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생태계의 구성원이 되어보자.

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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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4-13 오전 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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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독 좋아하는 테마가 있다. 바로 ‘생태계’가 그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생명과학을 전공했다 보니, 이런 생명체들의 생존을 위한 먹이경쟁과 번식, 그리고 진화양상이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진다. 저마다 종의 유지를 위해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모든 생명체들끼리 상호 의존적인 생태계를 구성하는 것이 무척 흥미로운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보드게임을 통해서도 아주 훌륭하게 구현된다.

보통의 보드게임이 ‘보드판의 세계에서의 플레이어간의 상호작용’이 주가 된다면, 생태계를 다루는 게임들의 특성은 ‘플레이어들이 곧 보드판의 모든 것’이 되어서, 다른 플레이어들과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한명의 플레이어가 ‘이번 게임의 생태계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인터액션은 다른 모든 게임보다도 훨씬 강력할 수밖에 없고, 점수와 상관없이 각 플레이어는 생태계의 일원으로써 게임 플레이의 양상에 기여를 하게 된다.

‘에볼루션’하면 사람들은 2014년에 나온 보드게임을 떠올리겠지만, 사실 이 게임은 2010년에 카드게임으로 먼저 제작되었다. 이 카드게임은 카드를 두 가지 방법으로 쓸 수 있었는데, 하나는 ‘새로운 종’을 탄생시키는 것(이때는 뒷면을 그대로 내려놓는다. 뒷면이 양서류 모양인 것도 그 때문이다)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존재하는 종을 ‘진화’시키는 것이다. 카드 앞면에는 다양한 진화와 관련된 내용들이 있다. 보통 ‘큰 덩치, 지방 저장층, 수영능력’ 등이 있으며, 심지어는 ‘육식’이나, 그런 육식을 돕는 ‘지능’같은 진화 카드도 있다.

한 종에는 최대 세가지의 진화카드가 붙을 수 있고, 이 들을 이용해서 생태계에 존재하는 먹이를 먹으면서 생존하는 것이 목적이다.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먹이만 먹고 숨는 동물, 물에 살면서 지상의 위협을 피하는 동물, 지능을 이용하여 다른 종을 사냥하는 동물 등을 형성하면서, 이 생태계를 다양한 종들로 채우게 된다.

그리고 후에 에볼루션은 보드게임 버전으로 새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전에 없던 두가지의 개념이 등장한다. 각 종들은 이제 세가지의 진화카드 외에, 두가지의 수치를 지니게 된다. 바로 ‘덩치’와 ‘개체수’가 그것이다. 이전 카드게임에서는 종 전체의 생존이 진화양상에 의해 단적으로 결정되었다면, 이제 이 종의 절대적 수치를 키움으로써 좀 더 전략적 대응이 가능한 ‘전략게임’의 모습을 더 지니게 되었다.

한편 ‘원시 스프’라는 게임은 좀 더 직접적으로 개체의 생존을 위해 매 턴 고민을 해야하는 게임이다. 맵에 존재하는 먹이들을 찾아서 능동적으로 이동하여야 하고, 그런 과정에서 굶게 되면 시체가 되기도 한다.(시체는 다른 개체들의 훌륭한 먹이가 된다) 점점 황폐화되는 원시 스프 속에서, 각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종을 진화시키게 된다. 이때도 제한조건이 있는데, 카드 장수의 조건은 아니고 ‘자외선에 대한 저항도’가 그것이다. 진화를 거듭하여 복잡해진 종은, 그만큼 견고하지 못함을 뜻한다.

점차적으로 굶주리는 개체가 발생하면, 각 플레이어들은 이 생태계 내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선택을 하게된다. 물질대사의 양을 줄인다거나, 대사에 필요한 물질의 종류를 줄이는 것, 심지어는 다른 개체에 기생하거나 잡아먹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 게임도 결국 다른 플레이어들의 종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고, 환경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는 것이 핵심이다.

위의 게임들 보다는 좀 더 일반적인 유로게임에 가깝지만, 여전히 생태계를 다루는 게임에는 ‘도미넌트 스피시즈’가 빠질 수 없다. 이 게임은 각자 곤충류부터 조류와 포유류 중 하나를 맡아서, 지구에서 가장 번성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그를 위해서 플레이어들은 새로운 종들을 분화시키거나, 식생을 변화하고, 대 이주를 감행하거나, 빙하에서 생존하기 위해 적응하는 등의 여러 가지 전략을 취한다.

이게임은 다른 게임들에 비해 ‘진화’의 양상 자체가 다양하진 않다. 이 게임은 오로지 ‘식생’을 변화시키거나, 그 식생에 좀 더 최적화 시키는 것이 주이며, 나머지는 종의 관점이 아닌 오히려 ‘신(물론 없지만)’의 관점을 취한다. 대재앙을 직접 일으키고, 빙하의 방향을 조종하며, 지구에 새로운 타일을 놓아서 종들을 집단 대 이주 시킨다. 그럼에도 여전히 플레이어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식생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를 하며, 다른 종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결과적으로는 지구의 생태계를 다양하게 구성한다.

보드게임의 끝은 보통 유럽을 재패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최고의 마법사가 되거나 막대한 부를 쌓은 거상이 된다. 결국 이들은 인간사에서 흔해 빠진 이야기들이고, 인류사 전체로 비교했을 때는 사소한 사건들에 불과하다.(물론 유럽의 패자나 전쟁의 승패 등은 세계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지만) 이들은 흔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게임 내에서 다양한 생존방식을 가진 종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그들 내부의 완결성을 갖춘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다른 얘기다. 게임이 끝났을 때, 플레이어들은 승패를 떠나 저마다의 서사시를 쓴 것이자, 말 그대로 완결성을 갖춘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생명체들은 저마다 항상성의 유지와 유전자의 보존을 위해 치열한 투쟁을 하는 물질들이다. 이 물질들의 처절한 생존투쟁은 그어떤 전쟁사보다도 더 치열하고, 또한 이들이 이룬 생태계는 다른 어떤 기계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견고한 완결성을 지닌다. 이런 숭고한 경험을 직접 해보고 싶다면, 위의 보드게임들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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