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라는 공든 탑" - 바이오스 제네시스
바이오스 제네시스.
여기서 "제네시스"는 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를 뜻하는 말이지요.
생명의 시작과 육안적 생물의 탄생까지를 테마로 하는 게임으로, 생명의 탄생에서부터 종의 진화와 분화, 의식의 진화와 인류 문명의 발전까지 다룬 바이오스 3부작의 첫 번째 작에 어울리는 이름인 것 같습니다.
이 게임은 킥스타터에서 우연히 보고 구하게 되었는데, 사실 처음 게임을 받고는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창세기 어쩌구 하는 이름의 스케일에 걸맞지 않게 박스 사이즈가 아주 우스워보였거든요.
전원일기보다 조촐한 창세기-_-;;
그런데 막상 게임을 해보려고 규칙서를 펼쳐 보니 전혀 우스운 게임이 아니었습니다.
규칙서의 분량도 분량이지만 온갖 전문 용어들이 난무하고 뒤죽박죽 구성(A를 설명하다 B를 참조하래서 B를 보면 또 C를 보라고 하고, C를 보면 다시 A를 참조하라고 하고;;;;)에 저만 우스운 꼴이 되었지요.
보드게임 규칙서인가, 생물학 전공서인가
결국 이 게임은 규칙서 해독 능력을 레벨업하기 전까지 오랜 시간 책장에 장식품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코로나로 모임이 줄어들어 솔플을 하는 시간이 많아 지다보니 (도무지 남들에게 설명하고 같이 하자고는 못 할 것 같은) 이런 게임들에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일단 게임의 진행을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게임은 사건 카드 더미가 다 떨어지거나, 아마게돈이 발생하면 그 라운드까지 진행하고 종료하게 됩니다.
그리고 각 라운드는 다음 순서로 진행됩니다.
1. 사건 카드 처리
2. 생체, 촉매 배치
3. 자가 촉매적 주사위 굴림
4. 다윈적 주사위 굴림
5. 구매
이제 각 단계를 자세히 살펴보면
첫 번째, 사건 카드 처리 단계에서는 사건 카드 1장을 뽑아 하단의 아이콘을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순서대로 처리합니다.
사건 카드
사건 카드는 게임 준비 단계에서 다음과 같이 구성합니다.
명왕누대(46억년 전~40억년 전) 카드 3장
시생누대(40억년 전~25억년 전) 카드 7장
원생누대(25억년 전~5억 4천 100만년 전) 카드 10장
초기 지각 생성 시기를 기준으로 명왕누대와 시생누대를 구분하고, 대기 산소 급증 시기를 기준으로 시생누대와 원생누대를 구분하기 때문에 시생누대 사건 카드부터 대륙 생성이 등장하고, 원생누대 사건 카드에서는 산소 급증이 자주 나오지요.
사건들은 주로 생체가 서식하고 생명이 태동할 수 있는 스위트홈인 레퓨지아를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태어난 생명을 온갖 방법(극한 온도, 자외선, 산소 등등)으로 괴롭히기도 합니다.
두 번째, 생체촉매 배치 단계에서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생체와 촉매를 레퓨지아에 배치합니다.
각종 레퓨지아들
각 레퓨지아의 하단에는 아직 유기화되지 않은 만나(생물을 구성할 일종의 블럭들)들이 있습니다.
플레이어들은 만나가 유기화되거나 다시 소실될 확률 등을 고려해 적당한 레퓨지아의 상단에 자신의 생체를 배치합니다. 그리고 유기화된 만나를 소실시키거나 촉매를 제거하는 고약한 주사위(?)들을 자신의 촉매를 덮어 가릴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정은 마치 성경에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만드는 과정을 연상시킵니다.
흙더미, 항성간 우주 먼지와 같은 레퓨지아 속에 생체라는 생명의 숨을 얹는 작업이니까요.
세 번째, 자가 촉매적 주사위 굴림 단계에서는 생체가 올라가 있는 레퓨지아마다 생체당 2개, 유기화된 만나당 1개씩의 주사위를 굴립니다.
자가촉매 반응이란 생명의 두 가지 요건, 물질대사(스스로 자신의 구성물을 생산)와 자가 복제(생식) 중 물질대사가 일어나는 과정으로 이 주사위 굴림을 통해 무기물인 만나가 유기화되기도 하고 (같은 눈금의 주사위가 2개가 나오면 레퓨지아를 뒤집어) 극적으로 박테리아가 탄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유기화되었던 만나를 잃거나 촉매가 떨어져 나가고 심지어 생체마저 떨어져 나가는 경우도 종종 생깁니다.
축하합니다! 건강한 해양 박테리아가 탄생했습니다. (생체와 유기화된 만나들은 염색체를 구성합니다.)
네 번째 다윈적 주사위 굴림 단계에서는 세 번째 단계에서 무사히 박테리아와 같은 다윈적 생명체가 탄생했다면, 이런 미생물에 대해 주사위 굴림을 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이미 자기 복제 능력까지 갖춘 다윈적 생명체들에 대해, 이 주사위 굴림을 통해 환경 변화에 얼마나 잘 적응하는지를 체크하는 것이지요. 이때 각 염색체들은 색에 따라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여 생명체의 유지를 돕습니다. (빨간색은 효소 생산, 노란색은 재굴림, 파란색은 오류 방어, 초록색은 산화 방지&레퓨지아 배치 생체 증가)
가혹한 주사위 ㅠㅠ (5나 6 같은 오류가 뜬 주사위 수만큼 염색체를 떼어내야...)
다섯 번째, 구매 단계에서는 각 유기체에 있는 생체마다 한 번씩 변이나 장기 등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효소를 소모하여, 변이 더미에서 변이를 구매하거나, 기생체에 감염된 장기를 되찾아 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때 충분한 장기가 갖춰졌다면 본격적인 생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육안적 생물로 진화할 수도 있습니다.
왼쪽에서 두번째 열이 각종 변이 더미
해양 박테리아가 드뎌 편형충이 되었습니다!
육안적 생물이 되면 다윈적 굴림도 하지 않고, 장기도 많아 어지간한 사건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제 좀 살만한 세상이 되었겠지?
...싶지만 지금부터는 종들 간의 경쟁 체제에 돌입하게 됩니다. ㅠㅠ
식물, 초식, 육식 이렇게 3단계로 구성된 영양 단계가 다른 종들로 이미 가득 차 있으면 대사율(빨간색과 노란색 장기 수)을 비교하고, 여기서 밀리면 도태해서 멸종하고 맙니다. (해양에서 밀리면 육지 동물로 진화해서 살아남을 수는 있습니다.)
이 게임의 개략적인 진행 과정을 살펴 봤는데, 설명에서도 느끼셨겠지만 이 게임은 매 과정에서 이전의 성과를 무너뜨립니다.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했을 때 들었던 감상도 이 게임은 "공든 탑 무너뜨리는 게임이다"였습니다.
간신히 만나 유기화시켜 놓으면 금세 다시 무쓸모가 되고, 간신히 박테리아 만들어 놓으면 극한의 고온이나 산소로 염색체 다 날아가고, 변이 달면 기생충이 붙어서 빼가고......
하지만 위 이미지처럼 완전히 처음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탑이 무너져도 초석은 남겨지듯 효소를 보상으로 받거나 하는 식으로 그래도 처음보다는 조금은 앞으로 나아간 상태가 됩니다. 그 조금 나은 상태를 발판으로 나아가고, 또 무너지고 다시 조금 더 나은 상태로 앞으로 나아가는... 그 과정이 수십 억 년의 세월 동안 반복되어, 오늘날 인류에까지 이른 것이겠지요.
바이오스 제네시스를 플레이 하고 난 지금, 누군가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우주가 해변가에 쌓은 탑"
제목에서는 '공든 탑'에서 '공'이라는 의도를 가진 존재가 묻은(?) 표현을 썼지만, 그보다는 그저 무심하게 쌓은 탑, 해변가에서 파도에 밀려온 모래알로 쌓였다가 또 다시 파도에 밀려가는 모래탑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게임 자체는 어마어마한 잔룰로 무심하게 플레이 할 수가 없더군요. 엄청 공을 들인 후에야 플레이가 가능했습니다.ㅠㅠㅠㅠ)
바이오스 3부작의 다음 작인 바이오스 메가파우나에서는 제네시스 끝자락에 잠깐 등장했던 종들간의 생존 경쟁을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텐데 그 게임에서는 생명을 또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게 되겠지요.
그럼 다음에는 바이오스 메가파우나 리뷰로 찾아오겠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