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카페 도전하는 아저씨 이야기(9) 처음의 마음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번 올린 글이 1월이었으니 벌써 네 달이 넘게 시간이 지났네요. 지금 보니 꽤 거창하게 글을 썼었는데, 실제로 거창한 게 맞기는 한 것 같습니다 ㅎㅎ 물론 거창한 가게를 차린다는 차원이 아니라, 저라는 사람의 인생을 꽤나 걸고 도전하는 거다 보니 저라는 소소한 한 인간 입장에선 거창한 일이 맞는 것 같아요.
그렇게 거창한 마음가짐으로 시작한 소소한 보드게임카페를 오늘 오픈했습니다. 가게 준비하면서 너무 너무 정신이 없고 바쁘고 그러다 보니 여력이 없어서 글 하나 쓸 생각을 못했는데, 이렇게 가게 오픈을 해서야 글을 쓰게 되었네요. 네, 오픈을 하고 나니 제일 한가해지네요 ㅎㅎ
작년 하반기부터 보드게임카페 알바를 시작하고, 카페를 해봐야겠다는 확신을 가진 다음 회사에 퇴직 의사를 밝힌 게 올 1월, 마지막 출근을 2월 중순에 하고 3월부터 공식적으로 백수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12년을 한 회사에서 쉬지 않고 일했는데 인생의 전환점에서 여행 한 번은 다녀오자 싶어서 2월에 긴 여행을 다녀오고, 3월부터 진짜 발로 뛰며 준비를 했습니다.
우선 번화가의 데이트족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은 확고했습니다. 당연히 번화한 곳일수록 월세가 비싸지만, 저는 보드게임을 아는 사람들만 오는 카페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어요. 데이트를 하러 나왔다가 우연히, 또는 친구랑 만나러 나왔다 우연히 보드게임을 해봤을 때 행복한 경험을 준다면 분명 다시 찾을 거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보드게임이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운 경험인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그러려면 제일 먼저 보드게임의 진정한 재미를 제대로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일단 제가 재밌게 한 게임들, 실패 없는 게임들을 위주로 알고리듬을 짜봤어요. 수많은 머글들을 영업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할루젠 말고 더 많은 좋은 게임들이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요. 그리고 손님들이 그 게임들의 재미를 100% 느낄 수 있도록 제가 최대한 정성들여 설명하려고 합니다.
보드게임을 처음 접하느 사람들일수록 게임을 하면서 겪는 다른 경험들도 모두 만족스러운 경험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하나의 시간을 전체적인 덩어리로 기억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인테리어도 최대한 밝고 경쾌하게, 원두나 티, 주스도 최대한 신경쓰고 컵이나 코스터, 포크나 메뉴판까지 열심히 신경썼어요. 손님들이 보드게임카페에서 만족스러운 경험을 해서 보드게임하는 시간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좋겠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욕심인 것 같긴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보드게이머들에게도 만족스러운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보드게이머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서는 어떤 게 필요할까 자문해봤을 때 나온 답들을 최대한 반영해보고자 했습니다. 우선 재미있는 전략게임들이 많아야 하고, 해보고 싶었는데 사기에는 애매한 게임들도 있으면 좋고, 한정판이나 빅박스, 고급 코인 같은 사치품으로도 게임을 해봤으면 하고. 모든 걸 갖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게이머 생활하면서 꽤 다양한 리스트를 갖추어 왔고 또 이번 카페 준비하면서도 많이 샀는데, 앞으로도 게임이나 부속품에 소비는 계속 할 작정입니다. 사실 사고 싶은 게임 사면서 비용 처리하는 거보다 행복한 게 없는 거 같아요...
그리고 또 게이머에게 중요한 게 테이블과 의자, 조명인 것 같아요. 일단 조명은 정말 눈이 안 아플 수준에서 최대한 밝은 백색으로 했습니다. 그림자가 지지 않도록 조명을 끊기지 않게 배치하면서요. 의자는 인테리어에 어울리면서 최대한 편한 의자들 위주로 골랐어요. 오래 앉아도 불편하지 않게 푹신푹신한 쿠션과 등받이가 있는 것들로요. 테이블이 사실 제일 걱정이었는데, 넓지 않은 공간에서 테이블이 클수록 자리 수가 줄어들다보니 그 균형을 맞추는 게 어려웠습니다. 2인 기준 마음 같아선 가로 80에 세로 90으로, 4인 기준 160에 90으로 하고 싶었지만 결국 2인 75에 80, 4인 150에 80으로 하게 됐습니다. 10센티 크고 작은 게 공간에 이렇게 영향을 크게 주는 건지 미처 몰랐어요.
게이머들의 게임비 부담도 최대한 줄이고 싶어서 평일과 주말 모두 종일요금제를 만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도심이다보니 더 싸게 하긴 어려웠지만, 하루 종일 전략 게임 몇 판 해도 게임비 부담은 많이 없었으면 해서요.
그래서 이 비싼 월세 내면서 안 망하고 할 수 있냐! 라는 게 제일 중요한 문제일 텐데, 어디서 월세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다가 칵테일을 하게 됐어요. 이것 때문에 일반음식점으로 허가가 나야 했고, 이것 때문에 또 몇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다행히 다 잘 해결되어서 주류 판매에 문제가 없게 됐습니다. 생레몬이나 생라임을 쓰진 못하지만, 오렌지필을 넣어 만들진 못하지만, 그래도 칵테일바 같은 술집보다는 훨씬 저렴하게 칵테일 가격을 책정해서 접근성을 높여보려구요. 일단 지인들 대상으로 이틀간 가오픈 했을 때의 반응은 아주 좋아서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물론 모든 술은 도수가 7도를 넘지 않는 것들만 준비했습니다. 정말 기분이 좋을 정도로만, 맛있게 먹을 정도로만 하고 취하지 않게요. 즐겁게 보드게임을 할 수 있도록 서비스하는 게 제 목표다보니 손님들이 너무 취해버리면 주객전도가 되니까요.
가게 운영하다보면 점점 더 원가 따지고 매출 따지고 비용 절감하려고 노력하고 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이런 처음의 마음은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려구요. 당장 1월에 썼던 글을 지금 읽어봐도 아 그때 내 결심이 저랬었지 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또 한참 뒤에 이 글을 읽으며 제 첫 마음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음... 오늘 손님이 없어서... 신나게 글을 쓰긴 썼는데 쓰다보니 꼭 홍보 목적인 것 같아서 마음이 별로지만... 보드라이프에 글을 써온 게 사실 홍보 목적은 처음부터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평범한 보드게이머 아저씨가 보드게임카페 차리는 이야기를 일기처럼 쓰고 싶었던 거라, 이번 글도 그냥 제가 가게를 이렇게 차리게 된 철학 아닌 철학에 대한 썰 정도로 가볍게 읽어주시면 참 감사하겠습니다.
창업하면서 실질적으로 겪고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법한 일들도 꼭 쓰고 싶었는데 너무 시간이 없어서 쓸 타이밍을 다 놓쳐버렸네요. 다음에라도 이런 것들 꼭 써보고 싶어요. 부동산 안 끼고 계약할 때 유의할 점, 임대 계약 해지 당할 때 대처 방법, 소방필증 요건, 인테리어할 때 꼭 신경써야 할 것들, 불편한 주방 사이즈, 바닥 평탄화가 왜 필요한가, 주류 업체 선정하기, 세무 법인 알아보기 뭐 이런 것들이요.
하지만 물론 앞으로 계속 너무 너무 바빠서... 영업 시간에 글 쓸 시간이 없으면 더 좋겠네요... ㅎㅎ 그렇게 되면 잠을 줄여서 집에서라도 쓸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