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딩에 대한 삐딱한 시선
(내용 추가: "펀딩"이라고 썼지만 사실상 킥스에 대한 글입니다. 국내 펀딩 플랫폼이나 킥스보다 작은 군소 플랫폼에 대해서는 맞지 않는 내용일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흥하는 소위 "펀딩"이라는 시스템으로 게임을 산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전에 제가 느끼는 펀딩에 대한 회의적 시각에 대해서 다른 분들과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펀딩을 긍정적으로 보시던 분께선 펀딩이란 애초에 "소비"가 아니고 "투자"라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투자인 만큼 투자 실패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지는 것이라고요. 펀딩에 대한 비판 중 많은 부분(이를테면 터무니없이 늦어지는 배송, 예상과 너무 다른 퀄리티)은 투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로 참여해서 나오는 부당한 비판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펀딩이란 선주문이나 예약주문과는 전적으로 다른 개념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전적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냥 완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이고 싶지 불확실한 결과물에 자금을 제공하는 투자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펀딩에는 앞으로도 결코 손대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런데 일이 여기서 그친다면 좋을텐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펀딩하고 싶은 분들은 펀딩하고, 그냥 이전처럼 사고 싶은 저같은 사람들은 그냥 사면 좋을텐데 말이죠.
요즘의 문제는 아무리 봐도 이전이라면 그냥 리테일로 나왔어야 할 게임들까지 펀딩이라는 거죽을 덮어쓰고 펀딩 플랫폼으로 출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하려는 말은 간단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펀딩이 아니면 게임을 출시할 수 없을 만큼 자금 조달이 어려운 신규/중소 업체가 아니라 기존에 많은 게임들을 성공적으로 - 심지어 펀딩이 아니라 리테일로도 발매한 전적이 있는 회사들이, 펀딩 실패하면 그대로 출시를 접을 가능성 따위는 애초에 조금도 없다는 듯이, 사실상 다 만들어 놓은 게임을 단지 판매 채널만 펀딩으로 바꿔서 내놓고 있는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겁니다.
(한국어판 펀딩의 경우에는 사실상 판매수량을 미리 예측하고 그에 맞추어 생산할 뿐인 만큼 개념적으로는 펀딩이 아니라 선주문과 다름없다고 봅니다.)
이들은 왜 그런 선택을 할까요? 그거야 펀딩을 하지 않는 저에게도 너무나 쉬운 문제입니다. 펀딩이 훨씬 돈을 모으기 쉬우니까겠죠.
10만원이 넘어가는 보드게임이라면 비싸다는 말이 당연히 따라붙는데, 어찌된 일인지 200불, 300불이 넘어가는 펀딩에는 별반 거부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어쩐지 콘솔 게임과 모바일 게임의 비교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이 콘솔게임에는 4~5만원에서 비싸봐야 9만원?이라는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있고, 이는 수년, 아니 수십년째 거의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가가 올랐는데도요. 그런데 이전에는 없던 모바일 게임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생기자, 사람들은 가격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10연뽑기 한번에 3만원이라는 새롭긴 하지만 기존 게이머에게는 말도 안 될 것 같은 가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영향은? 기존 게임 제작사들과 제작인력들이 대거 모바일로 옮겨가고 있는 모습이죠.
보드게임이야 펀딩으로 만든다고 보드게임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니까 콘솔 게임처럼 존망을 걱정할 필요야 없겠지만, 이렇게 펀딩 판이 계속 커져가다 보면 앞으로 펀딩을 거치지 않고 게임을 사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생기네요.
그러면 펀딩으로 사면 그만이지, 저는 뭐가 불만이라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걸까요?
그건 요즘 펀딩이 마치 DLC팔이처럼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처음 크라우드펀딩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을 당시의 긍정적 취지는 소규모 개발업체에 미리 자금조달과 판매수량 예측을 가능케 해서 실패 부담을 줄이고, 소비자들은 자금 부족으로 묻혀버릴지도 몰랐을 멋진 상품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그런데 요즘의 킥스타터 펀딩이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이제 펀딩이란 그냥 비싼 추가금 내고 DLC 사모으는 것이 주목적으로 변질되어 버린게 아닌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드네요.
펀딩이 대세가 되기 이전에는 보드게임 하나 값으로는 어지간한 대작이 아닌 이상에야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200$, 300$짜리 프로젝트가 이제는 허다합니다.
그만큼 게임의 질과 만족도가 올랐는지에 대해서는... 처음에 적었듯이 저는 펀딩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르겠네요.
비싼 게임들은 적어도 컴포의 질이라는 측면에선 납득할 수 있는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 컴포라는 것이 으레 그저 으리으리하게 잘 만든 미니어쳐들뿐인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감도 듭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의견이 많이 갈리겠지만, 적어도 제게는 게임의 외양보다는 해서 정말 재미가 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정말 재미있는 게임이라면 컴포는 그냥 가위로 자른 듯한 허접한 종이쪼가리들 뿐이라 해도 돈을 낼 겁니다.
정말 펀딩이 아니면 자금을 조달할 길이 없어서 펀딩으로 나와야 마땅할 그런 소규모 아마추어 제작자들의 도전작들은 이미 압도적 자금을 투자한 화려한 결과물로 시선을 사로잡는 중견기업들의 대작 뒤로 밀려 빛을 못 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