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이라는 자유이자 구속" - 바이오스 오리진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다.
하지만 버섯은 본능적으로 이를 거부했다. 무의식과 의식 사이를 연결하는 냉혹한 시간의 흐름을 의지의 힘으로
막음으로써 고통과 피로가 없는 망각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듯이...
잠시 뒤에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힘들이지 않고 도약해오는 형체가 나타났다.
그것은 불덩이를 피할 곳을 찾아 민첩하게 몸을 날린다.
버섯은 그 강인한 생명력을 향해 온 힘을 다해 포자를 날려 본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보다 빨랐고, 버섯 자신은 생각보다 더 지쳤다.
마지막 순간, 아마도 버섯은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차라리 감정을 몰랐더라면...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몰랐더라면..."
드뎌 바이오스 3부작 시리즈 리뷰 대망의 마지막 장이네요.
바이오스 제네시스 리뷰 ⇒ 여기
바이오스 메가파우나 리뷰 ⇒ 여기
바이오스 미플의 진화
일단 지난 번 바이오스 메가파우나 리뷰를 보신 분들 중, 버섯돌이의 운명을 궁금해 하셨을 분들에게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바이오스 메가파우나 리뷰 마지막에 바이오스 오리진에서 버섯돌이의 활약이 이어질 것처럼 희망적인 문구를 썼었는데 사실 버섯돌이의 운명은 메가파우나 리뷰 말미에 이미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메가파우나에서 번성했던 종들은 칙술루브 소행성 충돌로 인해 모두 멸종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었거든요.
우리의 버섯돌이도 예외없이 칙술루브 소행성 충돌 때 멸종하고 만 것이죠. 나쁜 칙술루브 소행성 ㅠㅠ
RIP 버섯돌이 ㅠㅠ
이렇게 메가파우나에서 번성했던 종들은 멸종하고, 바이오스 오리진은 게임의 무대를 좀 더 미래로 옮깁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2백만 년 전 인류의 조상격인 인종들이 등장하여 확장하던 시기로, 즉 인류의 조상인 또는 조상이 될 뻔한, 여러 아인종들이 서로 간의 생존 경쟁을 펼치던 시기로 옮기게 되지요. (그래서 도입부에 제가 좋아하는 SF 소설 "별의 계승자" 1권의 일부를 발췌 수정해서, 버섯돌이와 인류의 조상인 정체 모를 포유류와의 조우를 표현해 봤습니다. ㅋ)
게임은 플레이어 인원수에 따라 일종의 사건 카드인 (신에게의) 도전 카드를 준비하고, 각자 돌아가면서 자신의 차례를 진행하다가 이 도전 카드 더미가 다 떨어지면 종료되게 됩니다.
각 플레이어는 사피엔스,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호빗 중 하나의 아인종을 선택하여 인종 보드, 뇌 보드를 받고, 왕관 마커를 무작위로 나누어 시작 지배 계급을 문화, 정치, 산업 중 하나로 정합니다.
4개의 인종 보드
사피엔스의 뇌보드
각 플레이어의 차례는 3단계로 진행됩니다.
-
도전 단계(선택)
-
행동 단계(필수)
-
정리 단계(필수)
첫 번째 도전 단계에서는 게임 시작 시 세팅했던 도전 카드를 한 장 공개하여 경매에 부칩니다. (이 단계는 선택 사항으로 그냥 바로 행동 단계로 가도 됩니다.)
신에게의 도전 카드, 신께서 노하셔서 사막화와 기근이...
도전 카드가 공개되면 경매 전에 먼저 우측 중앙에 있는 원형 아이콘 2개가 하나씩 처리됩니다.
이 아이콘들은 대체로, 아니 전부 다 천재지변, 기후변화, 역병, 위기와 같이 플레이어들에게 불리한 사건들을 나타내지요. 그래서 섣불리 신에게 도전했다가는 도시 절반 정도는 우습게 날아갑니다.
사건을 처리한 다음, 이 카드를 경매하게 되는데, 경매에서 이긴 플레이어는 (조건이 되면) 이 카드를 자신의 종족 보드, 지배 계급 열 하단에 배치하게 됩니다. 이렇게 획득한 도전 카드는 이제부터는 사회의 기반이 되는 기반 카드로 불리게 되지요.
기반 카드
두 번째 행동 단계에서는 자신의 지배 계급 열의 행동 아이콘들을 가장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한 행당 하나씩 차례대로 실행합니다. 행동 아이콘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아인종 보드에 2줄이 있고, 기반 카드나 아이디어 카드를 추가하여 늘릴 수 있습니다.
기반 카드는 아까 도전 단계에서 경매를 통해 획득하고, 아이디어 카드는 아래의 아이디어 시장에서 가져오게 됩니다.
아이디어 시장
그렇게 행동 단계가 끝나고 나면 지도에서 자신의 특정 기술(족적) 레벨을 오버하여 존재하는 자신의 말들을 제거하고, 시장에서 카드가 빠진 칸들을 채우고 나면 다음 플레이어의 차례로 넘어가게 됩니다.
참 간단하쥬?
행동 아이콘이 이렇게나 많다는 게 함정...-_-;;
게임의 구조를 이해했으니 바이오스 오리진만의 매력을 한 번 살펴 볼까요?
바이오스 오리진은 "의식의 진화"라는 부제에 걸맞게 게임에서 지배 체제를 강화시켜 가는 과정에서 '머리'를 쓴다는 점이 신선했습니다.
기반이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는 머리, 즉 뇌 보드의 자유 의지에 있는 말이 원로로서 움직여 줘야 하는데, 처음에는 자유 의지가 1개밖에 없어요. 감정 또는 어휘와 같이 낮은 수준에 있는 의식을 대뇌화, 추상화, 기도와 예술 등의 과정을 거쳐 자유 의지로 발달시켜야 하지요.
의지 만땅!
그리고 기후 변화가 지역간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전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표현하는 기믹도 좋았습니다.
위의 지도 상의 원반들은 사막, 밀림, 빙하, 침수 지역 등과 같이 인간이 서식할 수 없는 환경을 나타내는데, 특정 기후 이벤트, 예를 들어 온난화가 발생하면 빙하 디스크 하나를 제거하여 (이제 그곳은 서식 가능한 환경이 되겠죠.) 뒤집어서 파란색 링이 그려진 곳에 놓습니다. (그러면 그곳은 침수 지역이 되게 됩니다.) 사막과 밀림도 같은 방식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요.
또 승자를 정하는 방식도 독특합니다. 게임 내에는 문화, 정치, 산업 이렇게 3개의 분야가 있는데 게임이 종료되면 각 분야의 점수를 각각 계산합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높은 점수가 자신의 점수가 되고 이 점수를 비교하여 승자를 결정합니다. 즉, 누군가는 문화 점수를, 또 다른 누군가는 정치 점수를 자신의 점수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죠.
산업, 정치, 문화 3가지 분야와 6가지 기술
그럼 한 분야만 열심히 달리면 되는 게 아닌가 싶지만, 그랬다가는 이 게임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인 철학이라는 요소 때문에 자칫 폭망할 수 있습니다.
철학
보드에 위와 같은 철학 트랙이 있는데 게임 중에 플레이어들은 특정 행동 또는 전조 카드로 위의 큐브를 한 쪽으로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이 트랙은 세계적으로 대세인 사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이 한쪽으로 쏠리면, 게임이 종료되었을 때 특정 분야의 점수는 아예 0점 처리가 됩니다. 한쪽 분야만 너무 열심히 달리면 한 마디로 즐되는 것이죠. 철학의 힘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이렇게 재밌는 요소들이 많은데, 바이오스 오리진을 하다보면 여타의 문명 게임을 할 때와는 다른 감상을 느끼게 되더군요. 뭐랄까 조금 갑갑하달까요?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다른 문명 게임과 3가지 점에서 다른 점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다른 문명 게임들은 플레이어가 전지전능한 신적 통치자로 사회 체제를 자신이 필요한 때에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는 반면, 바이오스 오리진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때에 원하지 않는 체제로 바뀔 수 있습니다. (물론 자발적으로 체제를 바꾸는 방법도 존재합니다.)
둘째, 다른 문명 게임들과 달리 사회 변화에 따른 인간적인 저항이 존재합니다. 전쟁으로 도시가 파괴되거나, 설교로 도시를 개종시키거나 하면 도시만 교체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에 저항하는 난민이 생성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성된 난민들, 제거된 시민들은 사회 불만 세력이 되어, 다양성을 가로막고 체제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지요. 그러다가 그 수가, 사회가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다양성을 넘어서게 되면 혁명이 일어나 체제가 전복되기도 하구요. 이 반체제인사들은 강제 진압이라는 방식으로 제거할 수 있는데 이 또한 많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면서(원로나 도시 제거) 해야 되지요.
그리고 여타 엔진 빌딩을 기반으로 하는 문명 게임들의 엔진은 후반으로 갈수록 시원시원하게 돌아가는 반면, 바이오스 오리진의 엔진은 체제가 성숙할수록 엔진의 효율이 점점 떨어집니다.
예를 들어 위와 같은 아이디어 카드에서 상단의 6번개 표시는 에너지 레벨을 1단계씩 올려주는 행동인데, 최대 6단계까지만 올리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에너지가 6레벨을 찍고 나면 그 이후로는 무쓸모가 되어 버리지요.
그래서 어느 정도 엔진을 돌리고 나면 자발적으로 체제를 바꾸어 새로운 엔진(기반과 아이디어)으로 갈아 탈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문명 게임들과의 이런 차이점들은, 메커니즘적으로는 플레이어에게 갑갑하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지만, 테마적으로는 너무나 훌륭하게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실제로 역사는 전지적인 통치자에 의해 흘러가지 않고 (다만 지난 후에 우리가 그렇게 해석할 뿐), 정복이란 것도 도시 토큰 하나 갈아 치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며 (급격한 사회 변화는 항상 인간적인 저항을 만나게 되죠), 빠르게 성장하는 사회도 언젠가는 한계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갑갑함 자체도 작가가 의도한 게임적인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이오스 오리진 곳곳에 담겨있는 정치적, 철학적 함의를 곱씹는 것이 제게는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문명의 발달을 나타내는 3가지 분야, 문화, 정치, 산업은,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말한, 인류가 집단을 이끌고 가는 3가지 신화인 종교, 제국, 자본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유주의 철학이 산업주의 지배 체제에는 힘을 실어주는 반면, 정치 분야 스코어링은 0점 처리한다와 같이 각 철학과 정치 체제의 관계에 대한 함의를 읽는 것도 재밌고, 여러 기반 카드들과 아이디어 카드들에 담긴 은유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경매하지 않는 기반 카드들, 우익독재자는 신비주의가 가장 높은 플레이어에게, 좌익독재자는 반체제인사가 가장 많은 플레이어에게
바이오스 제네시스와 바이오스 메가파우나 리뷰에서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었는데 바이오스 오리진에서는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앞의 두 게임들이 생명이 환경적 저항을 이겨내고 생존하고 확장하는 데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면, 바이오스 오리진은 인간의 의식에 더 주목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의식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전 "의식이란 자유이자 구속"이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의식은 환경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또 한편 이렇게 구축된 의식에 의해 사회의 한계가 규정되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합니다. 다시 이 사회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의식을 구축하고, 또 그 안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문제를 만들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늘 그렇듯 답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의 인터스텔라 짤을 투척하고 글을 마무리해 봅니다.
(솔직히 인류가 언제까지나 답을 찾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지만... 어쩌면 자연스럽게 하이 프론티어로 이어지는 모양새를 의도한 큰 그림... 하이 프론티어 리뷰는 여기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