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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드라이프에 올린 자료는 모두 직접 작업한 비공식 한국어 규칙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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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이지만 경쟁하지 않을 때 더 빛이 나는 게임
사실상 취미로써의 보드게임을 접은 현재로써, 보드게임에 대해서 사색에 잠길 때가 많습니다.
주로 떠올리는 주제 중 하나로 '좋은 보드게임은 무엇인가'를 들 수 있겠네요.
특별히 좋은 보드게임에 대해 정의하고 싶은 생각도 없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좋은 보드게임의 기준을 세우는 데 상당한 영향을 준 게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2019년 도쿄 게임마켓 봄에서 발표된 게임 "나인 타일 패닉"입니다.
이미 아는 분들은 다 알고 계시지만, 나인 타일 패닉은 오잉크 게임즈에서 2015년에 발표한 나인 타일의 고도화된 버전입니다.
나인 타일은 룩셈부르크 출신의 보드게임 디자이너, Jean-Claude Pellin의 작품입니다.
그는 2014년 마다가스카를 테마로 한 카드 게임 "Sifaka"를 시작으로 벌써 10 작품 이상 발표한 베테랑 작가입니다.
그의 창작 스타일은 최대한 게임을 단순하게, 그리고 쉽게 익숙해지며, 특별한 서술 없이도 직관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하고, 여기에 서로 간의 상호작용까지 중요시합니다.
그러한 그의 이상은 나인 타일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 - 오잉크 게임즈 공식 홈페이지
본래 나인 타일은 총 6가지의 문양으로 3x3 패턴이 그려진 목표 카드가 공개되면 누구보다 빠르게 그 카드 패턴과 동일한 패턴이 되도록 9개의 타일을 배치하는 덱스터리티 게임이었습니다.
선명한 색감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문양으로 아이들이 하기에 더 없이 좋은 보드게임이긴 하지만, 어른들이 함께 즐기기에는 심심한 것이 사실이었죠.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Jean-Claude Pellin과 오잉크 게임즈의 컬래버레이션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 성공에 힘 입어 나인 타일의 후속 작품을 기획하게 되었지요.
Jean-Claude Pellin과 유사한 철학을 가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 거주하는 Jens Merkl까지 합세한 나인 타일은 작은 마을을 이루는 길이 되었고, 이윽고 '메트로 타일즈(Metro Tiles)'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에센에서 듣게 된 오잉크 게임즈의 대표 사사키 준의 '마음에 들지만, 무언가 부족하다'는 피드백으로, 둘은 연구를 거듭하여 지금의 나인 타일 패닉을 완성하게 됩니다.
나인 타일은 Jean-Claude Pellin가 기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떠올린 아이디어로 탄생한 반면, 나인 타일 패닉은 두 사람의 철저한 연구 끝에 나온 게임인 것이죠.
더 많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어드릴 수 있지만, 글이 쓸데 없이 길어질 것 같고, 또 이를 누설하는 것에는 저작권(?) 문제도 있어서 탄생 비화는 이 정도로 줄이겠습니다.
아무튼, 기존의 나인 타일에 작은 마을의 길 꾸미기를 입히고 여기에 햄버거를 좋아하는 외계인의 침공과 이 외계인을 잡으려는 에이전트(요원)들, 그리고 햄버거가 널부러져 마냥 신난 아이들(남자아이와 여자아이)까지 유쾌하고 발랄한 테마를 입혀서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게임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나인 타일 패닉의 초안이었던, 경찰, 도둑, 돈이라는 테마(Crime Tiles)였다면 이런 발랄함도 없었겠죠.
햄버거를 좋아하는 외계인이 널부러뜨린 햄버거 때문에 신이 난 아이들이라니, 테마에서도 이미 혼란의 카오스, 즉 패닉의 상황이 그려지기도 하지만, 실제 게임을 하게 되면 9개의 타일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 지에 대해서도 패닉에 빠지니, 나인 타일 패닉이라는 이름까지도 완벽하다고 평가합니다.
전 기본적으로 오잉크 게임즈의 게임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오잉크 게임즈의 대표인 사사키 준씨가 만든 게임이라면, 더더욱 그 기대치가 낮은 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잉크 게임즈에는 그들만의 색깔이 있고, 철학이 있습니다.
사사키 준 본인의 게임이 아니라 외국 작가의 아이디어를 가져와 자사 게임으로 출판할 때도 말입니다.
물론, 오잉크 게임즈에서도 꽤 많은 작품이 나온 만큼, 단순하지만 훌륭한 게임성을 지닌 게임도 나왔죠.
예를 들면, 마스크맨이라던가 스타트 업스, 덤불 속과 같은 게임들 말입니다. 물론 여기는 개인의 취향이라는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아무튼.
그 중에서도 나인 타일 패닉은 오잉크 게임즈 내에서 뿐만 아니라 여느 보드게임과 비교해서도 훌륭한 게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덱스터리티라고 생각하고 접근하면, 나인 타일 패닉은 누구보다 빨리 9개의 타일로 목표에 걸맞는 마을을 만들수록 유리한 게임이 맞습니다. 실제로도 그렇게 평가하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하지만 거기서 그치는 게임이었다면, 이 게임은 나인 타일과 다를 바 없는 게임일 뿐더러 제가 높게 평가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두 작가에 이번에는 사사키 준까지 가세하였고, 이 게임이 무조건 마을을 빨리 만드는 사람이 이기는 것을 조절하기 위하여 무수한 테스트를 거쳐 '빨리 만들면 좋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이긴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다양한 목표 카드를 만들었고, 이 카드들을 하나만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3개를 공개함으로써 플레이어로 하여금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죠. 겹치는 목표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서로 상충하는 목표가 나왔을 때는, 반드시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므로, 무엇을 포기할 지 고민하게 만드는 순기능이 작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점수의 기준이, 단순하게 빨리 마을을 완성한 사람이 아니라, 목표 카드에 부합하게 만든 플레이어가 고득점을 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물론 플레이어는 마을을 완성하고 나서는 다시 타일을 재배치할 수 없습니다만, 마을을 완성하고 나서 손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제대로 한 것이 맞나?', '다른 사람은 잘 하고 있나?'하고 자기 타일을 다시 생각해 보거나 다른 사람의 플레이를 지켜보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손이 느린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늦게 완성하더라도 그 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목표에 부합하게 만들기만 하면 더 높은 점수를 얻게 되죠.
그리고 꼭 1등이 아니어도, 꼴등을 하더라도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구조에서 플레이어에 대한 배려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을을 아예 완성하지 못하면 득점할 수 없긴 하지만)
네, 애초에 나인 타일 패닉은 '이런 게임은 잘 하는 사람만 잘해서 하기 싫어'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한 게임입니다.
저는 이런 것을 2019년 도쿄 게임마켓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과거 게시글에서 언뜻 언급한 적 있었던, 웬 할아버지 게이머와 함께 같은 테이블에서 나인 타일 패닉을 함께 하게 되었을 적입니다.
이제는 꺾일대로 꺾인 나이이기 때문에 한 해 한 해 무뎌지고 있지만, 덱스터리티 게임을 잘 하는 편에 속합니다만, 이 때도 역시 위 사진에 보시는 것처럼 1등의 증표를 받았죠.
그런데 사실 이 게임이 더 즐거웠던 것은, '남보다 더 잘 해서', '1등만 얻는 스티커를 얻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일찌감치 마을을 완성하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 마을을 만드는 것을 보고 있을 때, '어? 나보다 더 조건을 잘 맞췄는데?'하는 위기감, 그러한 위기감을 느끼고도 다시 마을에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에 오는 초조함도 분명 이 게임을 즐겁게 만드는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것은, 할아버지 게이머가 모래 시계가 다 떨어질 동안에도 좀처럼 마을을 완성하지 못했을 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게임을 함께하는 플레이어들 뿐만 아니라 룰 설명을 했던 직원 분까지도 함께, '이건 이렇게 돌리면 될 것 같은데요? 아, 아니네?', '이거랑 이거랑 바꿔보면 어떨까요?'하면서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서 할아버지의 마을을 완성시키려고 했던, 그리고 마침내 완성을 시켰을 때 모두가 '해냈다!'고 느꼈던 그 상황과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경험입니다. 누가 점수가 더 높고 낮은 지는 별로 의미가 없게 되었죠.
바로 이 때의 경험 때문에, 나인 타일 패닉은 어디를 가서든 강력하게 추천하는 게임입니다.
보드게임을 하는 이유를, '이기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는 보드게임을 하는 이유를, 그리고 보드게임의 본질은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함'으로 정의합니다. 1인 전용 보드게임은 이런 궤에서 다소 벗어나긴 하지만, 아무튼 결국 온라인 게임이나 콘솔 게임과는 확연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카르카손을 PC 모니터 화면을 보면서 할 때와 오프라인에서 사람을 마주하고 직접 타일을 만지며 즐길 때의 감상이 다르기도 하고, 네트워크로 전 세계가 연결되는 현재에도 굳이 보드게임을 디지털 데이터가 아닌 실물로 인쇄를 하고 출력을 하여 패키지로 판매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직접적인 만남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경쟁이라는 구조를 취하여 게임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 경쟁이라는 구조 속에 숨겨진 보드게임의 참뜻은 '함께 하는 것의 소중함'이 아닐까요?
나인 타일 패닉은 많은 보드게임들 중에서도, 잠깐 경쟁이라는 것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주어, '보드게임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좋은 보드게임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에 실마리를 던져주는 게임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