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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식인가 클래식인가 - 어콰이어 이야기
1. 보드게임의 세계로 인도하다
나와 이 게임과의 인연은 꽤 먼 시절로 돌아간다. 때는 2000년대 초반, 국내에 보드게임방이 유행을 탈 무렵 넥슨에서는 보드게임 사이트를 운영한 적이 있었다. 바로 그 이름도 생소한 루비콘.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그 사이트에서는 A&A라든지, 푸코라든지 이런저런 유명 게임들의 동영상 룰을 배포한 적이 있었다. 내가 보드게임을 해봐야 반지의제왕 대결이나 벌룬컵과 같은 몇몇 유명 캐주얼 게임들만 접했었는데. 여튼 그 사이트의 동영상 덕분에 룰을 익혔던 보드게임 중 하나가 바로 어콰이어였다.
뭐야, 주식? 합병? 내가 알던 부루마불의 호텔체인 영역을 벗어나는 게임이었다. 와, 재미있겠다! 그런데 당시에는 내가 할 방법이 없었다. 이 게임을 같이 하자며 끌고 갈 만한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2인이 할 만한 방법을 만들어 낸 후에, 당시 여자친구를 설득해 보드게임방으로 데려가는 데 성공했다. 당시 보드게임방은 노래방처럼 책자 같은게 있었는데, 거기에 게임을 메뉴처럼 고를 수 있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책자에는 대개 쉬운 카드게임이나 파티게임이 구비되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수요 또한 그런 게임들이 대부분이지 않았을까. 적어도 90퍼센트는 상회했으리라.
그럼에도 당시의 치기 어린 나는 어콰이어 주세요를 외쳤다. 지금 생각하면 이렇게 깔끔하고 쉬운 게임이 또 없지만, 그때만 해도 이 게임은 보드게임방이 가진 난이도 별 다섯개 짜리 어려운 게임에 속했던 것 같다. 알바분이 난색을 표하셨던 얼굴이 아직도 선하다. 그 시절 보드게임방은 손님이 일단 고르고 알바분이 룰을 알려줘야 했기 때문이다(요즘도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는 제가 룰 알아요, 걱정 마세요. 라고 알바분까지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보기만 해도 늠름한 어콰이어)
처음 받아본 어콰이어. 만지기만 해도 도파민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와 이게 그 게임이구나. 주위에 보드게임하는 사람 하나 없던 시절, 가난한 학생 신분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6만원대 보드게임을 덜컥 사기도 참 어려웠는데, 이걸 진짜로 해보다니. 둘이서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에 상대방은 과연 재미있었을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마냥 좋았다. 세상에 이런 게임이 있단 말이야? 지금에야 기꺼이 모르모트가 되어주었던 당시의 상대방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2. 어콰이어를 어콰이어 하다.
조금씩 다른 게임을 접하며 보드게임이 무엇인지 알아가던 나날, 어콰이어의 단종소식을 접했다. 어어 하는 순간부터 가격은 점차 올라가기 시작했고, 이게 맞는 가격인지도 모를 정도까지 치솟고 있었다. 처음 이 게임을 접했던 당시의 가격도 비싸다며 벌벌 떨던 시절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렇게 오래도록 어콰이어를 사지 못한 찜찜함이 남아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콰이어의 신판이 나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가격도 현저히 낮아졌다. 플라스틱이 종이로 바뀌었다는데 뭐, 큰 상관 있을까? 지금은 좀 덜한 편 이지만, 나는 컴포넌트가 어떤 재질인지에 대해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뭐, 게임 하는 방법만 그대로 재미있으면 되지.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염원했던 게임을 드디어 손에 넣는 순간이었다.
(어콰이어를 구매하다)
그런데 함께 즐기던 몇몇 사람들로부터 손맛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어차피 같은 게임인데 왜 그러지? 사람들도 외면하고나니, 나도 뭔가 꺼림직한 기분이 들었고, 나 또한 조금씩 즐기다보니 그제야 조금씩 감을 잡기 시작했다. 아, 손맛이 없어졌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알겠다. 손맛도 없었지만, 플레이하며 느끼는 볼품도 없어졌구나.
이제 어콰이어는 내 손을 떠나게 되었다. 재판의 컴포넌트 구성 때문인지 이제는 정말 구하기 힘들어진 플라스틱제 어콰이어. 하지만 내 손에 없어도 간간히 즐길 수는 있었기에 막 아쉽지는 않았다. 가지고 계셨던 다른 분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예전부터 운영하던 보드게임방이라면 이 게임이 하나씩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 정도면 족하다. 좋은 게임이지만 굳이 수십만원을 들여가며 사고 싶지는 않다.
(어콰이어 종이판.)
3. 주식 테마의 게임?
1960년대 작품이니만큼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시리라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모르는 분들이 있을 수 있으니 설명을 약간만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 타일 놓고 주식 사고 타일 먹기. 이 게임에서 내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기본 매커니즘은 이게 전부이다. 그렇게 타일을 놓다보면 회사가 설립되고, 합병되는 상황이 간간히 발생한다. 그때 회사의 가치(연결된 타일의 개수)에 따라 흡수될 회사가 결정되고, 흡수되는 순간 대주주 및 차주주는 차등하게 보너스를 받게 된다. 이런 식으로 게임이 계속 진행되다 더 이상 타일을 놓을 수 없거나 41개의 타일이 연결된 거대회사가 나타나 종료 선언을 하게 되면 게임을 종료하고, 주식의 현재가격과 현금자산을 합한 총자산으로 승부를 가리게 된다.
사실 게임 규칙 등은 워낙 훌륭하신 분들이 잘 정리해 둔 것도 많고, 자료도 상당히 있기 때문에 룰을 익히기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까놓고 말해 모임에 상주하시는 올드 보드게이머 한 분께 어콰이어 알려달라면 알려주실 만한 분들도 참 많을 것이다.
(게임 중 설립되는 일곱개의 회사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image/83300/acquire))
어찌보면 단순할 것 같은 이 게임, 그런데 플레이어 간의 격차는 어떻게 생기는 걸까. 일단 모든 게이머가 초반에는 비슷한 방향으로 주식을 손에 쥐겠지만, 게임이 진행될 수록 점차 다른 주식에 손을 대게 된다. 그 이유는 설립자 보너스라는 주식 1주의 마법 때문인지도 모른다.
회사가 합병되는 순간 흡수되는 회사의 대주주와 차주주는 보너스를 받게 된다. 그런데 처음 보너스로 주어지는 주식 1주 때문에 후발주자가 꼬박꼬박 동일한 주식을 사더라도 설립자 양반이 대주주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같은 돈을 투자했다 하더라도 대주주 비해 턱없이 적은 돈을 만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 뿐 아니다. 게임을 진행하다보면 필연적으로 타일이 이어져 회사 가치가 불어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초반에 주식을 산 A군보다 나중에 사는 B군이 더 비싼 가격으로 주식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에라, 차라리 내가 회사를 설립하고 만다! 라고 외치고는 손을 뗄 수도 있다.
(박스의 아저씨처럼 회사는 내 손으로 세운다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image/303/acquire))
초반에는 누구나 자신이 대주주가 되기 위해 열정적으로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초반에는 총알 장전(?)을 위해 합병 당하는 회사의 대주주인 것이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발전된 회사의 주식을 다량 보유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이 게임은 언제, 어떤 회사를, 얼마의 가격으로 매수하고, 어느 타이밍에 손을 떼는지가 상당히 중요하다.
야수의 심장을 달고 주식을 매수하다, 미련없이 돌아서라. 보드에 주식의 가치를 판단하는 매의 눈빛들이 아득하다.
4. 본격 M&A 게임
지금 설명으로도, 회사의 가치가 오르고 합병하는 게임인 건 알겠다. 근데 주식 가치는 언제 떨어지는 거지? 맞다. 이 게임의 정상적인 타일놓기 구도 하에서는 주가가 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아니, 주식 게임이라매? 주식의 등락이 없는데 어떻게 주식 게임이야? 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예전에 들었던 이런 저런 썰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60년대 초반까지 조금의 부침은 있었지만, 미국이 지속적인 호황을 맞았던 시기와 이 게임의 출시 시기가 비슷하기 때문에 주가의 폭락을 반영하지 않았다 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다른 예를 들어 80년대 오일쇼크를 겪은 후 출시되었던 샤크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출시된 블랙 프라이데이는 주식의 폭락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기도 하고 말이다.
(보드게임 샤크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image/6112/shark))
덧붙여 이건 사견이지만 애초에 이 게임은 주가로 자산의 가치가 정해질 뿐, 게임의 테마 자체는 M&A에 더 가깝다. 블록의 배치로 회사의 성장이나 미래가치를 보고, 그 이후 해당회사에 투자하거나 합병대상이 될 회사를 판단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파란 불을 켜고 주가를 내리는, 어찌보면 쓸데 없는 잔룰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게임 내에서는 주식의 매도 타이밍도 자유롭지 않고 현재의 주식이 가장 싸니까, 주식을 살 수 있는 한 마구 사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보통은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게임 내 보유자산은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나 혼자 생각없이 주식을 사서 백원 올랐는데, 남들 모두 다른 주식을 사서 2백원 올랐다면 나는 백원을 잃은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어떤 주식을 사는지는 게임의 승패를 판가름하는 데 엄청나게 중요한 요소가 된다.
게다가 이 게임에서 주가의 하락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합병된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겠다고 결정한 경우, 게임 종료까지 그 회사가 재설립되지 않는다면 처분하지 않았던 주식은 말 그대로 휴지조각이 될 것이다. 만일 재설립 된다 해도, 이전의 가치가 얼마였든 그 주식은 현재 기업의 가치로 평가되니 분명히 그 주식은 이전과 같거나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이렇듯 이 게임은 꽤 단순해 보이지만, 의외로 여러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플레이어가 능동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타일 놓기가 상당히 중요해진다. 내 손에 쥔 6개의 타일 중 어떤 것이 전략적으로 유의미한 타일인지 파악하거나, 아껴두었다 터뜨려야겠다는 결단까지. 생긴건 퍼즐 게임 같은데, 요상하게 테마가 느껴지는 게임이다.
5. 어쨌거나 올드한 게임
위에서 이 게임에 대한 환상과 멋진 말을 잔뜩 늘어놓았지만 현재의 내가 바라보는 시선은 좀 더 차가워졌다. 나는 가끔 게임을 평가할 때 지극히 주관적인 재미라는 요소를 들기도 한다. 이 요소는 정량화 할 수도 없고, 어느 부분이 재미있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나 같은 경우는 재미를 수치화 하기보다는 최대한 상황과 재미 포인트를 글에 풀어 담아두려 한다. 그게 쉽지 않은 건 큰일이지만.
(이렇게 예쁜 게임인데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image/1330300/acquire))
예전에도 몇 번 언급한 적 있지만, 게임이 잘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게임이 재미있다는 감정은 다르다. 그에 빗대어보면 이 게임은 잘 만들어졌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재미있느냐? 이 가치를 논하려면 모든 보드게임과 마찬가지로 함께하는 사람들, 분위기, 컴포넌트, 당시의 상황 등 게임 자체 이외의 변수들도 마구잡이로 등장한다.
나는 이 게임에서 극과 극을 체험했다. 처음 이 게임을 만졌을 당시의 내가 느꼈던 도파민 샤워와, 훗날 이 게임을 다시 즐겼을 때 냉랭했던 친구들의 반응. 그래서 이 게임의 재미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누군가는 정말 재미있었을 수도 있고, 세상 따분한 게임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당시 나의 기억을 종합하여 변수를 최대한 제거해보자. 당시의 설레는 마음이나 다른 환경 변수를 지우고 돌아보면, 내가 생각하는 이 게임의 순수한 재미는 중간에서 약간 상회하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럭저럭 할 만한 게임.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내가 내린 이 평가에 두 가지 항목을 더 넣어야 한다고 본다. 첫번째로 이 게임이 가진 볼륨과 가격. 이 정도 재미를 주는데 저만한 박스를 툭 가져와서 세팅할 볼륨이라면, 글쎄. 그에 더해 프리미엄이 얹혀 고공행진을 하는 가격이라고? 어휴, 차라리 다른 요즘 게임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요즘 게임. 사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다. 어콰이어와 최근 발매되는 다른 게임과의 상대적인 재미를 비교한다면 어떠할까. 신작에는 수십년 간의 노하우가 축적되어있다. 시간의 흐름을 타고 유영하는 보드게임계에는 온갖 MSG가 잘 개발되었다. 그래서 짧은 시간동안 즐길 수 있는 카드게임이나 적당한 가격의 게임으로도 이 게임과 버금가는 재미를 줄만한 게임이 참 많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던가? 올드하다. 이 게임이 가진 최고의 약점. 정말 옛날 게임 같아. 온갖 미사여구를 붙인다 해도, 이 진실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마땅치 않아 보인다. 이 게임의 대체재는 60년 간 너무나 많이 발매되었다.
6. 그럼에도 위대한 클래식 게임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느꼈다. 이 게임을 이제와서 굳이? 그런데 곰곰이 따져볼 수록 생각이 바뀌어간다. 이 게임은 재판에 재판을 거듭하며 메가어콰이어 같은 게임도 등장할 정도로 다양한 변주를 주기도 했다. 그렇게 주식 전략게임의 명맥을 꾸준히 이어간 게임, 위대한 작가의 게임. 아니, 위의 수식어 다 떼고 말해보자. 60년 간 사랑 받은 게임. 그런 게임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헥사형 타일로 바뀌고 기업의 수도 다양해진 MEGAcquire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image/1278975/megacquire))
골똘히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수다 적당히 떨면서, 타일 하나하나 찰칵거리는 손맛을 느끼며, 다음차례를 기다리다 합병되는 순간 도파민이 뿜어져 나오는 그런 게임. 굳이 현대적으로 버무릴 필요도 없다. 간단한 룰로 많은 인원이 함께 웃으며 즐길 수 있는 게임. 주식이 폭락하는 불쾌한 경험이 없는 주식게임. 가족과 함께, 보드게임 생초짜도 끼어서 대화를 나누며 같이 즐길 수 있는 유쾌한 본연의 오락. 심플한 게임성, 효과적이고 직관적인 회사의 가치표현, 마지막 모든 주가를 계산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승부까지.
오래도록 사랑받는 게임. 내가 아무리 이 게임을 폄훼하거나 요즘 꺼내기에는 심심한 게임이라 구박해도 이 게임은 꿋꿋이 살아남을 것이다. 이런 게임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재판은 이루어져야 한다. 부디 내 수명보다 이 게임이 더욱 오래 가기를.
우리가 클래식이라 부르는 이유. 지금 누가 이런 걸 하냐고 되묻기에는 이 게임이 품고 있는 고유의 것이 너무도 크다. 오히려 최근 유행하는 매커니즘과 MSG가 상당히 맛깔나게 버무려진 게임일지라도, 그 유행이 지나면 잊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게임들이 기억속에서 사라지는 순간 이 게임은 또 다시 재판되겠지.
갑자기 게이머가 아닌 평범한 친구들이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를 가정해보자. 너희 집에 게임이 왜 이렇게 많아? 나도 한 번 해볼래 좀 큰 게임으로! 라고 외쳤을 때, 나는 어떤 게임을 권할 수 있을까. 아 이건 안돼, 이건 너무 어려워, 이건 잔룰이 너무 많아. 그 와중에 책장을 스윽 둘러보고는 어, 이거 해볼래? 라며 권할만한 게임.
잊기 힘들 정도로 간단한 룰을 품고 있어 접근성도 좋고, 게임의 표준같은 플레이 타임으로 적절한 경험을 선사하며, 거기에 적당한 재미까지 품고 있는 게임. 60년여 년 동안이나 스스로를 증명하는, 마치 오랜 종갓집의 씨간장 같은 게임. 이 게임은 그런 게임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