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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리뷰 및 잡설

1,453 조회

2024.04.09 14:33

0-1. 대망

사실 대한민국 사나이라면 한번 쯤은 임진왜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인지 대학시절에는 굳이 임진왜란 관련 역사서를 찾아보곤 했었다(그냥 우연히도 그 책이 눈에 띄었다는 사실은 묻어두자). 당시 도서관에서 징비록이나 난중일기, 난중잡록 등을 찾아 읽으며 느낀 궁금증이 있었다. 일본은 무슨 상황이었기에 우리나라에 쳐들어 온 걸까. 그래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나 전국시대 관련 자료 등 당시 일본 사료 또한 찾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간이 지나 출퇴근 시간이 편도 한시간 반 쯤일 무렵,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한 발버둥을 치던 때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책읽기였다. 몇가지 도서를 살펴보던 중 끝날 줄을 모르는 볼륨을 가지고 있던 책이 눈에 띄었다.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대망이었다. 아, 시간도 많은데 한 번쯤 읽어는 봐야겠다. 지적 허영이 반짝거려 결제에 자연스레 손이 가고, 퇴사가 먼저일지 이 책의 완독이 먼저일지 궁금할 정도로 수북한 활자의 향연에 묻혔던 시절이 기억난다.

이 책의 가장 큰 산은 1권이라 했던가. 얘들 이름은 왜 허구헌날 바뀌는거야, 걔가 걔 같은데, 아냐? 당췌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곱살 적 이야기는 언제 끝나는가 싶다가도 오다 노부나가의 활극이 시작되며 서서히 몰입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대망(도쿠가와 이에야스). 어째 그림은 한참 이후인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파도 판화가 그려져있지만. (출처 : https://www.yes24.com/Product/Goods/83497938))

오닌의 난으로 시작되어 종막에 와서는 우리의 역사와도 맞물린 일본의 전국시대. 물론 대망 이외에도 알게 모르게 많은 미디어로 그 시대를 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 또한 삼국지를 통해 스무스하게 신장의 야망 시리즈를 접한 적도 있었다. 토탈워는 말할 것도 없다. 그에 더해 언젠가는 NHK대하사극 보는 재미가 들렸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각트가 우에스기 겐신 역으로 분했다는 '풍림화산', 사나다 일족의 이야기였던 '사나다마루', 도요토미의 책사 이야기인 '군사 간베에' 등을 찾아보곤 했었다.

내게 쏟아지는 미디어 홍수 언저리에서 세키가하라가 보드게임으로 등장했으니 이목이 동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해보고 싶다! 흥미 본위로 해당 역사를 접했기 때문에 아는 바는 별로 없지만, 그저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0-2. 워게임

보드게이머라면, 아니 그 범주를 굳이 설정하지 말자. 나는 그랬다. 게임을 하다보니 좀 더 어렵고 복잡한 게임에 눈이 갔다. 마치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그게 더 재미있을 것 같은 느낌. 그 촘촘한 사다리 위에는 언제나 워게임이 있었다.

허나 내가 워게임에 손을 뻗은 이유를 단지 룰이 복잡하기 때문이라 할 수는 없었다. 상대와 건곤일척 승부를 가리며 전략과 전술로 상대를 제압하는, 마치 삼국지연의 속 제갈량이 된 듯한 용병술을 직접 구사해보고 싶다는 로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손뼉은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내가 하고 싶다해서 그런 보드게임을 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워게임은 일단 접근성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워게임이 가진 속성과도 관련이 있다고 본다.

(패스 오브 글로리. 이거 한글로 새로 나올 워게임인데 같이 할래?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image/1997675/paths-of-glory))

먼저 워게이머를 만족시킬만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실제와 같이 디테일한 컴포넌트의 움직임이 설정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진흙에서는 기동성이 떨어지며, 개활지는 표적이 되기 쉽다. 고지를 선점할 경우 유리하다, 상대의 측후면을 공격하는 것이 유리하다 등과 같은 자연스러운 상식을 모두 룰로 구현해 두어야 한다. 이는 좀 더 실제와 같은 전략을 게임 위에 발현할 수 있지만, 그만큼 익혀야 할 룰은 늘어나게 된다. 마치 걸음을 걷는 방법을 책으로 써놓았다고 해야할까.

그 뿐이랴. 특정한 시기의 전쟁을 배경으로 삼았을 때는 그 시기에 일어났던 일 등을 함께 룰로 설정해야 한다. 당시 어떤 병종은 어디에 강하고, 어느 지형에서 힘을 발휘했다는 디테일도 담아두면 좋다. 한 술 더 떠 A는 B지만 특별히 3라운드 한정 A는 C라고 한다. 왜? 그냥 그 시기에 그랬으니까.

그래, 이런걸 다 감안했다 치자. 어렵사리 전투를 맞닥뜨려도 워게임에 거부감이 드는 거대한 산, 불확정 요소가 게이머의 손을 가로막고 있다. 가령 말이 달리다 다리가 부러졌다든지, 진창에 발이 빠졌다든지, 총알이 불발 났다든지 하는 여러 요소를 전부 담을 수는 없으니 전투의 최종 결과는 언제나 주사위나 카드 등 운의 영역이 포함되곤 한다.

이런 것이 워게임의 기본 소양이라면 과연 누구나 즐길 수 있을까? 물론 많은 게이머는 손사래를 칠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시야를 넓혀 보면 장기나 체스도 광의의 워게임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그래, 굳이 저런 요소를 모두 담지 않아도 워게임은 만들 수 있어. 아냐,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심심해. 뭔가 더 필요해.

어떻게 하면 나 같은 사람도 만족할만한 워게임을 즐길 수 있을까. 적당한 룰과, 적당한 배경, 해당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손 쉽게 알려줄만한 그런 게임이 없을까. 워게임의 디테일과 접근성이 반비례하는 것 처럼, 많은 사람들이 즐기기 위한 최적의 위치를 찾은 워게임을 만나야 한다.

나에게 세키가하라는 딱 그런 게임이었다.

(세키가하라 플레이 보드)

1. 세키가하라가 뭔데?

우리에게는 세키가하라 전투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일본 내에서 박터지게 싸운 전투라는 것 이외에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나도 디테일하게 일본사를 공부한 것이 아니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슬하에 꼬마아이 하나가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라는 아이. 출생에 관련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지만. 여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정유재란) 말미에 사망하게 되는데, 유언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오대로(다섯명의 다이묘)에게 자기 아들 히데요리를 잘 부탁한다 당부하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출처 : https://www.letsgojp.com/archives/303547/))

그런데 그 오대로라는 것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잘 맞춰줘야 하는데, 이전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너무 비대칭적으로 컸다. 히데요시가 생전에 이에야스를 견제하려고 에도 뻘에다 던져놔도 알아서 개간 잘 하고, 임진왜란때도 개간 핑계로 세력을 보존하고 등등.

그나마 오대로 중 마에다 토시이에가 살아있을 때는 명목상으로나마 굴러갔는데, 그 마에다가 죽고나니 도쿠가와를 견제할만한 세력이 없었다. 그래서 아, 저 자가 일본을 집어삼키겠구나! 라고 도요토미 가의 가신, 이시다 미츠나리는 생각한다. 맞다.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에서 두들겨 맞았던 그 이시다 미츠나리이다.

도쿠가와 또한 나름대로 이시다 미츠나리와 그 일파가 거슬렸다. 자기를 적대하는 꼴도 그렇고. 그렇다고 일본 통일에 대한 욕망이 없었던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매체에서는 도쿠가와의 행적을 정당화하기도 하고, 늙은 너구리처럼 그리기도 한다.

1600년, 도쿠가와는 자기 가문에 충성하거나 그에 동조하는 여러 세력을 규합하여 거병한다. 간신배들의 손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구출한다는 명분이었다. 당시에는 결코 도쿠가와가 일본을 삼킨다는 명분이 아니었다. 물론 나중에는 그렇게 됐지만.

그에 반해 이시다 측도 역신 도쿠가와 세력을 박살내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도요토미가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 도쿠가와를 경계하는 사람, 그저 이시다 미츠나리의 친구여서 참전한 사람 등. 그런데 이시다 미츠나리는 행정능력은 뛰어났을 지언정, 군재(軍才)나 인망은 없었다. 그래서 총대장은 자신이 아닌 모리 데루모토를 앉히게 된다.

이 싸움이 커지고 커져, 이시다의 서군과 도쿠가와의 동군 두 세력으로 일본이 양분되는데, 그 세력이 각 8만여명씩이나 모이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다이묘들은 전국시대 100년의 역사에서 잔뼈가 구른 사람들이다 보니, 여러 모략에 능했다는 것이다. 어디에 줄 서는 것이 유리한지 간을 보는 형국이었다고나 할까.

여차저차 하여 결국 세키가하라에서 한판 승부가 펼쳐지게 된다. 경과는 다들 알다시피 고바야카와 이하의 배신으로 이시다의 서군이 패배하였고, 그 때문인지 거병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딱 하루만에 모든 승패의 판가름이 나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C%84%B8%ED%82%A4%EA%B0%80%ED%95%98%EB%9D%BC_%EC%A0%84%ED%88%AC))

식견이 짧은 탓에 함축적으로 설명하여 오류도 있고, 읽다보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도 있을 수 있겠다. 자세한 사항은 여러 서적 등을 찾아 읽으면 가장 좋지만, 몇 년 전 개봉했던 세키가하라 라는 영화에서도 해당 상황을 그리고 있으니 참조하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여튼 이 게임은 이러한 당시의 흐름 중, 거병과 합류부터 산발적인 전투와 세키가하라 합전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2. 죄송한데 세키가하라 게임 얘기 좀...

세키가하라는 동군과 서군으로 나뉜 두 세력의 워게임이다. 각 세력은 독특하게도 자신의 블록 앞면으로 하고 상대의 블록은 등지고 있는데, 이를 전장의 안개라고 부른다. 어느 정도 세력은 파악할 수 있으나, 직접적인 전투력은 파악하기 어렵도록 한 것이다.

(내 블록은 앞면이요, 상대는 뒷면이다.)

게임은 간략화되어 특수 세력을 제외하고는 한 세력 당 네 가문이 소속되어있다. 블록 당 새겨진 가몬(가문의 문장)의 개수가 곧 전투력이며, 몇몇 특수 블록은 가몬 이외에도 철포(조총)나 말이 새겨져 있다. 이는 당시의 특수병종을 간략히 나타냈다고 볼 수 있는데, 사용하기에 따라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기도 한다.

게임 자체는 카드를 채우고, 카드를 사용하는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있다. 카드를 내서 선후공을 정하고, 이동, 증원 룰에 따라 행동하다가 상대의 블록과 겹치게 이동하면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이 게임의 큰 틀이다.

전투는 크게 야전과 공성전으로 나뉘는데, 각각의 룰이 있다. 대개 야전을 수행하면 보통은 공격자부터 서로 카드와 블록을 하나씩 공개하며 전투력을 측정하게 된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각 카드에 새겨진 가몬과 블록의 가몬이 일치해야만 전투를 수행할 수 있으며, 특수카드를 내면서 특수한 문양을 가진 블록(철포나 기마병)을 함께 공개할 경우 그 전투력을 함께 올릴 수 있다.

서로 전투력을 비교하며 룰에 맞도록 피해 블록을 제거하고 패배측은 후퇴하게 되는데, 복잡할 것 없다. 상식에 맞게 퇴각하면 된다. 성 앞에서 싸웠다면 인원이 가능한 한 성 안으로 퇴각할 수도 있고, 비어있는 다른 길로도 퇴각할 수 있다.

그렇게 이동과 전투를 수행하며 각 플레이어는 리소스와 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는 게임 종료 시 각각 승점을 제공할 뿐더러, 플레이 도중에도 카드를 한 장 더 보충 한다든지 충원을 한 블록 더 할 수 있다든지 하는 이점을 제공한다.

(도쿠가와군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모든 블록이 제거되다. 왼쪽에는 우에다성에 있는 사나다의 육문전 가몬이 보인다.)

이제 이 게임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룰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서군은 가몬이 그려진 디스크가 두개 있다. 오동나무 모양은 도요토미가의 가몬이며 이는 히데요리 세력을 나타낸다. 히데요리는 서군 세력 내에 있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두 세력 모두 히데요리를 위해 거병했기 때문에, 도쿠가와군이 히데요리를 포섭하면 게임은 자동으로 동군이 승리한다.

또 다른 디스크는 사나다 마사유키의 육문전 가몬이다. 우에다성의 성주였던 그는 군략에 능했는데, 실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이 지휘하던 동군 후위병력 3만 가량을 소수의 병력으로 붙잡아 둔 것으로 유명하여, 그 역사적 활약상을 이 디스크의 활용으로 녹여 놓았다.

또한 서군의 총대장이라는 모리 데루모토는 비록 출전 했지만, 바지사장 답게 적극적인 전투 의지는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게임 내에도 오사카성 내에 틀어박혀 있는 모습이 구현되어있다. 또한 자기 아들(양자)이었던 모리 히데모토가 현장에 있었지만 당시 고구마 먹은듯한 발언이나 행동이 반영되었는지, 서군 블록 중 모리군이 가장 많으면서도 증원되는 모리군의 전투력은 그닥 센 것 같지 않다.

(모리 가문의 주력이 오사카성 내에 있는 것을 표현한 블록)

이외에도 세키가하라 전투의 포문을 열었던 이이 나오마사 블록이라든지 다이묘 출전 시의 룰이라든지 여러 세세한 것들이 있지만, 그보다 세키가하라가 품고 있는 가장 중요한 룰이 남아있다. 바로 배신이다. 나는 상대의 출진에 맞추어 충성심을 확인하는 카드를 낼 수 있는데, 만일 출진한 상대 블록과 동일한 가몬의 카드가 손에 더 없다면 그 출진한 블록은 배신을 하게 된다. 겨우 블록 하나가 배신 하는 게 대수냐고 볼 수도 있지만, 이 블록 하나가 게임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한방을 만들 수도 있다.

(잘만 써먹으면 K.O 펀치가 되는 로열티 카드)

3. 그래서 이 게임 재미있나요?

아마 워게임 장르로 치면 나는 이 게임을 가장 많이 했던 것 같다. 다른 훌륭한 게임도 많았지만, 끝내 손이 가는 건 이 게임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게임을 많이 플레이한 걸까.

일단 룰이 정말 쉽다. 워게임 치고는. 군사 블록에도 세세한 숫자가 써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몬의 개수만으로 전투력을 판가름 할 수 있다. 보드도 직관적이고, 움직일 수 있는 방법 등도 간단하다. 말이 워게임이지, 간단히 움직이다 이기는 게임이라고 보아도 좋다.

그리고 이 게임이 흥미로운 점은 서로 알 수 없는 승부가 펼쳐진다는 데에 있다. 실제 세키가하라 전투도 하루만에 끝난 것을 반영하듯, 이 게임 또한 전투가 살벌하게 벌어지지는 않는다. 서로 눈치보면서 멀티 먹듯 성을 점령하고, 리소스를 빼앗기 위한 기동이 벌어질 뿐이다. 거대한 블록더미는 서로 니가 와를 시전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그래서 실제로 이 게임은 히데요리를 잡거나 이시다, 도쿠가와를 물리치기보다는 모든 라운드가 끝나고 점수로 게임의 승패가 갈리는 경우 또한 많다. 말 그대로 서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간만 보는 것이다. 하지만 워게임은 모르는 법, 이대로 패색이 짙어진다면 에라 모르겠다 하며 적진에 승부를 볼 수도 있다. 전투력 자체가 오롯이 블록의 수량으로만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블록과 함께 카드를 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만일을 위한 최후의 수단은 꼬옥 품고 있게 된다.

만일 처절한 전투를 상상하고 게임을 즐긴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가령 이 게임이 세키가하라 당일의 이야기만을 다루었다면 좀 더 박진감 넘치는 스타일의 게임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오오타니 요시츠구나 시마 사콘, 혹은 동군의 구로다 나가마사나 혼다 타다카츠 등의 활약상을 직접 조종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게임은 그런 컨셉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의 몇주동안의 소집과 행군, 그리고 어디선가에서 벌어지는 한 방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이 게임에 대해 변호하기를 분명 워게임이지만, 전투보다는 기동과 포석 등의 핸드관리를 바탕에 깔고 벌어지는 한판 승부가 이 게임의 참맛이라 표현한다.

(공성전 중인 서군. 하지만 이 공격으로 인해 이시다의 위치가 탄로나고 말았다.)

4. 즐기다 만 듯한 워게임

마지막의 설명을 읽고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게임에 대한 불호를 아무리 배경이나 다른 이야기로 덮으려 해도, 변치 않는 점이 있다. 나는 치고 받는 워게임이 하고 싶다고!!

물론 이 게임도 어느 정도 치고 받을 수는 있지만, 분명히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맛은 없다. 오히려 잘 깔아놨는데 다른 전투는 다 이겨놓고도 한 번 졌다고 허무하게 끝날 수도 있겠다. 상대 입장에서는 어깨를 으쓱대며 전략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당하는 쪽에서는 이런 허무한 게임이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런 건 여타 워게임도 마찬가지다. 체스도 체크메이트 되면 프로모션 몇개를 했든 진 게 아닌가.

어찌저찌 전투를 수행한다 쳐도, 핸드와 블록의 제한 때문에 시원한 한판 승부가 아닌 찜찜한 졸전 한 판 후에 게임이 끝날 수도 있다. 난 이런 걸 원한 게 아닌데, 병력 잔뜩 끌어 모아놓고 왜 출진을 못하니! 물론 이 입장은 서군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가 실제로 가졌던 한탄일 법도 하지만, 게이머인 우리 조차 무기력함에 빠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만 이 게임은 전술적 측면에서의 전투를 다룬다기보다, 전략적 상황만 주어지고 내부의 디테일은 과감히 포기하는 선에서 카드로 용병술을 대신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그렇기에 핸드관리를 보급이나 용병술로 치환하여 안에 녹아든 시스템과 융화시키면 조금은 아쉬운 점에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날을 위해 준비한 결정적 한방)

그렇게 생각하면 이 게임은 세키가하라 전투의 디테일을 포기하고 최대한 룰을 간략화 하기 위한 여러 가지치기가 자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일반적인 게이머와 워게임을 즐기고자 하는 게이머 그 사이의 포지션을 비집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하지만 그 말을 반대로 하면 누구의 입맛에도 맞지 않는 게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일반적인 게이머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게임이며, 워게이머에게는 심심한 게임. 이런 포지션의 게임은 어찌보면 모두의 만족을 추구하려다, 오히려 모두의 불만족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게임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우리나라의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있는 일본 테마 게임이라는 것이다. 일본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국민이 많은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아무리 좋은 게임을 들이민다 한들 그게 먹힐까? 그냥 하는 말 같지만 예전에 이 게임을 들이밀었다가 한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일본 나오는 게임이라 싫어. 사실 그런 분들이 보기에 이 게임은 시스템 중 어떤 것이 좋고 나쁘고 할만한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테마 자체가 하기 싫다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5. 마무리

어째 게임 이야기보다 외적인 이야기가 더 많아지고 말았지만, 나는 이 게임을 꽤 좋아한다. 그래서 워게임 하고싶다는 누군가에게 스윽 들이밀며 권하기도 한다. 두시간도 안 되어 끝나는 워게임이란 얼마나 매력적인 말인지, 워게임을 동경하는 게이머의 입장에서 보면 이만한 선택지가 있을까?

보드게임 종이 좀 만져봤다 싶은 사람에게 권하기 좋은 워게임. 나름의 전략성을 갖추었으면서도 룰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게임. 당시의 시대상 또한 어느 정도 반영하여 룰에 녹인 게임. 쌓아두면 보기 좋아 이리저리 감상하기 좋은 게임.

워게임은 정말 다른 영역일까. 범접할 수 없는 수십페이지의 룰과 수 시간 이상의 게임 시간, 도무지 따라잡을 엄두가 나지 않는 기존 게이머와의 격차. 이런 거창함은 뒤로 미뤄두고 연인과도 한 판 쯤 즐겨볼만한 워게임이 있다면 어떨까.

(게임 종료 직후)

물론 역사를 다룬 워게임이기에 나름의 스토리 또한 만들 수 있다. 아, 그때 그냥 공격 할 걸! 저기서 시간이 끌려서 증원이 늦었어! 이이 나오마사가 거기서 전사하지 않았더라면! 오카자키 성을 공략한 내 전략이 어때? 와 같은 복기를 나누며 다음에 한 판 더 하자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을 정도의 가벼움. 이 모든 것들이 세키가하라를 인기게임의 반열에 올려 놓은 핵심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나 또한 이 게임을 즐기며 유사 소설같은 후기를 올렸을 정도이니(이 후기는 원하시면 슬쩍 올려보는 걸로...).

분명 세키가하라가 최고의 워게임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타협을 본, 다른 게이머에게도 부담없이 권할만한 최선의 근처에서 서성이는 워게임이라 생각한다. 아, 워게임 하고 싶은데 애매하다 싶을때 문득 생각나는 그런 게임. 나에게는 세키가하라가 그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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