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이든 비디오게임이든 턴 전략/전술 게임, 특히 웬만한 워게임은 대체로 바둑판 형태의 사각 격자(스퀘어 그리드)가 아닌 육각 격자(헥스 그리드) 맵을 사용합니다. [가이아 프로젝트], [테라포밍 마스], [사이드], [에이지 오브 스팀], [커맨드 & 컬러스: 고대] 등 예시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비디오게임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는 1991년에 나온 첫 작품부터 4편까지 전통적으로 사각 격자를 사용하다가 2010년에 나온 5편부터 육각 격자를 채택하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어떤 이유에서 그런 큰 게임 시스템상 변화를 감행한 걸까요?
우리는 수학을 하건 지도를 보건 스프레드시트 작업을 하건 직교 좌표계와 사각 격자에 익숙합니다. 그럼에도 얼핏 보면 직관적이지 않은 육각 격자를 사용하는 까닭은 그것이 실제 거리를 훨씬 더 잘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사각 격자의 가장 큰 문제는 대각선 방향으로 이동할 때에 나타납니다. 비스듬하게 가로질러 가면 될 것을 사각형 둘레를 따라 한참 돌아가니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육각 격자에도 이런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차이는 현격히 큽니다.
아래 그림은 사각/육각 격자에서 실제 직선거리 대 지도상 이동 거리의 오차 비율을 색의 명도로 표시한 것입니다. 두 값이 동일해 오차가 0일 때(명도 100%)와 사각 격자에서 오차가 최대일 때(명도 50%)를 기준으로 선형 그라데이션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새빨갈수록 부정확하다는 뜻입니다. 육각 격자가 얼마나 우월한지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평균 오차를 계산하면 사각 격자가 29.5%, 육각 격자가 9.8%로 무려 3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사각 격자와 육각 격자의 거리 정확도 비교
하지만 게임 플레이 및 테마상의 이유로 사각 격자를 쓰기도 합니다. 비디오게임 [필드 오브 글로리 II], [센고쿠지다이: 쇼군의 그림자] 등 그리스 시대의 밀집 장창병과 로마 군단병, 근대 전열보병처럼 방진 대형의 전투를 다루는 경우가 이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XCOM]처럼 건물과 차량 등 지형지물이 사각형인 시가전을 주로 다루는 경우도 육각 격자를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장르는 다르지만 [심시티]를 비롯한 도시 건설 게임들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사각 격자를 사용합니다.
한편 [서바이빙 마스]는 같은 도시 건설 장르임에도 육각 격자를 사용합니다. 화성 식민지의 주거용 구조물인 돔이 구조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구(球)형 혹은 원(圓)형인데, 사각형보다 육각형이 이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벌집이 육각 구조인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단일 도형으로서는 원이 육각형보다 완결하지만, 원만으로는 평면을 완전히 채울 수 없고 빈틈이 생기며, 한 가지 모양과 크기만으로 평면을 채울 수 있는 정다각형은 오직 정삼각형과 정사각형, 정육각형뿐입니다.
결론적으로, 육각 격자는 일반적으로 사각 격자보다 평면상의 거리를 더 잘 나타낼 수 있는 방식입니다. 특히 말(병력)의 이동이 중요한 워게임에서 이 차이는 두드러집니다. 그러니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두꺼운 보드도 아니고 달력 종이 같은 얇은 지도 위에 새끼 손톱만한 종이 딱지 수백 개를 늘어 놓고 온 세상 고민은 다 짊어진 듯 심각한 사색에 빠지는 메마르고 실용적인 워게이머들이 이를 마다할 리 없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