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로파이(Lo-fi) 로망 1: 파이널 걸
[ 호러 영화 ]
어린 시절 제 친구들은 WWE (프로레슬링)를 많이 좋아했어요. 하루는 마초맨을 좋아했던 제 친구가 동생이랑 부모님 침대 위에서 프로레슬링 놀이를 하며 플라잉 니킥을 시도하다가 침대 다리가 부러지는 불상사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화가 나신 그 친구의 아버지가 부러진 침대 다리를 휘두르다가 티비가 망가지는 2차 사고가 발생했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다음날 술에 취해서 기분 좋게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에게 친구 동생이 "아빠 티비는...?" 이라고 물었어요. 아버지가 흥얼거리시며 다시 나갔다 돌아오시더니 집에 비디오 플레이어가 달린 티비가 생겼습니다. 이걸 비디오비전이라고 불렀나요? 아무튼 개꿀.
그때부터 저와 그 친구는 비디오 대여점에 있는 영화들에 빠져들었어요. 다른 친구들은 미성년자 관람불가 딱지가 붙은 영화를 빌릴 방법을 찾느라 바빴지만 저희의 관심은 좀 달랐습니다. 아마 그 처음은 귀타귀 등의 강시영화로 기억을 하는데요, 어째서인지 점점 본격적인 호러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죠. 사실 호러 영화 대부분이 미성년자 관람불가였지만, 뭐랄까요? 저희의 그 열정? ㅋㅋㅋㅋㅋ 그런걸 보셨는지 아무튼 결국은 빌려주시더라고요. 아무튼 후에 저희 집에도 비디오 플레이어가 생기고 난 후에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호러 영화를 찾아다녔습니다. 점점 다른 장르 영화들도 보고 취향이 많이 확장되긴 했지만 옆 동네 비디오 대여점을 넘어 꽤 먼 지역의 비디오 대여점까지 수소문해서 찾아다니고, 대학 영화동아리들까지 찾아다녔던 가장 큰 이유는 호러 영화 (플러스 일본 애니메이션) 였습니다.
10대에는 영화 목록을 정리한 노트도 있었는데 지금은 가지고 있질 않네요. 아무튼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하위 장르가 있었는지 생각해봤는데 저희는 잡식성이었던 것 같아요. 20대는 거의 전체를 바쳐 다른 쪽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호려 영화와는 좀 멀었던 시기입니다. 영화는 꾸준히 많이 봤지만 다른 영화들을 많이 봤어요. 그러다가 20대 말에 독일식 보드 게임에 빠지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모임에 있던 친구(제 아내 포함)들이 김종철 씨가 운영하던 호러 익스프레스(호러존)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였나, 묘하게도 보드 게임을 다시 시작하면서 호러 영화도 다시 보기 시작했네요.
Hammer Film Productions Ltd. 이야기를 해볼게요.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해머 필름에서 만든 고딕호러나 판타지 영화들은 이후의 호러영화들에 큰 영향을 끼쳤어요. 호러 영화를 상업적으로 성공시킨 제작사이면서 이후에 호러 영화 시장이 포화 상태가 되며 80년대에 제작을 중단한 점은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네덜란드의 존 드 몰이 해머 필름을 부활시켜 다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렛 미 인, 우먼 인 블랙 등이 있죠. 여담으로 넷플릭스가 해머 호러의 향수를 종종 자극하는데, 블랙 미러:밴더스내치는 직접적인 오마주를 표현하기도 했죠.
크리스토퍼 리가 연기한 드라큐라는 노스페라투 등이 가진 이전의 드라큐라 이미지를 변화시키며 이후 드라큐라 캐릭터의 원형을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190cm가 넘는 피지컬이 주는 느낌, 그리고 해머는 호러 영화에 성적인 코드를 더해서 이후에 드라큐라 하면 떠오르는 모습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겠네요.
해머 호러 시리즈의 스타 배우였던 (반 헬싱을 연기했던)피터 커싱은 주로 영국에서 활동을 했지만 그와 콤비라 할만한 크리스토퍼 리는 활동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톨킨의 광팬이었던 리는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에도 출연했죠. 워낙 톨킨의 광팬이어서 간달프 역을 간절히 원했지만 피터 잭슨이 "사루만이 저에게 사루만 역을 당신에게 맡기라고 했어요"라고 말했고 결국 사루만 역을 맡았습니다. 저는 리가 사루만을 정말 잘 연기했다고 생각해요.
길어졌네요. 자, 해머 시리즈를 중심으로 목록을 시대별로 다시 나눠볼 수 있겠어요. 해머 호러 이전을 고전으로 묶고, 해머 호러와 슬래셔 영화 황금기를 하나로 묶으면, 이후 포스트모던이라 부를만한 메타 호러와 파운드 푸티지의 시대가 도래하죠.
70년대에 해머 호러 시리즈가 반복적인 모습을 보인 반면 해머의 붉고 선명한 혈흔과 성적 요소를 발전시킨 슬래셔 영화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80년대에는 그야말로 전성기를 이뤘습니다. 이 시기에 "스크림 퀸"이라고 불린 제이미 리 커티스라는 스타가 탄생하죠. 이른바 파이널 걸의 등장입니다.
캐럴 클로버의 저서 [Men, Womwn, and chain Saws: Gender in the Modern Horror Film (1992)] 에서 체계적으로 파이널 걸을 정의 했는데요, 뭐 다들 아시겠지만, 슬래서 영화에서 유일하게 살아남는 여성 캐릭터를 뜻합니다. 파이널 걸은 음주, 약물, 성적 활동을 하지 않는 순수한 캐릭터고, 지적이며, 영화가 진행되면서 생존을 위해 기술을 발전시킨다고 분석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제이미 리 커티스가 연기한 할로윈의 "로리 스트로드", 그리고 13일의 금요일의 "앨리스 하디", 엘름가의 악몽(나이트 메어)의 "낸시 톰슨" 등이 있죠.
초기의 파이널 걸은 단순한 생존자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능동적인 영웅으로 진화했어요. 특히 장르를 성찰하기 시작한 메타 호러 영화들을 거치면서 여성 묘사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트로프(trope)가 되었습니다. 특히 캐빈 인 더 우즈는 파이널 걸 트로프를 갈기갈기 찢었다고 할 정도로 해체해 버리는데요, 데이나를 지적이고 순수한 여대생으로 묘사하며 파이널 걸로 인식하도록 의도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마리화나를 피우고, 성적인 행동을 하고, 지하에 숨어있는 기술자들이 트로프들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최후에는 인류를 위해 희생하지 않고 세상의 종말을 받아들이며 사망하죠. 데이나는 가짜 파이널 걸이었고, 진짜 파이널 걸의 속성을 지닌 마틴은 남자입니다. 하, 걸작.
2016년에 스스로를 메타 호러 보드 게임이라며 믹스테이프 매서커(Mixtape massacre)라는 보드 게임이 나오기도 했습니. 슬래셔 영화를 다룬 게임이면서 비디오 테이프의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죠. 협력 버전과 리메이크 (아마도? 자세히는 모름) 두 버전을 20년과 22년에 다시 발표했지만 성공적이진 못했습니다. 테마가 나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중요한 부분을 제대로 자극하진 못했다고 생각해요.
비슷한 아이디어를 가진 게임들이 핵심을 놓치고 있을 때, 반 라이더 게임즈가 호스티지 네고시에이터의 테마를 바꿔 파이널 걸을 발표 했습니다. 비디오 테이프 시대를 연상시키는 디자인, 그레인 효과를 살린 일러스트, B급 슬래셔 영화에 대한 오마주, 레트로 호러 트로프의 재현, 다양한 살인마와 시나리오(장소)의 변화와 조합, 결정적으로 주제를 극적으로 살린 1인 게임으로의 디자인. 흐린 눈으로 보면 차별성이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직접 뛰어들어 보니 로파이 감성과 호러 장르에 대한 높은 이해를 가지고 비울 곳은 비우며 로파이(Lo-pi)의 로망을 실현시켜 주더군요.
[주사위]
여러분들도 다들 아시겠지만 주사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게임 도구 중 하나죠.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동물 뼈로, 로마와 그리스에서는 돌이나 상아로 만든 정육면체 주사위를 사용했다고 하죠. 하지만 이 당시의 주사위는 지금 우리가 아는 균형 잡힌 도구라기보다는 운명을 읽는 도구, 그리고 도박에 주로 쓰였습니다.
20세기 초반 워게임의 등장과 함께 주사위는 점점 게임 도구로서 역할을 갖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보조 수단이라는 느낌이 강했어요. 정밀함보다는 결과표에 따른 임의성의 도구였죠. 그러던 중 1974년, D&D 초기판의 등장으로 이 흐름이 바뀌게 됩니다. 당시 미국에는 d8, d10, d12, d20 같은 다면체 주사위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TSR은 일본산 수학 교구용 다면체 주사위를 수입해 번들로 넣었거든요. 하지만 이들은 가공이 거칠고 숫자 배열이 편향된 경우가 많았죠.
그래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루이스 조키(Louis Zocchi)입니다. 그는 게임에 사용하는 주사위가 통계적으로 공정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고 기존 교육용 주사위는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직접 정밀 주사위를 제작하는 브랜드, 게임사이언스(Gamescience)를 설립했습니다.
과학 실험용 등의 정밀 주사위는 아주 제한적인 용도였고, 대중용 정밀 주사위는 게임사이언스가 개척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다면체 정밀 주사위는 독보적이었죠. 게임사이언스가 게임용 정밀 주사위를 1970년대부터 시장에 도입했고, 이후 90년대까지도 정밀 주사위라는 개념은 매니아들의 영역이었죠.
루이스 조키는 군 출신이면서 천문학이나 수학에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게임에 사용하는 주사위가 통계적으로 불공정하면 안 된다는 신념이 있었어요. 일반적인 주사위 제조사는 금형에서 나온 주사위를 갈아내거나 광을 냈기 때문에 표면은 예쁘고 부드럽지만 균형이 조금 깨졌습니다. 반면 게임사이언스는 금형에서 뽑은 그대로, 즉 모서리가 뾰족한 상태로 유지해서 가공을 덜한 대신 정밀도와 공정성을 높였습니다. 이 때문에 숫자도 음각으로 파인 상태에서 컬러도 안 칠해진 채로 판매했고, 구매자가 직접 마커나 페인트로 칠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조키는 Gen Con이나 Origin 같은 RPG 행사에 직접 나가서 주사위를 판매했습니다. 장인정신, 선구자, 세일즈맨이 혼합된 캐릭터였죠. 조키는 정밀 주사위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실제로 주사위를 굴려서 통계를 내기도 했습니다. 게임사이언스는 그야말로 "게이머의, 게이머에 의한, 게이머를 위한" 브랜드였습니다.
(주사위 실험 관련 재밌는 글 하나: http://www.1000d4.com/category/dice/)
요즘은 가공 기술들이 발전해서 체스엑스(Chessex)나 큐-워크샵(Q Workshop) 등의 여러 브랜드들도 균형 문제로 게임이 크게 좌우되지 않는 고품질의 주사위들을 만들고 있죠. 나무나 고무 주사위 등은 재질이 가볍고 가공이 부실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보드 게임 구성품 주사위는 충분히 무난합니다. 결국 기술이 평준화 되고 외형의 트렌드가 변화하며 개성있는 브랜드들이 많아지면서 게임사이언스의 존재감은 약해지기 시작했죠. 누군가가 떠오르죠? 그리고 아마도, 확실하진 않지만 2018년 전후로 게임사이언스는 사업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올드 스쿨 RPG를 혼자 즐기기 시작할 때 게임사이언스 주사위를 다시 찾아봤어요. 그런데 너무 희귀해졌고, 일단 상태도 좋지 않더라고요 (내구도 문제가 지적되곤 하는데요, Gamestation 에 양도 후 품질 저하에 격노한 조키가 권리를 다시 찾으려는 과정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생략합니다). 관심을 돌려서 다른 여러 주사위들을 구경하기 시작하면서 금속 주사위에 조금씩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큐-워크샵을 비롯해서 Die Hard나 Level Up 등 화려한 주사위들이 엄청 많았는데 이쁘긴하지만 썩 내키지는 않았어요. 그러다 우연히 어떤 주사위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구매를 해버렸습니다. 미니멀한 폰트에 클래식한 느낌이 들어서 무슨 유물처럼 보이는 맛이 있더라고요. 올드 스쿨 RPG나 2d6 Dungeon, Quest for the lost pixel 들처럼 레트로한 게임에 사용하니 만족감이 높았습니다.
아마도 1인 게임을 즐기는 시간이 많이지면서 제가 예전에 알지 못했던 취향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 시작은 아마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었나 생각은 합니다만, 거의 완벽하게 이거다! 라고 느꼈던 게임은 파이널 걸인 것 같습니다. 파이널 걸은 카드를 사용하는 게임입니다. 그런데 카드 내용이 바로 실행되는 것이 아니고 추가로 주사위를 굴립니다. 이 부분이 재밌는 부분이면서 걱정이 되기도 하는 부분입니다. 주사위로 단순히 성공과 실패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의 경우 게임이 파이널 걸에게 처벌을 가합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파이널 걸이 길을 걷다가 죽어요. 미칠 노릇이죠. 그런데 이 부분이 파이널 걸이라는 트로프를 게임 안에서 구현시키는 재밌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파이널 걸은 항상 플레이스루 형식으로 후기를 올리곤 했는데, 언제 한 번 게임의 규칙 등을 자세히 적어보고 싶긴하네요.
아무튼 주말이니까 여러분,
Keep on gam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