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룸헤이븐 간단한 리뷰

elven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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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5-4 오전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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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보드라이프에서도 많은 분들이 글룸헤이븐 리프린트 펀딩하시고 기다리고 계신 줄로 압니다.

보드게임긱에서는 어마어마하게 핫한 게임이고, 소량 출시된 게임임에도 이미 순위가 6위입니다.

지금 플레이어 평점이 9.13인데 굉장히 보기 드문 게임이고... 아마도 리프린트 되고 나면 무난히 1위를 바라볼 수도 있는 게임입니다.

국내에서는 아무래도 언어의 장벽도 있고 해서 관련된 글이 많지 않은데요. 해서 지금까지 플레이한 내용을 기반으로 간단하게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스포일러 없는 내용만 이야기하려고 하지만 민감하신 분들은 피하시는 것도 좋겠네요.

사실 스포일러 없이 하려면 사진은 다 빠질 수 밖에 없는 게임이긴 합니다.-_-;;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주 대단한 게임입니다.

제가 속한 모임은 본래 던전크롤러도 많이 돌리고 복잡한 룰에 거부감이 별로 없는 모임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강렬한 테마와 몰입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략적인 플레이를 요구하는 던전크롤러의 완성형에 가까운 게임입니다. 아래는 주요한 장점입니다.

1. 풍부한 컨텐츠

저희 파티가 현재 28개의 시나리오를 클리어했는데, 게임에 포함된 시나리오의 수가 90+개입니다.

솔로 시나리오 17개와 킥스타터 캠페인용 시나리오 10여개는 빼고 나온 숫자입니다.

물론 90개의 시나리오를 한번의 캠페인으로 다 플레이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조건이나 선택, 카드 드로우 등으로 인해 언락되지 않는 시나리오들이 있거든요. 그러나 한 시나리오를 실패해서 다시 플레이하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대략 70~90번 정도의 시나리오 플레이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시나리오 하나를 플레이하는 데는 시나리오의 종류마다 다르지만 약 2시간 정도가 걸립니다. 그런데 글룸헤이븐은 단순히 던전크롤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사이에 도시에서의 재정비와 캐릭터 빌딩, 이벤트 해결 등의 활동을 수행하게 됩니다. 한번에 10시간 정도를 플레이해도 시나리오를 4~5개 이상 플레이하기 어렵습니다. 단순 계산으로도 수백 시간의 플레이타임이 요구된다는 점을 알 수 있어요.

아무리 시나리오를 서로 다르게 만들었다 해도 이정도 되는 시간을 한 게임에 투자하다보면 반복적이라는 느낌이 들 수 밖에 없는데, 글룸헤이븐은 이 점을 레거시 요소를 이용해서 해결하고 있습니다.

다른 던전크롤러와 달리, 글룸헤이븐은 캐릭터와 플레이어가 1:1 대응하지 않습니다. 초기에 언락된 플레이어 클래스는 6개지만 캐릭터가 자신의 개인 목표를 달성하면 (강제로) 은퇴되고 새로운 캐릭터가 언락됩니다. 개인 퀘스트의 종류에 따라 얼마나 많은 플레이 끝에 은퇴하는지가 달라지지만 저희 경험으로는 5번 언저리의 레벨업, 혹은 10~20번의 던전 플레이를 경험할 정도로 플레이하고 나면 은퇴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듯 합니다. 그러면 파티의 조합이 달라지고, 클래스 간의 차이가 분명한 만큼 다음 플레이는 매우 달라지게 됩니다.

여기에 더해 스토리의 진행 역시 반복감을 덜어주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글룸헤이븐의 스토리는 비선형적이고, 플레이어의 선택에 의해 세계가 변화합니다. 아래에서 조금 더 상세히 설명드리겠지만, 이러한 부분에서 '던전 A를 돈다' 가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모험을 수행한다'라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시나리오 뿐 아니라 수많은 아이템, 무려 17개에 달하는 캐릭터 클래스, 수백 장의 이벤트 카드들은 정말이지 압도적입니다. '와 이 디자이너 정말 징하다. 이런 것 까지 만들어놓나' 싶은 생각이 분명 들게 될 거에요. 저는 80 달러에 이 게임을 샀는데, 컨텐츠의 양으로만 비교한다면 이 게임 하나가 다른 던전크롤러 몇 개의 풀 확장을 합쳐놓은 것 수준입니다.

2. 정교한 게임 메커니즘

판타지 던전 크롤러로써 글룸헤이븐이 다른 게임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게임 메커니즘입니다. 이 장르의 많은 게임들이 '이동 후 주사위 굴림 + 아이템, 스킬, 능력치에 의한 보정'이라는 큰 틀을 따르고 있는데, 본류에 해당하는 D&D/체인메일 계통의 게임이 터를 닦아놓은 검증된 시스템이고 이러한 기반 위에 변주를 더한 많은 명작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테마에의 몰입을 도와주는 댓가로 이 시스템은 많은 부분 전략성을 희생하게 됩니다. 아무리 운을 통제하기 위한 능력치와 스킬, 아이템을 넣더라도 결정적 인자로서의 주사위의 존재는 전략성과 양립되기 힘드니까요.

글룸헤이븐은 이 부분에서 아주 훌륭한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컨스트럭티드 덱이나 덱빌딩을 사용해 만든 덱에서 카드를 드로우하는 대신, 전체 카드를 모두 핸드에 들고 원할때 사용하되, 두 가지 이상의 사용법을 제공하는거죠.

주사위를 싫어하지 않는 플레이어로서 말씀드는데, 이 게임에서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언제 어떤 카드 콤보를 낼 것인가? 언제 로스트 카드를 사용하여, 전체 카드 풀을 줄이는(즉 캐릭터의 여력을 잃는) 대신 고비를 넘기기 위한 강력한 능력을 사용할 것인가? 현재 적이 사용할 가능성이 있는 능력의 종류와 선제권 속도는 어떤가? 우리 파티의 다른 플레이어들은 지금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초반의 많은 던전에서 감탄했던 것이, 시나리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파티의 모든 능력을 쥐어짤 필요가 있습니다. 파티원간의 많은 토의를 거쳐 수립된 계획이 제대로 기능해서 살아남은 한둘의 캐릭터의, 마지막 남은 카드 서너 장으로 던전을 클리어할 때의 성취감은 주사위에서 20이 나와 보스를 쓰러뜨릴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입니다.

물론 테마적 재미를 잃지 않기 위해 게임 자체에 적잖은 랜덤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데미지 수정 덱이 그 첫번째 예입니다. 이 덱은 퍼크를 얻어가면서 자신의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강화됩니다. 계획을 실패시킬 수 있는 변수를 덱에서 줄이고, 개인 혹은 파티원을 보조하기 위한 수정 카드를 추가하는 과정 자체도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재미가 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AI의 랜덤성입니다.

글룸헤이븐의 몬스터들은 종류별로 8장의 AI 카드를 가지고 있고, 매 턴마다 다른 전략을 수행합니다. 때로는 몬스터답게 결정타를 날리기 전에 머뭇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모든 계획을 망쳐놓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전략 콤보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잊지않겠다 우즈... 두고보자 블랙임프... 다시 보지 말자 케이브 베어...)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된 결과, 단순히 '모든 적을 쓰러트려라' 시나리오 조차도 자신의 캐릭터를 구성하는 어빌리티 카드, 아이템 세팅, 공격 수정치 덱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협력 퍼즐풀이가 됩니다.

3. 풍부한 테마성

게임을 하면서 따로 flavor text를 읽는 것이 테마에 몰입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특히나 언어적 장벽이 있는 우리들에게는 아무래도 게임 자체에만 집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따로 글룸헤이븐의 배경에 대해 글을 찾아보거나 하지 않았음에도, 30게임 이상 이 게임을 즐긴 결과 저는 글룸헤이븐의 세계관, 간략한 역사, 종족간의 갈등관계, 도시에 등장하는 이런저런 장소들에 대해 잘 알게 되었습니다. 시나리오, 시티/로드 이벤트 등을 통해서요.

글룸헤이븐에 도착한 풋내기 용병단으로써, 주인공 파티는 플레이어들과 마찬가지로 이 곳에 대해 잘 모르는 채로 시작합니다. 게임 룰북에도 세계에 대한 설명이 아예 빠져 있습니다. 시나리오북 처음에 등장하는 의뢰인의 종족조차, 이름만 알고 있지 대체 이곳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게임을 충실히 즐기면서, 이벤트들을 듣고, 시나리오들을 읽다보면, 캐릭터들이 글룸헤이븐 도시 안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점점 중요해지는 것 처럼 플레이어들도 글룸헤이븐에 대해 점점 더 잘 알아가게 됩니다.

게임의 디자이너는 이 부분에 특별한 신경을 써 두었습니다. 세계와 주인공 파티가 점점 진행/성장해 나가는 느낌을 줄 수 있도록요. 캐릭터가 은퇴하거나 새 클래스가 언락되면 해당 캐릭터에 관련된 새로운 이벤트가 출현합니다. 마을이 번영해나가면 상점에서 판매하는 아이템도 증가합니다.

플레이어 역시 점점 성장합니다. 몬스터의 행동 패턴을 알고, 자신의 캐릭터가 가지는 강점과 단점을 알고, 다른 동료에게서 얻을 수 있는 도움과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을 알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대체 레거시 요소가 던전크롤러와 어떻게 결합될 것인지 우려하시는 분들은 전혀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이지 완벽하게 구현해 두었으니까요. TRPG를 해 보신 분들은 대단히 경험많고 준비성 철저한 마스터가 진행하는 캠페인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물론 단점들도 있습니다.

1. 해도 너무한 볼륨

이 게임을 셋업하고 다시 박스에 집어넣는데는 각각 1시간~30분 가량이 걸립니다. 캠페인 보드, 시나리오 타일, 수십 종류의 몬스터, 파티에 속한 캐릭터 별로 어빌러티/개인매트/아이템/시트/공격 수정 카드들, 지형 토큰들, 체력/상태이상 토큰들, 캠페인 북과 많은 참고자료들...

'잠깐 만나서 한판 하는' 용도로는 저어언혀 써먹을 수 없고, 앉은 자리에서 끝장을 보는(그리고 순삭된 시간을 보고 어이없어하는) 경우에만 적합합니다. 이 게임 박스가 10kg입니다.-_- 대중교통으로 들고 다니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에요.

저희는 셋업해놓고 '아예 치우지 않는-_-'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5월초 연휴를 맞아서 하루에 16시간씩 하면서요...

2. 복잡한 룰

처음 10여시간 동안은 끊임없이 에러플과 정정을 거듭해가며 게임했고, 지금도 FAQ 정도는 계속 띄워놓고 게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실 게임 시스템 자체는 크게 복잡하지 않고, 카드 두장을 내려놓는다/행동 순서를 결정한다/차례대로 행동을 결정한다의 반복이지만, 워낙 볼륨이 볼륨이다보니 카드 능력을 두고 긴가민가 할 때가 없을 수가 없어요. 룰북은 전체적으로 잘 쓰인 편이고 소소한 에라타 말고는 2판에서도 크게 수정된 부분은 없습니다만, 카드는 좀 애매하게 쓰인 부분도 있고 2판에서 수정된 내용도 꽤 있습니다.

3. 초판-2판간 차이

초판 자체로도 훌륭합니다만, 캠페인 진행 속도를 좀 더 높이고 클래스간 삶의 질 차이를 좁히기 위한 수정 사항이 조금 있습니다.

이 볼륨의 게임에서 밸런스를 완전히 잡기란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하고 룰의 헛점을 이용한 꼼수는 거의 완벽하게 막아두었습니다만 1판 구매자에게는 아쉬운 부분일 수 있겠죠.

4. 시나리오 북 구성

글룸헤이븐의 디자이너는 플레이어들에게 많은 재량을 부여했습니다. 시나리오 난이도를 보정하는 기본적인 재량 외에도, 플레이어끼리 카드를/개인 퀘스트를 얼마나 공유할 것인가, 시나리오 북의 정보를 얼마나 오픈한 채로 진행할 것인가와 같은 부분에서요.

사실 이건 게임의 난이도를 가름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현재 룰북의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적용한다면, 모든 플레이어들은 시나리오의 전체 맵 레이아웃과 클리어 조건, 등장하는 몬스터의 종류, 보상 등을 모두 알고 있는 채로 시나리오를 시작하고 전투 목표/이번 시나리오를 위한 핸드 구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껏 긴장감을 조성하도록 도입부를 읽어놓고 마지막 x방에 xxx가 나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시작해버리면 아무래도 뭐랄까, 약간 cheesy하게 게임하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죠.

저희는 게임 진행의 편의를 위해 한명의 플레이어가 시나리오북의 도입부를 나머지 파티원들에게 읽어주고, 전체 타일의 종류와 몬스터의 종류를 알리지만(이는 게임 도중 플레이를 멈추고 새로운 컴포넌트를 찾는 일을 막기 위함입니다) 이 플레이어는 어느 방향으로 가는 게 좋다, 어딜 먼저 간다 등에 대한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고 방이 열릴 때 마다 이 플레이어가 새 방의 구성을 세팅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보드게임긱의 어느 유저가 인터랙티브 pdf를 만들어서 스포일링을 당하지 않고 시나리오를 셋업할 수 있도록 작업중이라는데, 작업이 완료되면 이를 사용해 볼까 생각하고 있는데요. 아무래도 로드/시티 이벤트의 뒷면을 읽거나 시나리오를 세팅하는 '반-마스터' 역할을 하는 플레이어가 조금 희생하는 구조를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아예 디센트의 Road to legends 앱 같은 앱을 만들어줬으면 어떨까 싶기도 한데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말 '명성이 헛되지 않은' 게임입니다. 제 여자친구는 글룸헤이븐을 시작한 이후로 다른 보드게임을 하자는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심지어 이번 연휴에 여행이라도 갈까 하는 제안을 단칼에 자르고 글룸헤이븐 파티를 모아보라고 합니다.-_-;; 최근 4일간 40시간 가까이 이 게임만 했는데, 내일도 하고 싶고 저녁부터 한밤중까지 할 겁니다....

결론은 짧게,

-복잡한 게임을 싫어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추천합니다.

되겠습니다. 전략 게이머는 퍼즐을 푸는 재미로, 테마 게임을 좋아하는 게이머는 풍부한 세계를 살아가는 재미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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