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GENESIS) 플레이 후기 겸 리뷰
5인플이었고, 추가 규칙은 1턴 줄이는 것(원래 3번 시나리오는 4턴까지지만, 1턴 줄일 수 있다고 되어있습니다)과 진영 무작위 선택만 적용했습니다.
상세한 진행과정은 이전에 올라온 베크렐님의 후기를 참조하시면 좋습니다. 저는 진행과정 보다는 게임의 시스템과 그에 대해 느낀 점에 대해 써보려 합니다.
이 게임의 핵심은 땅따먹기입니다. 여타 대부분의 워게임들이 그러하듯이, 턴이 끝날때 가장 높은 승점을 보유한 플레이어가 승리합니다. 승점은 두 가지 방법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점령한 도시들의 경제력(매턴 그 총합만큼 돈을 얻습니다. 도시당 1~4까지입니다)총합과 `기념물` 건설이 그것입니다. 이중 기념물 건설은 보너스에 가깝습니다. 개당 1점에 그나마도 도시당 하나만 건설할 수 있습니다. 결국 승리하려면 최대한 많은 도시들을 점령하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죠. 그런데 경제력 3 이상인 도시의 대부분이 지도 중앙(가나안으로,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지방입니다)에 있습니다. 이쯤되면 디자이너의 의도가 보입니다. 어느 정도 세력을 키우면 세력들은 중앙의 도시들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게 될테고, 거기서 승리하는 사람이 최종 승자가 되는 것이죠.
<이곳이 가나안 지방입니다. 원과 사각형들이 도시이고, 그 옆에 있는 노란색 동그라미가 도시의 경제력입니다. 보시다시피 삼국(노랑:이집트, 연두:미타니, 진녹색:바빌론)이 각축을 벌이고 있습니다.>
게임의 주된 진행방식은 치트 앤 풀입니다. 각국 마다 4개의 활성화 치트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선제권을 잡은 나라가 지정한 나라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하나씩 사용합니다. 나머지 3개는 더미를 만들어서 무작위로 뽑습니다. 즉 한 플레이어가 연속으로 두 번 행동하거나 마지막에 몰아서 3번 행동하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죠. 그렇기에 첫 치트에는 병력의 확충과 유닛 배치같은, 대응태세를 갖춰놓고 그 다음 치트부터 정복이나 확장에 나서는 것을 의도한 거로 보입니다. 변화무쌍한 상황에 대한 대응을 즐기는 플레이어들에겐 어필할 수 있으나, 큰 그림을 그리기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매우 큰 단점이 될 듯 합니다. 그런 분들은 하우스룰을 도입하시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 같은 치트가 두 번 연속 나오면 다시 뽑는다거나, 첫 치트의 방식대로 모든 치트를 사용하는식으로 말이죠.
치트를 뽑은 플레이어는 다음의 절차에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우선 자신의 금고에서 돈 1을 지불해야 합니다. 매턴 수십씩 들어오는 수입에 비하면 매우 적은 금액입니다만, 못내면 행동을 아예 못하게 된다는 점에서 무시해선 안됩니다. 그 다음에 카드를 한 장 뽑는데, 카드에는 손패에 들고 있을 수 있는 카드와 바로 사용해야 하는 카드 두 종류가 있습니다. 전자는 모두 유익한 카드라고 보면 됩니다만, 문제는 후자입니다. 상당수가 뽑은 플레이어에게 패널티를 주는데, 개중엔 돈을 뺏어가는 것들도 있습니다. 금고에 돈을 얼마 안남겨두었다면 턴 내내 아무 행동도 못하게 될 수 있는거죠. 이렇게 사용한 카드들은 턴이 끝날 때마다 다시 섞여 덱에 돌아오니, 이미 나왔다고 방심할 수 없습니다. 운 나쁘면 한 플레이어가 너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을테니, 그런게 싫다면 하우스룰로 덱이 다 떨어졌을 때 다시 섞는 걸로 해도 좋을 거 같더군요.
<카드 이벤트로 등장한 카스카(Kaska)야만인입니다. 카드를 쓴 플레이어가 1턴간 조종하는 제 3세력이라 보면 됩니다. 이러한 이벤트들이 산적해있기에 방심은 금물입니다>
행동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주 이동, 부 행동(2번), 고용 행동입니다. 고용 행동은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라 보시면 됩니다. 행동 페이즈 이전에 부대 양성을 할 수 있는 절차가 있는데, 그 때는 국가의 인력(manpower)에 따라 공짜로 병력을 얻습니다. 반면에 고용 행동으로 유닛을 얻으려면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부대 양성이 국가의 기반 병력을 징집하는 것이라면, 고용 행동은 필요한 병력을 돈주고 고용해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급할때 병력을 땡겨오기 좋지만, 그만큼 가용 자원이 줄어들고 다음턴까지 소비하지 않으면 돈낭비가 된다는(인력을 넘어서는 병력은 다음턴 초에 자동으로 제거됩니다)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부 행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봅니다. 내가 가진 유닛 하나를 움직이거나, 건설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사실상 주 이동이나 건설행동을 위한 절차로 보입니다. 주 이동에 쓰일 대규모 군대에 병력을 조금이라도 더 확충하거나, 건설행동에 쓰일 평민 유닛을 원하는 도시에 보내는 것이죠. 건설행동은 말 그대로 건설입니다. 파괴된 도시나 방어벽(모든 도시는 방어력을 지닌채로 시작하는데, 적의 공격으로 파괴되면 자동으로 복구되지 않고 오직 평민의 건설 행동으로만 복구 가능합니다)을 재건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거나, 기념물을 지어 추가 승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오직 평민만이(노예도 가능하긴 한데, 플레이어 세력들간의 전투로만 얻을 수 있기에 많이 확충하기 어렵습니다) 건설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닛이나, 주의해야 할 점이 행동 중에는 확보가 불가능합니다. 부대 양성 절차에 배치한 군사 유닛을 전환하는 식으로 얻는데, 그만큼 병력 총수가 줄어들기에 적정선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주 이동은 행동 페이즈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입니다. 한 도시에 쌓여있는 유닛 전부를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죠. 보통 왕과 같이 움직이는 경우가 많은데, 왕이 이동력에 보너스를 주기 때문입니다. 유닛의 이동 포인트는 주사위를 굴려 나온 수만큼 얻는데, 왕은 자신의 능력(1~6까지입니다)만큼 이동력을 추가해줍니다. 전투시에도 왕의 능력이 도움을 주기에, 사실상 주 이동과 전투는 왕이 이끄는 부대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게임의 이동 시스템은 좀 특이한 편입니다. 확보한 이동 포인트를 쓸 때, 칸 단위로 쓰지 않습니다. 중간에 가로막는 적 유닛이나 중립 도시가 없다면, 이동력 1로 한 번에 수십 칸도 갈 수 있는 것이죠. 자기 영역내에서는 사실상 무한대의 이동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적을 공격할 때 1씩 무조건 사용해야하고 한 번에 적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면 물러나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동력은 전투에 사용하게 되죠. 에러플입니다. 이동력 1로 여러 칸 갈 수 있는 경우는 왕 혼자 움직일때 뿐입니다. 부대가 움직일땐 다른 게임들처럼 한 칸 단위로 이동력을 씁니다.
<하늘색이 플레이어 세력중 하나인 히타이트의 유닛들입니다. 중간에 적 유닛이나 중립(회색)도시가 없기에, 최상단의 히타이트 유닛이 맨 왼쪽의 주황색 도시로 이동력 1만 써서 갈 수 있습니다>
이동단계에서 상대방을 공격하기로 했다면 전투가 일어납니다. 다만 이 게임에는 요격이라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활성화되지 않은 플레이어가 자신의 유닛이 있는 곳 옆을 지나가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는 행동입니다. 활성화가 되지 않은 플레이어가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것을 방지해주는 시스템이 것이죠. 같은 장소만 아니면 무한정 할 수 있기에, 인접한 도시들끼리 서로 지원을 가주는 용도로 쓰거나 견제하고 싶은 상대국가의 이동을 방해하는 용도로 쓰면 딱일 듯 하네요.
전투는 이 게임의 가장 독특한 시스템입니다. 대부분의 전략단위 워게임에서 전투는 병력수만큼의 주사위를 굴리는 식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정 숫자 이상(보통은 5~6이거나 1~2이죠)이 나온 주사위의 개수만큼 상대에게 피해를 주게되죠. 대체로 대규모의 군대이거나 장군의 능력으로 주사위를 많이 굴리는 쪽이 유리하긴 합니다만, 심한 주사위 운으로 불리한쪽 군대가 역으로 대승하는 경우도 나옵니다. 전투가 많이 벌어진다면 그럭저럭 평균에 맞는 결과가 나오지만, 그렇지 않다면 운빨이 되기 십상이죠. 은근히 전투가 적게 벌어지는 히어 아이 스탠드나 버진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 게임에는 주사위 굴림 변화(Battle dice roll shift, 이하 bds)라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이 게임의 전투는 주사위 하나만 굴리는데, 그 값만큼 %로 상대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5가 나오면 적이 50%의 피해를 입는 식입니다). bds는 이를 플레이어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게해줍니다. 양측의 bds 총합의 차이만큼을 사용할 수 있는데, 내가 7이고 상대가 2라면 5를 쓸 수 있는 것이죠. 이는 엄청난 메리트입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주사위 값이 6이고 내가 2인 상황에서, 나의 bds가 5라면 상대의 주사위 값을 2(6-4)로 만들고 나의 값을 3(2+1)으로 높을 수 있는 것이죠. 이 게임의 전투는 더 많은 %의 피해를
입힌 쪽이 승리한다는 점에서, 주사위 값이 말도 안되게 불균형하게 나오더라도 이를 뒤집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bds를 얻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부대의 수입니다. 서로의 수를 비교해 배수만큼을 얻기에, 만약 내 부대가 적의 6배라면 6을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실제 전쟁에서 숫적 우세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감안하면, 이를 제대로 반영한 거의 유일한 게임이라고 봐도 좋을 정돕니다. 물론 지휘관이나 전술의 역할도 반영했습니다. 왕의 전술능력이나 일부 카드의 능력으로 bds를 얻을 수 있거든요. 사실 매전투마다 bds를 계산해야 한다는 점이 번거롭긴합니다. 그럼에도 플레이어의 행동이 반영될 여지가 크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해본 모든 워게임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시스템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다른 게임에도 적용시켜보고 싶을 정돕니다.
<게임 후반 바빌론과 미타니 양국의 주력부대가 대치중인 모습입니다. 바빌론의 왕(얼굴 그림이 그려진 조각)은 그 유명한 함무라비로, 그에 맞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술 능력(bds 추가)이 3에
작전능력(이동력 추가)이 5나 되죠. 이러한 왕을 잘 활용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모든 행동이 끝나면 소모 페이즈에 들어가는데, 이때 보급선 개념이 작용합니다. 수도에서 연결된 도시에 있는 유닛들은 보급을 받는데, 만약 중간에 파괴되거나 반란(이벤트나 공물 요구 등으로 발생하는데, 도시의 유닛들이 억류되고 보급을 끊고 수입도 주지 않기에 내버려두면 매우 골치 아파지는 상태입니다)이 일어난 도시가 있거나 적 유닛이 가로막고 있다면 보급이 끊기게 됩니다. 다만 주력 부대에겐 별 문제가 안됩니다. 보급이 끊긴 더미 당 주사위 하나를 굴려 나온 수의 반만큼을 제거하는데, 6이 나왔다 해도 수십명의 부대 중에 3명 죽는 정도로는 별 피해가 안되니까요. 진짜 문제는 도시를 점거중인 부대인데, 이 게임에서 도시 점령은 유닛이 하나 이상 주둔하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안전하거나 덜 중요한 도시에는 유닛 하나만 놔두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때 보급이 끊기면 주사위 굴림에 상관없이 무조건 해당 도시의 유닛이 전부 죽게 되는 것이죠. 잘못하면 점령한 도시들 여럿이 한꺼번에 날아가버리는 겁니다. 결국 보급선 확보를 무시해선 안된다는 것이죠.
<야만인인 해양민족(Sea people, 회색)에게 이집트의 도시가 파괴된 모습입니다. 왼쪽에 위치한 이집트가 유닛 하나가 점거중인 도시들은 결국 그 턴 마지막에 모두 제거되고, 다시 중립도시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국가간 밸런스는 대체로 맞는 편입니다. 지도 왼쪽에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나머지 국가들과 떨어져 있기에 안정적으로 확장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위에 야만족이나 소국들이 많기에 위험할 수 있습니다. 카드 이벤트로 상대 플레이어가 이들을 잡는 순간, 방비를 소홀히한 후방 도시(보통 본토의 도시가 이렇습니다) 다수를 파괴당할 수 있는 것이죠. 특히 이집트는 게임 최강의 야만인인 해양민족(무조건 bds2를 받고, 병력도 최대 12까지 나올 수 있습니다)의 침략을 받기 쉽기에 항상 후방의 안전을 조심해야 합니다.
바빌론도 오른쪽 하단에 위치해 있기에 지리적으로 유리하지만, 주위 도시의 경제력이 별로고 강력한 소국인 엘람(기본병력이 무려 12로 플레이어 국가 초기 전체병력과 맞먹는 수준입니다)이 수도 옆에 배치되어 있기에 쉽진 않습니다.
지도 중앙에 있는 미타니는 소국이나 야만족의 공격에서 안전한 편이지만, 오른쪽 바로 옆에 아시리아가 있고 왼쪽 조금 옆에 히타이트가 있다는 점에서 자칫하면 협공당할 수 있기에 위험하죠. 플레이어간의 외교에 다른 세력보다 더 신경써야 할 것입니다.
아시리아는 좀 애매합니다. 바빌론과 미타니 사이에 끼어있는데다, 주위에 좋은 도시도 없고 그렇다고 야만인에게서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플레이어들을 이간질시켜서 싸움을 붙이고, 그 틈을 타 확장하는 것이 기본전략이 될 듯합니다. 아무래도 고수용 세력인가 봅니다.
<전체 지도입니다. 노란색-이집트, 하늘색-히타이트, 연두색-미타니, 보라색-아시리아, 진녹색-바빌론입니다>
전반적으로 상당히 만족스러운 게임이었습니다. 이미 상술했듯이 플레이어의 능력이 반영될 수 있는 전투가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때때로 터지는 소국와 야만인 이벤트로 상대 플레이어를 괴롭혀주는 재미도 있고, 주 이동을 가능케 하는 이벤트 카드로 마지막 역전을 노린다거나 하는 등 카드를 사용하는 재미도 큽니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인데, 10턴을 다 플레이하는 풀 시나리오는 며칠씩 나눠서 할 수 있는 모임장소가 있는 플레이어만이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래도 게임을 못할 수준은 아닙니다. 3~4턴만 플레이하는 시나리오들이 다 수 있고, 옵션으로 국가별 활성화 치트를 하나씩 빼 3개씩만 사용하는 룰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하면 6~7시간 정도가 걸리는데, 이 정도면 다인플 전략 워게임의 평균적인 소요시간이라 볼 수 있겠죠. 국왕의 능력 편차가 큰 편인데, 이는 하우스룰로 너무 강한 왕은 아예 게임에서 제거한다거나(10턴 다 쓰는 시나리오 이외에는 아예 게임 룰로 일정 수의 왕을 제외하고 할 수 있게 되어있습니다)하는 식으로 밸런스를 맞출 수 있을 겁니다. 청동기 시대 중동이라는 독특한 배경과 다인플 워게임의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전략적인 전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게임은 다른 그 어떤 다인플 전략 워게임에 뒤지지 않는 매력이 있다고 말하고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