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이, 더 크게"보다 "딱 필요한 만큼" - 앤티쿼티
앤티쿼티 솔플 중
게임을 하다가 울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전 울 뻔한 적이 있습니다. 프로 꼴찌러라 승패 때문에 그런 적은 없는데
게임 시스템의 무자비함에 몇 턴 만에 GG 치고 접을 때 한 번 울컥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게임이 바로 앤티쿼티였습니다.
스플로터에 진심인 지인의 추천도 있고, 여기저기 재밌다는 후기글에 혹해서
무지성으로 지르고는, 컴포도 한땀한땀 업글하고 룰 설명도 열심히 준비해서 갔는데......
한 두세 라운드 돌고 나니 마을에는 무덤 가득, 영지에는 오염 가득.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군요.
다른 분들도 다들 비슷한 상황이라 합의 하에 중접을 했더랬지요.
부푼 기대를 안고 열심히 준비하고 맞이한 앤티쿼티의 첫 인상은 그렇게 충격과 공포로 끝났습니다.
“보통 게임들은 처음이 빡빡하면 나중에는 좀 살 만해지고, 나중이 빡빡하면 초반에 좀 할 만 하고 그러지 않나요? 그런데 이건 맨땅에 헤딩하는, 1라운드부터 드리워진 황폐화와 죽음의 사신이 게임 내내 ㄷㄷㄷ”
이렇게 예전에 써 놓은 후기에, 그때 느꼈던 공포의 흔적이 남아 있네요.
그렇게 몇 번의 플레이를 망치고 팔까 하다가, 그래도 컴포 업글 한 게 아까워서 못 팔고 있었어요. 그런데 매운 맛을 좋아해서 그런지, 가끔 이 게임의 매운 맛이 자꾸 생각이 나더군요.
한 번도 엔딩을 못 본 것이 아쉽기도 하고...
그래서 집의 그 분을 졸라서 2인플로 다시 한 번 더 시도해 보게 됩니다.
결국 엔딩을 봤습니다.
무덤이 도시를 덮다 덮다 건물도 모두 덮어 더 이상 무덤을 놓을 데가 없어 끝난 참혹 엔딩....-_-;;;
묘비명이 다 달라서 더 감정이입 되는 ㅠㅠ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왜 재밌는 거죠?
망한 엔딩이긴 하지만 3-4인플 때는 이건 내가 절대 컨트롤할 수 없는 극한의 무자비함이다라는 느낌이었다면, 2인플은 이거 한 번 더 하면 해볼 만하겠는데? 라는 느낌이 들어서일까요?
핵폭탄급 매운 맛이 신라면 수준으로 내려오니 맛있는 거죠.
그래서 그날 밤 늦게 다시 돌려 결국 성녀 바르바라 해피 엔딩으로 끝냈지요.^^ (이 게임의 특징이 선택하는 수호 성인에 따라 승리 조건이 다 다른 점이죠.)
니콜라스님... 다만 기근에서 우리를 구하옵소서. 아멘
그 이후로는 최애겜 중 하나로 등극해서 다섯 수호 성인 엔딩 다 찍어보겠다고 열심히 돌리고 있지요.
그럼 이 게임 시스템이 어떻길래 무자비하다고 하는 걸까요?
일단 게임 진행을 간단히 설명 드리자면 이 게임은 게임 중에 대성당을 건설하면 수호 성인을 1명 선택하게 되고 자신이 선택한 수호 성인의 승리 조건을 만족시키면 승리하고 게임이 종료됩니다.
다섯 수호 성인은 각각 다른 승리 조건과 혜택이 있습니다.
✞ 성 니콜라스
승리 조건: 일꾼 20명 보유
혜택: 주택(일꾼 나오는 건물) 2개 건설 시 1개 무료
✞ 성 조지
승리 조건: 다른 플레이어 1명의 영지를 완전 포위
혜택: 자신의 대성당 포함 그 라운드에 건설되는 대성당 수만큼 생선 획득
✞ 성녀 바르바라
승리 조건: 모든 도시 건물 건설 (무덤 제외)
혜택: 도시 건물 재배치 가능
✞ 성 크리스토퍼
승리 조건: 식량과 사치품을 종류별로 3개씩 보유
혜택: 대성당에 자원 무제한 저장 가능
✞ 성모 마리아
승리 조건: 다른 수호 성인 승리 조건 2개 달성
혜택: 다른 수호 성인들의 모든 혜택
그리고 게임은 누군가가 승리 조건을 달성할 때까지 다음 10개의 단계가 계속 돌아가게 됩니다.
✔1단계: 일꾼 회수
도시 건물에 올린 일꾼 회수 (건물은 일꾼이 올라가야 기능하는 것과 무인이어도 기능하는 것이 있습니다.)
✔2단계: 도시 건물 건설
각자 개인 보드에 건물을 건설하고 일꾼을 배치하는 단계입니다. 가림막으로 가리고 동시 진행을 하게 되지요.
개인 보드인 도시 지도
✔3단계: 순서 정하기
2단계에서 마차와 탐험가에 배치한 일꾼 수가 적은 사람이 앞 순서가 됩니다. 동타이면 이전에 앞 순서였던 사람 우선.
✔4단계: 외부 건물 건설
도시 바깥의 공용 보드에 각종 생산 건물, 확장 건물 짓는 단계입니다. 일꾼이 올라가 있는 마차 수만큼 건설이 가능합니다.
외부에 지어진 생산 건물들과 확장 도시들
✔5단계: 생산품 저장 및 폐기
이것 저것 건설하고 남은 자원은 창고에 저장하고, 그러고도 남는 것은 폐기합니다.
✔6단계: 수확
생산 건물마다 자원을 하나씩 가져옵니다.
✔7단계: 탐험
탐험가에 일꾼을 올렸다면 영지 내에 있는 탐험 토큰 1개를 뒤집습니다. 이때 식량이 나오면 기근이 하나 올라갑니다.
✔8단계: 기근
현재 (기근 수준)-(보유 식량) 수만큼 도시에 무덤을 깝니다. 그리고 기근 수준을 한 단계 올립니다. ㅠㅠ
현재 기근이 20이네요. 무덤 20개 ㄷㄷㄷ
✔9단계: 오염
도시 당 3개씩 자신의 영지에 오염을 깝니다. ㅠㅠ
✔10단계: 승리 확인
누군가 승리 조건을 달성했는지 확인합니다.
단계는 뭔가 엄청 많아 보이는데 사실 게임의 핵심은 “✔2단계: 도시 건물 건설”, “✔4단계: 외부 건물 건설”이지요.
그리고 무자비의 핵심은 “✔8단계: 기근”, “✔9단계: 오염”이구요.
기근은 처음에 0으로 시작하는데 그렇다고 만만하게 볼 게 아닌 게, 매 라운드마다 한 단계씩 올라가는데다가 초반에 다들 탐험 달려서 식량 뜨면 기근이 두 어 라운드 만에 6-8이 되어 버립니다. 그럼 식량 없으면 내 도시에 무덤을 6-8개씩 깔아야하고, 심지어 라운드마다 그 수는 계속 더 늘어나지요. 하...끔찍....
그리고 오염은 기본적으로 생산 건물(벌목소 제외)을 지어서 땅에서 자원을 뽑아 먹을 때마다 생겨요. 그런데 도시가 있으면 또 매 라운드마다 도시당 3개씩 똥(?)을 싸서 멀쩡한 영지마저도 오염시키지요.
오염들... 징글징글
물론 이것들을 제어해주는 건물들도 있습니다.
각종 건물들
그런데 건물을 지으려면 자원이 필요하고, 자원을 뽑으면 오염이 늘어나고, 오염이 늘어나면 생산력이 떨어져 식량을 못 구하고, 식량이 없으면 기근으로 무덤이 생겨 건물 지을 땅이 없어지고... 결국 뭔가 해보기도 전에 무덤만 그득그득한 죽음의 도시를 만들고 말게 되지요.
이렇게 먹을 거 잔뜩 구해다 놨는데... 왜 먹질 못하니 ㅠㅠ
이 게임은 생각해보니까 뭘 너무 열심히 하면 안되더라구요.
초반부터 자원 막 생산해야지, 건물 막 지어야지, 일꾼 늘려야지 이러면 백퍼 망하더군요.
상황 봐가면서 딱 필요한 만큼만 먹고 빠지고, 필요한 만큼 짓고 늘리고...
그래야 지속가능한 문명이 만들어집니다.
이 게임의 묘미는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뭐든 많으면 좋은 거 아니야? 싶어 마구잡이로 땡겨다 쓰는 게 장기적으로 절대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시스템으로 가르쳐 준다는 것... (심지어 창고도 나무 1만 내고 원하면 얼마든지 크게 만들 수 있는데 창고 크게 지어서 망한 적도 몇 번 있어요. ㅋ)
그리고 게임 곳곳에 테마적인 위트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철학부 건물의 기능이, “서로 다른 자원”을 소모해야 할 때 “다른”이라는 조건을 무시하게 해주는데, 철학을 배우면 뭐 존재의 본질은 같은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얻는 건가 싶기도 하고, 신학부 건물을 지으면 대성당 부수고 수호 성인을 갈아치울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재밌습니다. 탐험가들이 식량을 가지고 돌아오면 (기근이 늘어) 무덤이 늘어나는 것도 야생 독초 먹고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게임하면서 왜 이 건물은 이 기능일까 생각하면 재밌는 것들이 많더군요.
탐험을 안 하자니 종자가 없고, 탐험을 하자니 기근이 오고
끊임없이 생산성 증가!!, 효율!!을 외치면서 자꾸만 잊어버리게 되는 사실.
우리가 가진 자원도 무한하지 않다는 것...
앤티쿼티로 다시 한 번 상기해 봅니다.
이상 우주 개척보다 더 힘든, 중세 이탈리아에서 문명 꾸리기! 앤티쿼티 후기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