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화 잡담 : 번역의 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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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전공이 국어였는데, 당시에 저는 하이퍼텍스트 문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가장 기본 원리 중에 한 가지를 꼽아볼까요.
왕이 죽었다
왕비가 죽었다
전쟁이 일어났다
역병이 돌았다
이 네 개의 문장은 그 순서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따라 똑같은 문장인데도 그 인과 관계가 달라집니다. 전쟁이 일어나 왕이 죽고 병이 돌아서 왕비가 죽었을 수도 있고요, 역병으로 왕과 왕비가 죽자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의 정의는 방대해서 딱 잘라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다층적 텍스트 구조가 그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이번 아컴 호러 카드 게임의 미소스 팩을 번역하면서 이것이 생각이 나더군요. 아젠다와 액트 중에 어느 것이 먼저 나가는가에 따라서 이야기의 질감이 달라지는 것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아도 아컴 호러 카드 게임이 가진 거대한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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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번역을 하면서 가장 난감했던 것은 바로 ‘Oath’였습니다. 모두에게 친숙한 ‘맹세’라는 표현을 놔 두고 서약이라고 번역하게 된 것에는 이런 연유가 있습니다.
과거로부터의 메아리 확장 안에는 Posessed Oathspeaker라는 카드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카드에 대한 번역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전에 디센트에서 Oathkeeper를 이미 맹약자라는 식으로 번역한 적이 있었는데요. 이번 시나리오의 메인 빌런격인 고대의 존재 하스터와는 입밖으로 말을 한다는 개념이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그의 이름을 잘못 부르면 지옥을 본다는 설정도 있지만, 그와 관련한 원 소설에서도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알려져 있죠.
일단 oath를 맹세가 아니라 서약이라고 번역한 것은, 하스터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단순히 맹세하는 개념보다 일종의 계약의 느낌을 좀 더 살리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간단하게 번역한다면 디센트 때처럼 ‘서약자’라고 번역을 하는 게 편하겠죠. 그런데 저는 Oathspeaker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speaker라는 말, 즉 ‘말을 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살리고 싶었습니다. 원전으로도 그렇고 이번 확장판의 내용 자체로서도, ‘말해선 안 될 것을 말했다’는 맥락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마음 같아서는 ‘서약을 말한 자’라고 하고 싶은데, 더 큰 문제는 앞에 Possessed가 붙어 있는 겁니다. 이 말은 ‘무언가에 사로잡혔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보통 빙의 상태 같은 것이죠. 그렇다고 빙의된이라고 하기도 뭣하고, 지금은 ‘악에 씐’이라고 번역했지만 딱히 이것도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 크툴루 신화의 고대의 존재들을 선악으로 분리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Possessed이기 때문에 이자가 괴물처럼 되어 버린 것이 있어서 저는 ‘악에 씐’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게 앞에 붙다 보니 ‘악에 씐 서약을 말한 자’라고 하게 되면, 악에 씐 것이 ‘자’가 아니고 ‘서약’인 것처럼도 느껴집니다. 애매한 수식구문의 오류에 해당하죠.
그래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역시 그렇게 딱 이거다 싶게 속 시원히 마음에 들진 않으나 ‘악에 씐 서약발화자’라고 번역했습니다. ㅎㅎ 입에 착 달라붙지 않아 좀 그렇지만 어쨌든 지금으로선 최선이라고 믿고 있을 따름입니다... ㅎㅎ
영어에 대한 전문성도, 크툴루 신화에 관련된 지식도 다 좀 부족하다 보니 좀 미흡한 번역이 있을 수 있는 점 늘 양해 부탁드립니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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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서약에서 액트 2b의 이름에 ‘한 떼의 거위 세 마리 Three Geese in a flock’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무슨 숙어인가 해서 검색해 봤는데 아무리 해도 숙어나 관용구는 아니더군요. 그렇다고 내용과 관련도 전혀 없고.......
라고 생각하다가 불현듯 알게 되었습니다. 저 말은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작품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스포일러의 느낌이 날 수도 있으니 이 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게임을 즐기실 분은 저 제목을 보았을 때 한 번쯤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어떤 작품인지를 검색해 보시고 액트 2b의 내용을 보시면 좀 더 좋을 것 같네요.
제가 한글화 자료를 만든다고 그냥 덮어버리긴 좀 아쉬운 FFG의 센스라서 여기에 덧붙여 설명을 넣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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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위치 레거시와 카르코사로 가는 길은 정말 다릅니다. 던위치 레거시가 호러 액션물이었다면 카르코사로 가는 길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아주 훌륭한 오컬트물입니다. 양면 카드의 특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번엔 캠페인 가이드까지 아주 현란합니다. 게다가 지금 현재 마지막 팩인 ‘진실의 망령’의 투 비 컨티뉴는 그 어떤 미소스팩보다 사람을 가만 있지 못하게 만들더군요. ㅎㅎ 뒷내용이 궁금해서 환장할 지경입니다. ㅋㅋ
지금까지 추가된 플레이어 카드들로 인해서, 제가 생각했을 땐 구도자가 직업들 통틀어 최강인 듯합니다. 생존자는 더욱 재미있어졌고, 수호자는 구도자에게 모자란 10%를 채워주기 위한 캐릭터로 거듭나는 느낌입니다. ㅋㅋ (쓰자니 효율이 나쁘고 빼자니 전투력이 너무 줄어 버리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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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다음의 세 개 팩은 마지막 팩이 나오는 시점을 기준으로 제가 세 팩을 다 입수한 이후에 한 번에 다 작업해서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동안에는 다른 재미있는 것들을 먼저 좀 즐기는 방향으로. ㅎ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