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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게모니 리뷰

2,681 조회

2024.04.05 05:49

1. 비운의 게임

지난 달 바이마르를 플레이하며 헤게모니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헤게모니가 요즘 그렇게 인기가 많을 줄 몰랐다던가, 바이마르와 헤게모니가 비슷한 느낌일까 하는 막연한 상상 등. 그 이후 주녕이가 헤게모니를 위한 자리를 따로 마련해두겠다는 멋진 제안을 하였다. 아, 나야 좋지! 그리고 한달 여가 지나자 정말로 그 자리가 생기고야 말았다.

나에게 헤게모니는 비운의 게임이다. 처음 우연찮게 이 게임을 접했을 때는, 와 드디어 이런 게임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비대칭 전략게임인데, 하나의 국가에서 벌어지는 계층 간 알력 다툼이라니! 마치 내가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 싶었다. 국가 내 세력의 치열한 이합집산을 어떻게든 보드게임으로 구현해보고자 했던 나의 공상이 정말로 실현되었구나.

게임을 선주문하고 받았을 때, 처음 컴포넌트를 보았을 때 느꼈다. 아, 이 게임 아무나 해줄 수 없는 게임이겠구나. 룰도 대강 읽는 둥 마는 둥. 그렇게 책장 한켠 고이 잠들어있다 몇년 후 보드게임을 정리 할 때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그 게임.

훗날 이렇게 회자될 줄 알았다면 한 번 쯤은 해봤을텐데 하고 후회했었다. 그래도, 이제 내 것이 아니더라도, 지금이라도 이렇게 플레이 할 수 있다면 사뭇 진했던 여한을 조금은 풀 수 있지않을까.

2. 헤게모니의 구조

(룰 설명 중)

플레이어는 총 네 계층을 각각 플레이하게 된다. 두 계층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동자, 자본가이며 다른 하나는 중산층이라 불린다. 사실 노동자가 중산층일 수도 있지만 게임이니까 그런 것 까지는 신경쓰지 말자. 재미있는 건 세 계층 이외에도 정부 플레이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부 구성원 또한 어떤 층위에 들어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이 게임 내에서는 구성원을 학술적으로 나누었다기 보다는 어떤 선입견이나 우리가 알고 있는 명칭으로 파생되는 스테레오 타입을 간단히 구현했다고 보는 게 좋겠다.

노동자는 말 그대로 고용되어 근로하며 수입이 발생하고, 그에 따른 소득세를 지불한다. 만일 같은 직종에 여러 인원이 근무하게 되면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으며, 이는 누적 승점을 제공하기도 한다.

노동자의 특징이자 승점을 내는 대표적인 방식은 인구와 번영도의 증가이다. 하지만 막연한 인구의 증가는 식량이나 소득세, 공공서비스 등에 대한 지출 부담과, 기업의 폐업이나 공공기관의 축소로 실업이 증가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해당 플레이어는 적절한 인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번영도는 교육서비스나 사치품을 소비하면 증가하는데, 이것은 노동자가 라운드 내에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승점이 된다.

따라서 노동자는 원하는 공공서비스 확충이나 임금을 올리기 위한(혹은 임금을 방어하기 위한) 투쟁을 이어간다.

반대로 자본가는 기업 건설을 하고, 수익을 노동자와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내수(플레이어)만으로 원하는 소비가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수출 또한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 법인세 등의 과세는 줄이길 원하며 불필요한 경쟁이 될 수 있는 정부 주도의 공공서비스를 선호하지 않는 경향 또한 있다.

자본가의 승점은 대부분 그 라운드의 수익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노동자와는 반대로 임금은 낮게, 공공서비스 비용은 높게하여 정부주도의 생산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자본가가 가지고 있었던 다수의 방송국은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중산층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성격을 모두 갖는다. 때로는 자신의 기업체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가능하지는 않기 때문에, 기업이 불리할 때는 노동자의 편에서 함께 노동을 할 것인지, 아니면 기업가의 편에 서서 법률을 개정하기 위해 노력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플레이 해 본 결과, 중산층은 자신만의 명확한 방향이 있는 것이 아니니 한 두번이라도 해본 플레이어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정부는 이 게임 내에서 가장 이질적인 집단이다. 말 그대로 헤게모니를 쟁취하기 위한 노동자와 자본가의 줄다리기에서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맡는다. 물론 적극적인 행정으로 인한 심판자의 역할을 맡을 수도 있고, 말 그대로 조타수의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 허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정부의 승점은 누군가 공공서비스를 이용했을때 직접 얻거나, 어떤 사건을 해결했을 때 각 계층의 지지를 받고 그 지지의 하위 두 계층에 해당하는 지지의 승점을 받는다. 한마디로 한 계층의 편애는 승점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한편 정부가 사용하는 돈은 플레이어가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주머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국고에 의해 운용된다. 따라서 정부의 무차별적 서비스는 국고의 고갈로 이어지게 되어 imf 구제금융과 같은 정부의 위기로 이어지게 된다.

이 게임은 각 라운드마다 핸드에 7장의 카드를 쥐고 각 플레이어마다 5장을 플레이하면 한 라운드가 끝나게 되는데, 플레이어는 카드의 능력을 사용할지 기본행동을 할지 정해야 한다. 카드의 능력은 기본행동보다 더욱 강력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알맞은 카드의 능력을 쓸 수는 없으니 기본행동을 적절히 선택해야 한다. 또한 기본행동 이외에도 모든 플레이어는 부수적인 자유행동을 할 수 있다. 자유행동은 말 그대로 조금은 보조적인 행동인데, 상황에 따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한 라운드가 마무리되면 각자 소비와 지출을 하게 되고 플레이어들이 입안한 정책을 토대로 수정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플레이어는 먼저 해당 정책의 가부를 결정하게 되고, 해당 가부를 토대로 큐브를 5개 꺼내어 찬반에 투표하게 된다. 하지만 큐브가 유리한 계층에게 기울었다 해서 무조건 해당 정책의 찬반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추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 큐브를 동시에 내놓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추가하면 그 목표의 가부를 정할 수 있다.

영향력 큐브는 게임 내 큰 가치가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 영향력이 높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큐브를 보면 법안의 발휘가 생각보다 어려워진다. 영향력 큐브는 미디어나 공공서비스 등으로 얻을 수 있는데, 실례로 자본가가 소유한 다수의 미디어 파워는 의사결정을 그 방향으로 이끌어갈 힘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다섯 라운드 동안 게임이 진행되며 최종승점에 따라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대략적인 게임의 흐름이다.

3. 노사정의 좌충우돌 헤게모니 쟁탈전

이 게임은 무조건 2:1이 유리하다. 어느 게임이야 안 그렇겠냐만은. 어쨌든 그래서 노동자가 중산층과 한 편이 되든, 자본가가 그러하든 중산층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중산층 플레이어는 본의아니게 캐스팅 보트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너무 극단이 유리한 방향으로 가는 것은 중산층 플레이에 좋지 않기 때문에 해당 플레이어는 이를 잘 파악해야 한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중산층은 애매한 플레이로 얼마나 줄을 잘 타느냐, 그리고 자신의 플레이를 다른 플레이어와의 이익에 묻어가느냐가 중요하다.

한편 정부는 의외로 신경쓸 것이 많다. 노사의 헤게모니 갈등에 가끔은 노동자 손을, 가끔은 자본가의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 이는 물론 게임의 재미를 위한 조정이기도 하지만 그 행동 자체가 본인의 플레이에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국고가 너무 쌓여도 좋지 않다. 인구집단이 공공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면 자신의 승점을 쌓기에도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공서비스를 무작정 늘리게 되면 국고가 바닥나 부도가 일어나게 된다.

이를 위해 실제로 다른 플레이어는 좀 더 싼 내수용 식량보다 관세를 부과해야하는 수입식량을 소비하여 imf 사태를 미연에 방지했던 적이 있었다. imf의 개입은 정책 조정 등 다른 플레이어에게도 치명적인 상황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정책의 변화로 늘어나는 공공기관)

한마디로 이 게임은 노사간의 힘겨루기, 캐스팅보트 중산층, 심판 정부의 우당탕 헤게모니 쟁탈전이라고 표현 할 수 있다.

4. 그래서 재미는?

건조한 국가 계층 시뮬레이터가 아닌 이상, 게임이 가진 재미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게임은 비대칭 전략 게임이기에 어느 정도의 유불리를 가지고 시작한다고 본다. 특히 첫라운드 이후의 최저임금이나 세율 조정 등은 게임의 승패를 좌우할만한 파워를 가지고 있어 보였다.

그래서 정부나 다른 플레이어는 정책이 최대한 극단에 위치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아 보였다. 중산층은 한쪽으로 정책이 기울 때 어느 정도 자신도 이익을 볼 수 있으나, 그 시너지는 자본가와 노동자에 비견할 바가 못되기 때문에 너무 극단주의로 치닫는 것을 막아야 한다. 다만 반대로 말하면 잠시 극단주의에 치달았을 때도 중산층은 어느 정도 이익을 볼 수 있으니, 최대한 그 상태에서도 볼 수 있는 이익은 보아야한다.

이런 게임에서 밸런싱을 기가막히게 잡지 않아도 게임성을 크게 해치지 않는 이유는 견제와 균형을 수행할 다른 플레이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게임은 그런 어려운 책무를 디자이너가 아닌 플레이어가 하기 때문에 게임 내에서 크게 이질감이 들지 않았다. 초장부터 균형이 안맞는 게임이라면, 그 균형을 맞춰주지 않은 다른 플레이어의 잘못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얼핏 들으면 이 게임의 단점 같지만 그게 단점으로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정말 조그마한 사회를 구현해놓은 듯한 게임의 구성 때문이다. 좌우 극단으로 흐르지 않도록 유지하면서 공공서비스를 유지해야하는 정부와 각자의 권익을 찾으려는 플레이어들의 헤게모니 쟁탈전은 마치 이름을 하모니로 바꿔도 좋을 듯한 재미있는 불협화음의 연속이었다.

(게임 종료가 임박하자 줄어드는 사기업)

정책 변경 시, 다른 사람들 간의 연합구도가 형성되었을 때는 서운할 지언정 불쾌함은 없었다. 불균형을 균형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게임의 구조 덕이다. 결코 한 사람의 독주를 허용하려 하지 않는 듯이. 하지만 게임을 조금이나마 유리하게 끌고 가려면 상대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 정책이 왜 당신에게도 유리한지 게임 내내 나는 행동으로 설득해야 한다. 행동은 공약이며, 설득은 유세였고, 상대는 마치 유권자가 된 듯 했다.

게임 말미에 시계를 보니 언제 이렇게까지 됐어 싶을 정도로 게임 시간은 꽤 길었다. 장고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룰 설명이 1시간 반, 플레이가 3시간 반 정도 흘렀으니 말이다. 하지만 게임 내 시시각각 상황이 변화하므로, 텐션이 길게 유지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 긴 게임 시간을 잊게 만들어 줄 정도로 말이다. 내가 느끼기에는 오히려 5 라운드도 은근 짧은듯 긴듯 애매했다. 아니, 솔직히 한 라운드 정도는 더 있었으면 싶었을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게임 내내 기업이 문을 닫고, 공공기관과 중산층에서 노동자를 흡수하는 등의 행동이 마치 사회의 그것과 너무 닮아있어 놀라울 정도였다.

자칫 건조할 수도 있는 게임에 이 정도의 게임성을 부여한 건 정말 디자이너의 탁월함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게임의 단점은 딱 그것이다. 높은 진입장벽, 그리고 플레이타임. 그것을 극복할 동지들만 있다면 꼭 해볼만한 게임이다. 아, 이제는 게임 구하기 어렵다는 점도 함께.

(게임 종료 후)

5. 바이마르와 헤게모니

실존 국가의 정당 구성원이 되어 플레이하는 바이마르와, 가상의 국가에서 펼쳐지는 헤게모니는 일견 닮은 듯 하면서도 닮지 않았다. 바이마르는 한마디로 정치체제경쟁에 기반한 정당 간의 우열다툼이라면, 헤게모니는 정상국가 내에서 벌어지는 경제주도권 기반 경쟁 게임이다.

굳이 나누어 보자면, 국제정치나 역사(근현대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바이마르를 선호할 것이고, 경제학이나 재정학, 행정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헤게모니에 더 깊은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사실 위는 억지로 구분한 구분법이다. 하지만 바이마르가 역사시뮬레이터라면, 헤게모니가 경제시뮬레이터에 가깝다는 건 아마 견해가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이 우위에 있느냐, 무엇이 더 재미있었느냐에 쉽게 답할 수 없다.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른 장르의 게임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두 게임 모두 좋은 게임이고, 각자의 영역에서 충실하게 상황을 묘사하였다. 뭐, 둘 다 해 보는 수 밖에. 분명히 각자의 게임에는 서로가 갖지 않은 다른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전략유로게임의 틀에 더욱 가까운 것은 헤게모니이고, 바이마르는 테마역사물에 조금 더 가깝지 않을까 싶은 사견?

6. 마무리

게임한지 며칠이 지났지만 내가 어떻게 플레이했는지, 그 가상국가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었는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인상깊게 플레이했음이 분명하다. 재미있었다. 다음에 다른 계층으로 또다른 플레이를 해보고 싶다. 이것이 비대칭 전략게임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노림수임에도 그에 넘어가고야 만다.

아무리 비대칭 게임이라도 플레이의 결이 비슷하다면 금세 비슷한 게임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이 게임은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최소한 4번은 다른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다. 마치 4가지맛 아이스크림을 돌려서 먹어보는 풍족함이랄까?

게임의 재미는 입소문으로 어느 정도 입증되었지만, 이제는 판매가 불투명해진 게임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프다. 맞다, 게임에 하나하나 슬리브를 씌우고 애지중지했던 이유가 생각났다. 외산 게임이 고속 품절되던 그 시절, 이 게임은 언제 들어올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던 그 시절. 절판되면 다시 구하기 힘들거라는 막연함 때문에 느꼈던, 게임을 아끼기 위한 나의 자구책이었다. 왜 습관처럼 보드게임을 귀하게 여겼는지, 그 이유를 이 게임으로 인해 다시 깨우치게 되었다.

처음 룰북을 읽고 네 계층의 룰을 내가 다 익힌 뒤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막막해서, 그래서 룰북을 덮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imf는 뭐야, 정책은 뭐야, 승점은 각자 어떻게 나는지 하나하나 어떻게 다 기억해?

하지만 단언컨대 이 게임,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그리고 생각보다 잔룰도 없다. 그렇다. 나는 이 게임을 더 많은 사람들이 즐겨봤으면 좋겠다. 분명히 처분하기 전의 나처럼 잠자는 이 게임이 어딘가 있을 것이다. 두려움을 걷어내고 룰북을 깨워보자. 어떻게든 플레이 할 수 있다면, 이 게임은 분명히 재미로 화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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