기'라는 방식이 '대립'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데 굉장히 효과적인(?) 도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죠.)
그리고 이건 좀 주관적인 영역이지만, 게임 구성물도 너무 아름답습니다. 고서에서 발췌한 듯한 빛바랜 색감의 유럽 지도, 그와 대비되는 강렬한 색채의 체스 기물들. 역사의 배후가 되어 각 세력을 제어하는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마치 유럽을 배경 삼아 한 판의 체스를 두면서 역사의 한 장을 그려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각 카드의 그림들과 플레이버 텍스트들도 여러 사료에서 가져오거나 참고한 것들이라 역사에 관심이 많다면 카드 하나 하나를 보는 맛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이ㅃ...이쁘다...(♥o♥)
마지막으로 팍렌에서 각 플레이어의 세력이 비등해서 카드 덱이 다 떨어질 때까지 아무도 승리 조건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는 태블로에 후원자 태그가 많은 플레이어가 승리하게 되는데요.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어떤 기능도 없지만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남았을 때는 평가되는 요소가 집단이나 권력이 아닌 한 개인에 대한 '후원'이라는 점에서, 개인에서 시작하여 파벌이 되었다가 다시 개인으로 되돌아 오는 과정이 인간 중심 철학으로 회귀하자는 '르네상스' 정신을 표현하는 것 같아 이런 디테일한 설계 또한 흥미롭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팍렌의 매력 포인트들은 지극히 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부분이지만, 카드 드래프트를 하고, 개인 태블로를 빌딩하는 부분도 여타의 유로 게임 이상의 재미를 주고, 매 게임마다 170장 정도의 카드에서 일부만 사용되기에 리플레이성 또한 훌륭한, 객관적인 지표에서도 좋은 게임임에 틀림없습니다.
독특한 기물 사용법 때문에 규칙 습득 난이도가 좀 있는 편이긴 하지만, 테마와 연결하여 한 번 익히고 나면 그 복잡한 사용법마저 기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테마 구현의 장점으로 와닿게 되죠.
그래서 결론은....
팍렌 천국! 불신 지옥! (이라는 갈라치기로 마무리ㅋ)
ps: 이 글은 역사 문외한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리뷰이므로, 메디치 가문 이야기를 비롯한 다양한 배경 지식 및 게임 메커니즘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 글을 읽고 싶으신 분은 아래의 별밤님의 멋진 리뷰로!
[리뷰] "팍스 르네상스"에 대한 생각들 written by 별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