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피 소감
영향력 게임에 한창 빠져있을 때쯤 이 게임의 존재는 언제나 저를 상상만으로 흥분? 시켰습니다.
언제나 살지 말지 갈등되는 마음으로 리뷰들을 읽었고 이 희한한 게임을 과연 우리 모임에서 돌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늘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날이 왔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전략 게임에 굉장히 능숙한 새로운 분이 모임에 들어왔거나,
우리 모임원들이 능숙하게 웨이트 4이상짜리 게임을 돌려서 완벽한 뽕에 취해 있던 날로 기억합니다.
그 정도로 정신이 취해 있어야 이 게임을 살 수 있었습니다.
모임원들을 실망 시키지 않기 위해 룰 공부, 플레이쓰루를 보며 열심히 공부했고
각고의 노력 끝에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룰설명을 해내고 들뜬 마음으로 게임을 돌렸습니다.
두 시간이 지나고...
우리 모임원들은 이 맵디 매운 마라탕을 끝내 다 먹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심지어 저 또한 이 게임에 당혹스러웠습니다.
내가 어떻게 마음대로 통제하기 힘든 복잡한 상황이 한꺼번에 프로그래밍 되는 게임 방식에,
인터랙션은 진짜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아주 매 턴 한 번 한 번이 뺨 귀싸대기를 날리는 수준이었고,
룰 설명 제외 두 시간이나 했지만 아직도 절반도 못한듯했습니다.
여론을 못 이겨 결국 중도 포기로 게임을 접었습니다.
솔직한 모임원들의 엄청난 혹평과 함께요.
그렇게 다시는 이 게임을 못 하게 될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도스피라는 이름이 뉴비들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과거에 있었던 흉폭한 전설적 존재로 남아
호사가들 사이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가끔 회자되곤 했었죠.
그렇게 시간이 한참 지나
바로 오늘.
모임원 한 분이 집벙개를 열였고 깔끔하게 5명을 계획했으나 모임장의 실수로 6명이 집벙개에 오게 되었습니다.
'6' 이 숫자는 보드 게임계의 악마와도 같은 숫자입니다. 정말 할 수 있는 게임이 애매하니까요.
이 악마와도 같은 인원수를 데리고 무엇을 할까.. 하다가.. 악마..?
책장 한구석 어둠 속에서 무시무시한 눈빛이 저를 쳐다보는 섬뜩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책장을 확인한 저는 그 악마의 눈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악어가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도스피 표지의 악마 아니 악어요.
아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랍니까.. 저는 정신이 홀린 듯 그 게임을 집었습니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킨 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아무것도 모른채 저를 기다리는 모임원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게임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사실 1년도 넘어서 이 게임 룰북을 다시 보고 설명하는데
설명에 막힘이 없었습니다.
게임에 잔룰이 거의 없고 개인판에 설명이 잘돼있어서 오래간만에 해도 진행이 수월해서 놀랐습니다.
제일 플레이어들이 헷갈렸던 부분이 우점 액션인데 이것도 한두 번 라운드 돌더니 모두 금방 이해했습니다.
개체 수가 제일 많은 동물이 높은 점수를 차지하고 (메뚜기 100마리가 높은 점수를 차지하지만)
환경요소에 제일 적합한 동물이 카드를 뽑는다. (코끼리 한 마리가 그 지역의 우점종이다)
게임은 룰 설명 제외 4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플탐이 나름 길면 길다고 할 수 있지만 몇만 년의 역사를 단 4시간으로 압축시킨 다는 생각을 하면?
네 뭐 그렇고요.
워낙에 고정되는 판세 없이 게임이 확확 바뀌는 게 다른 영향력 게임과는 다르게,
뒤처지는 사람도 정말 얼마든지 본인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1등을 차지할 수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극 초반에 종족 특유의 환경적응력을 자랑하던 양서류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밉상으로 찍혀 초반, 중반 심지어 후반까지 압도적 꼴등을 하며 망가졌는데
최후반 마지막 두 라운드에 남들 치고받고 할 때 지구의 끝자락에서 고이 참아왔던 도마뱀 원기옥을 퍼트리며 1등을 3점 차로 따라오는 기염을 토하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양서류처럼 실제로 동물들이 간단한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테마에 기이할 정도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유류는 그 수가 동률이면 언제나 이기니까 어느 곳이든 다른 동물과 경쟁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고 (지능의 우월함을 드러내듯)
파충류는 그 특유의 음침함?으로 다른 세력들 틈바구니에서 조금씩 우점을 하며 초 중 후반까지 게임을 엄청 리드했었습니다.
조류는 정말 비행 +2 능력이 정말 안 좋아 보였으나 게임 후반 땅의 환경요소들이 바뀌고, 온갖 천재지변이 일어나며 상황이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살던 보금자리를 떠나 멀리 적합한 곳을 떠나는 능력이 빛을 발했습니다.
거미류는 정말 공생하면 안 되겠더군요. 같은 지역에 있는 동물들을 계속 잡아먹고 이들이 점차 발을 넓히는 순간 정말 그 땅의 다른 동물 종들은 와들와들 떨며 거미의 한 끼 식사가 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곤충류는 정말 번식에 특화되어 모두가 떠나는 툰드라 지역에 계속 곤충 종을 한 개씩 뿌려 툰드라 생존 점수를 꾸준히 먹어서 후반까지 유리한 고지에 계속 서 있었고요.
게임은 마지막에 맛 좋은 자리로 민족 대이동을 떠난 조류가 이겼지만 모두의 점수 차가 근소해 다른 동물 종들은 실수 하나가 정말 아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게임 액션들도 정말 흥미로왔습니다.
얼핏 보면 추상 전략처럼 보이는 이 액션들이 실행단계 때 흘러가는 걸 보고 있자면
정말 이 게임은 테마성이 미쳤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테마에 잘 어울리는 게임도 참 드물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잔인할 정도의 인터랙션, 내가 컨트롤하기 힘든 상황의 흐름 또한
빙하기가 몰려오고 지형이 뒤틀리는 자연의 흐름에서 고군분투하는 생물종을 그대로 플레이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네. 이 게임은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생존입니다.
플레이 초점을 거기에 맞춘다면 이 게임을 더 재밌게, 테마에 몰입하며 즐기 실 수 있을 겁니다.
몇만년의 거대했던 지구의 역사에 들어가 장엄한 다큐멘터리 한편을 찍으며 저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모든 건 앞으로 다가올 기후변화에서 생존 연습이 아닐까?
이제는 저희 모임에 이 게임이 씌워진 오명이 벗겨지길 바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