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운빨+기억력 게임이라고? 으~른이 함께 플레이한다면 어떨까?
저는 뭔가 아이의 학습에 도움이 됩니다 라는 느낌을 진하게 풍기는 게임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게임은 게임으로서 그 자체로 즐거워야 하고 그걸 통해 무엇인가 가르치려는 부모의 욕심이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저 재미있게 놀다보면 배울만한 것들을 알아서 배우겠고, 그렇지 않더라고 함께 보낸 즐거운 시간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게임은 그런 맥락에서,
아마 그냥 보기만 했으면 절대 안 샀을 게임,
우리아이 숫자놀이 재미있게 해보자, 라는 부모의 마음을 이용하는 상술이라고 여겼을 게임,
너무 운에 의존하고 단순해서 금방 질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게임입니다.
제목도 찬란한 콘질라.
딱 아이스크림 좋아하는 아이들을 겨냥한 느낌이 나죠?
게임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림에 보이는 1이 써있는 아이스크림 콘을 하나씩 받고요, (4인까지 가능)
나머지 아이스크림 스쿱들을 뒤집어 펼쳐 놓습니다.
각 스쿱에는 숫자가 2부터 49까지 써 있습니다.
자기 턴에 아이스크림 하나를 뒤집습니다.
숫자를 확인한 후, 이놈을 내 아이스크림 위에 쌓을지 아니면 제자리로 돌려 놓을지 선택합니다.
아이스크림을 놓는 단 한가지 제한사항은 위에 있는 숫자가 아래있는 숫자보다 클 것.
즉 오름차순으로 놓아야 합니다. 당연히 순서 바꾸는 것은 안되고요.
뒤집어지는 숫자는 모두가 볼 수 있게 공개된 후 다시 뒤집습니다.
따라서 열심히 남의 손에도 집중하고 기억해야 게임을 잘 풀어갈 수 있겠죠.
누군가 10층짜리 아이스크림을 완성하면 승리합니다.
이게 룰의 전부입니다. 전형적인 아이들용 게임, 운과 기억력의 요소가 적당히 섞인 게임이죠.
뭔가 단순한게 이쁜 아이스크림으로만 아이들에게 어필하는 거 아니냐 하는 회의적인 생각을 금할 수 없는 게임입니다.
룰만 들어도 게임의 양상이 그려지지 않으시나요?
처음에 다들 낮은 숫자 (가능하면 10이하의) 로 시작을 하려고 뒤집었다 놨다 할 것이고,
게임이 조금씩 익숙해지면 다른 사람이 열어본 숫자를 기억하려고 하겠죠.
그러다가 자기 숫자에 가까운 낮은 숫자를 잘 뽑은 운 좋은 사람이,
혹은 이전에 열렸던 숫자를 잘 외운 기억력 좋은 사람이 승리하게 될 가능성이 큰 그런 느낌이죠.
실제로 게임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아마 제작자들도 그런 생각으로 만들었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좀 색다른 작전을 펼쳐 볼 수도 있습니다.
잠깐 한번씩 어떻게 플레이할지 생각해 보시죠.
제가 이 게임을 아이랑하고 나서 자려는데,
음? 대충 처음에 나온 숫자로 시작을 빨리 하는게 유리한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 몇 턴은 다들 낮은 숫자 찾느라 그냥 돌려놓기 바쁘거든요.
그런데 초반에 그냥 10후반에서 20중반 언저리의 숫자가 나오면 그냥 시작을 해 버리는 거죠.
남들은 낮은 숫자에서 경쟁하라 그러고 나는 중간 숫자들을 공략하는 겁니다.
이러면 경쟁도 줄지만, 외워야 할 숫자의 범위를 좁힐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초반에 28, 37, 이런 숫자 나오면 거의 기억하려는 시도도 잘 안 합니다. 거기까지 갈 길이 아직 멀거든요.
하지만 내 시작이 예를 들어 22라고 하면, 저런 숫자들이 이미 가시권입니다.
나만 혼자 이 전략을 취한다면 복수의 상대방들이 열어주는 힌트를 혼자 받아먹고,
내가 주는 힌트는 바로 그 복수의 상대방들이 경쟁하겠죠.
아래 사진처럼요.
오른쪽 플레이어는 첫 숫자를 25로 잡았습니다.
3이나 4로 시작한 플레이어에 비해 너무 안 좋은 출발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 플레이 양상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을 여러 사람이 택하면 다른 사람이 어부지리의 효과를 얻거나 아니면 공멸하는 상황도 가능합니다.
아래 사진을 보시죠.
민트가 24로 중반 전략을 취합니다.
다음턴에 핑크가 25를 뽑았는데, 이건 민트에게 완벽한 숫자죠. 핑크는 25를 픽하기로 합니다.
이제는 반대로 낮은숫자로 출발한 초코가 매우 편안한 상황입니다.
23이하의 숫자는 바로바로 가져갈 필요도 없이 잘 외우고 있다가 순서대로 가져가면 아주 쉽게 게임이 풀리겠죠.
만약 경쟁자가 있었다면 15 이런 애매한 숫자도 가져가야할지 고민했겠지만, 지금은 15를 자신 말고는 아무도 못 가져가니까요.
결국 약간의 눈치게임의 양상까지 띄게 됩니다.
전 한번은 높은숫자 전략을 하다가 마지막에 48, 49 두개를 다 가져가야 되는 상황이 있었는데
한 친구가 자기가 망하면서 48을 가져가서 아무도 10층을 못 쌓게 하더라고요.
단순해 보이지만 익숙해지면 새로운 전략이 생기고, 또 그 전략에 대한 카운터를 시도해 볼 수도 있는,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보드게임의 전략적 요소가 잘 담겨있습니다.
물론, 그 전략이 깊다거나 놀랍다거나 이런 건 아니죠. 아마 플레이 해 보면 다들 이런 생각을 하시게 되실 거에요.
그래서 이 게임은 아이와 함께 게임을 즐기시는 부모님들에게 추천드립니다.
나이는 5~10세 정도로 해 볼까요? 5~8세 정도가 적당할 것 같기도 하고요.
함께 플레이하시면서 아이가 따라오는 정도에 맞춰서 새로운 전략을 살짝 넣어주시고 반응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의 목표는 아이의 게임적 독립 아니겠습니까?
아이들끼리 시키면 아마 단순한 운+기억력 게임에 머무를 것 같고요,
어른들끼리 하면 전략 발견이고 뭐고 한두번 해보고 시시하게 치울만한 게임이겠죠.
이렇게 제가 매우 싫어하는 형식의 게임을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선물해주신 분에게 감사하네요.
처음에 뭘 이런 이상한걸 선물하나, 차라리 뭐 가지고싶은지나 물어보지, 라고 생각했던 점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보통 아이들이 게임할 때 자기 것만 신경쓰는 경향이 있는데,
이 게임은 다른 사람에게도 집중하게 도와줍니다.
보드게임의 본질을 찾게 해주죠.
다른 사람에게 집중을 넘어서 몰입해야 하는 게임이 또 있죠, 더 마인드.
내일모레 만 육세인 아이와 내일모레 마흔 육세인 아빠가 요새 매우 재미있게 하는 게임인데요,
조만간 이것도 후기를 올려볼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