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압] 과거의 나에게 당해서 쓰는 뻘글. 그리고 ㄱ~ㄹ 편.
지금까지 쓴 보드게임 리뷰 총 260편.
저는 신작의 흐름을 따라가기보단 이미 시중에 많이 풀린 게임 혹은 완전히 잊혀진 게임에 대해 많이 이야기 하는 편인데요.
아무래도
1. 내 취향을 거의 정확히 알고 있어서 필요한 구매만 하다보니 유행에 뒤쳐져서.
2. 매주 쏟아지는 보드게임 소식에 지쳐 아무관련 없는 특정 유튜브 채널(풍월량, 김실장, 책 리뷰)만 몇개 챙겨보니 정보 습득이 느려져서.
3. 유행을 노린 조회수보단 그냥 글을 통해 논리를 쌓아가는 과정이 재밌고, 집중도 되고, 스트레스가 풀려서.
4. 유행에 휘말려 잊혀진 게임이 안타까워서
5. 게임의 좋고 나쁨을 떠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등의 이유로 그냥 갑자기 "글을 써야겠다!" 하고 대상을 선정합니다.
(생각해보니 협찬은 예외네요. 부탁을 받으니까요. 다만 할 말이 딱히 없는 게임일 경우는 거절합니다.)
그렇다보니 가끔 중복리뷰를 작성하려는 실수가 벌어지곤 해요.
오늘도 업무와 육아를 마치고 "오늘은 글을 쓰고 싶네. 무슨 글을 써볼까~" 하며 게임을 둘러보다가 문득 발견한 람바삼바.
1살 된 아기랑 가끔 람바삼바로 놀아주다보니 "아, 그래. 이거 독특한 게임이지. 리뷰나 써볼까?" 하고
키보드를 가볍게 두드리다가 느낀 기묘한 감각.
"...나 이거 예전에 쓰지 않았나?"
그리고 찾아보니 있네요 -_-
심지어 읽어보니 지금 쓰려던 글과 5년전 의견이 거의 일치합니다.
뭐야 이거.
대신 아기가 가끔 가지고 노는 도전 골든벨 OX퀴즈를 발견하고 "음, 이것도 종종 혼자하면 재밌지." 라며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또 다시 찾아온 기묘한 감각.
찾아보니 또 있네요 -_-
생각도 비슷해. 심지어 람바삼바와 리뷰 넘버링 차이도 겨우 2.
뭐야. 나란 놈은 그때도 지금처럼 생각했던건가.
그땐 애도 없었는데.
나란 남자.
소나무 같은 남자.
그래서 대신 롤 포 잇! 이라는 정말 아~~~무도 모르고 너~~~~무나도 평범한 게임을 리뷰한다면 어떤 글이 나올까? 하며 실험적인 리뷰를 작성하려다가 뭔가 김이 새서 나중으로 미루고 뻘글이나 써봅니다.
리뷰가 지칠 때마다 나름의 도피처가 될 수 있도록 시리즈(?)로 올리려 해요.
A~Z 부터 하나씩 해볼까... ㄱ~ㅎ 까지 할까... 하다가 ㄱ~ㅎ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더 갯수가 적어서요 ㅋㅋㅋ)
보드게임 이야기를 살짝 섞겠지만 모두 보드게임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럼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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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ㄱ - 기억력 강화중!!
약 3개월 전 어떤 영상을 하나 보았습니다 (우영우 말고요!!).
플레잉카드(=트럼프카드)로 두 가지 기술을 시연하는 장면이었는데요.
첫번째는 무작위로 섞인 카드 한 벌의 순서를 정확히 암기하더니 특정 카드를 부르자 그 위치를 짚어냅니다. 그리고 같은 숫자를 가진 나머지 3장의 위치도 정확히 짚어내요.
두번째는 무작위로 섞인 카드 한 벌에서 한장을 뺀 뒤, 나머지 51장의 카드를 한장씩 불러주면 가만히 듣고 있다가 "....OO 카드가 없는 것 같은데?" 라고 말해요. 확인해보면 실제로 그 카드가 없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떤 원리로 가능한걸까? 이리저리 알아보니 페그 시스템이란걸 이용하더군요.
자세히 설명하면 복잡해지니, 정말 간단히 요약하면 0~10까지 숫자에 자음 알파벳을 대입하는 거예요.
1 - T / D (알파벳에 세로 줄이 하나)
2 - N (알파벳에 세로 줄이 두 개)
3 - M (알파벳에 세로 줄이 세 개)
이런식으로요
그리고 1~100까지 숫자마다 알파벳으로 단어를 만들어 외우는 것이예요.
1 - Toe (발가락 - T = 1)
2 - Noah (노아 - N = 2)
3 - Me (나 - M = 3)
.
.
.
11 - Dad (아빠 - D 가 두개)
12 - Tin (양철 - T = 1, N = 2)
13 - Tom (톰 - T = 1, M = 3)
.
.
.
21 - Nut(견과류 - N = 2, T = 1)
22 - Nun(수녀 - N이 두 개)
23 - Name(이름 - N = 2, M = 3)
.
.
.
이렇게 약 100개를 외웁니다 (패턴 때문에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
그럼 어떤 일이 가능해지느냐,
21 11 13 3 23 1 2 12 22
이런 숫자를 보았을 때 이게 머리속에서 이렇게 바뀝니다.
견과류, 아빠, 톰, 나, 이름 발가락, 노아, 양철, 수녀
그럼 머리속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죠.
"견과류를 퍼먹던 아빠가 톰과 제리를 보던 중인 나의 이름을 불렀다. 발가락 사이에 있는 때를 후비작거리며, 콧물 찔찔 흘리는 노아랑 같이 양철 바구니에 담긴 돈을 수녀님께 드리라고 하셨다."
숫자보단 이야기가 훨씬 더 기억하기 쉽죠? 자극적일수록 기억에 오래 남아서 좋아요.
이제 나중에 저 숫자를 다시 기억해야 할 일이 있을때 이야기를 떠올리고 숫자로 전환하면 됩니다.
"견과류(21)를 퍼먹던 아빠(11)가 톰(13)과 제리를 보던 중인 나의(3) 이름(23)를 불렀다. 발가락(1) 사이에 있는 때를 후비작거리며, 콧물 찔찔 흘리는 노아(2)랑 같이 양철(12) 바구니에 담긴 돈을 수녀(22)님께 드리라고 하셨다."
아주 손쉽게 9개의 숫자를 암기했죠.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을 알기 때문에 이야기를 되짚어 가면 몇번째에 등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역순으로 숫자를 외울수도 있죠.
덱에서 빠진 카드를 찾는 원리는 조금 다르지만 이처럼 이미지를 활용한 방법이더라고요.
최근 이 기술을 취미삼아 틈틈히 연습하고 있습니다.
목표는 카드 한벌을 1분 내에 외우는 것이예요. 무작위 숫자는 50개 정도 외우는 것이 목표고요.
아직 100개의 단어 중 60개 밖에 외우지 못했고 한참 머뭇거리며 25개 정도의 숫자를 간신히 외우게 되었지만 아직 고수처럼 집중해서 빠르게 치환하진 못하겠더라고요.
"우와... 그럼 나중에 님에게 카드 보여주면 다 외워서 털어버리겠네요 ㅡㅡ+"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카드를 암기하는데 집중력이 꽤 필요해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보드게임에 활용하긴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ㅋㅋ
그냥 취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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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ㄴ - 놀이란 무엇일까?
보드게임 온라인 스토어의 장바구니는 텅텅 비어있지만 아마존의 장바구니는 두 권의 책이 담겨있습니다.
최근 리뷰를 쓰다가 "...도대체 재미라는게 뭘까? 왜 게임을 하면서 재밌다고 느끼는걸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넷을 뒤적거리니 두 권의 책이 나오더라고요.
(보드게임 소식은 안보고 맨날 이런거나 찾고 있습니다 ㅡ_ㅡ)
하나는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 (밑의 책). 인간의 문화 내에서 놀이가 어떻게 발견되는가- 하는 책이고
또 하나는 로제 카유아의 놀이와 인간(위의 책). 인간의 놀이를 규칙과 의지로 나누고, 거기에서 4가지 하위 카테고리로 나누어 분석한 책이래요.
둘 다 게임관련 학과에서 인간을 이해하는데 자주 참조되는 책이라길래 장바구니에 넣어놓았습니다.
한글판이 있는걸로 아는데 캐나다에선 도통 구할 방법이 없으니... 많이 건조하겠지만 원서를 사서 읽어볼까 생각중이예요.
내가 좋아하는 걸 왜 좋아하는지 이해하는 계기가 될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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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ㄷ - 덕후가 아니예요!
매사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다보니 장기, 체스, 마작, 보드게임, TRPG, 마술, 소설 쓰기 등 오프라인 관련된 온갖 잡다한 취미를 경험했습니다.
(바둑은 배우고 싶은데 그 벽이 너무나 높아 유튜브로 프로리그 시청만...)
의외로 애니메이션 쪽은 거의 문외한인데요.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아는 작품(귀멸의 칼날, 강철의 연금술사, 베르세르크, 에반게리온 등)은 아~ 하고 알아듣지만 그 외의 것들은 어리둥절 합니다.
차도 거의 문외한이죠. (혼다와 현대 엠블럼을 아직도 헷갈려 합니다.) 오디오도, 프라모델도, 낚시도 전혀 몰라요.
드라마는 1년에 0개. 영화는 1년에 1편 정도.
아, 책은 좋아하네요.
이런 저인데도 아내는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어. 이미 훌륭한 덕력이다." 라며 고개를 저어요.
전 취미의 폭이 넓을 뿐. 그리고 보드게임 좋아함 + 글쓰기 좋아함의 교집합 때문에 나름 소소한 리뷰 활동을 하고 있을 뿐 덕후는 아니라고 항변하죠.
다른 사람들이 가진 보드게임 벽장 사진을 보여주며 "난 이렇게 되고 싶다고. 이 사람을 봐. 난 아직 짬밥이 안돼." 라고 말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습니다.
그래도 저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슬그머니 가방에서 게임을 하나 꺼내며 "OO씨, 이런 보드게임 해본 적 있나요? 최근에 배운건데요. 알려줄게요." 라며 신나서 알려줄 때.
너무나 신나하는 표정이 보여서 이미 옛적에 리뷰까지 쓴 작품을 모르는 척 초보처럼 규칙설명을 들을 때.
나를 상대로 재밌게 하는걸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을 때.
이럴 때가 찾아오면 나도 꽤나 덕력충만한 인간인가 하는 생각은 아주 조금 듭니다.
하지만 전 덕후가 아니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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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ㄹ - 롤(Roll)이 재밌는 게임도 있어요.
제 과거 리뷰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주사위를 굴려 결정하는게 싫다" 는 의견인데요.
내가 켜켜히 쌓아온 모든 전략이 주사위 한방에 와르르 무너지는게 정말 싫었어요.
지금은 누그러져서 많은 것을 내려놓으니 주사위가 가져오는 장점 또한 하나의 재미로 인정하고 어느정도 받아들일 수 있긴 하죠.
(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순간에 터지는 똥주사위로 게임이 휘청!!하고 기울어지는건 거북함을 느낍니다.)
이렇게 주사위를 기피하는 제가 주사위 굴리는 순간을 가장 기대하는 게임이 있습니다.
바로 TRPG의 시작. D&D예요.
(이거 참... 방금전까지 덕후가 아니라고 그렇게 강조해놓고 곧바로 TRPG 이야기를 하려니 좀....;;; )
일반적으로 보드게임에서는 나쁜 주사위 = 나쁜 결과 = 패배 = 나쁜 경험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아무리 운영을 잘해도 주사위가 1~2만 뜨는 날.
나는 최선을 다 했는데 내가 개입 할 수 없는 무언가(= 주사위 신)의 놀음으로 하루를 공친 것 같은 아쉬움이 크게 남을 때가 많죠.
그런데 D&D 같은 TRPG에서는 이렇게 1-2만 굴리는 사람도 사랑 받을 수 있습니다. 굴릴 때마다 이야기가 예상 외의 방향으로 틀어지거든요.
주사위가 잘 터지면
< 성에 잠입한다 -> 경비병을 지나친다 -> 보물창고에 간다 -> 보물 훔친다 -> 끝 >
로 끝날 이야기가
< 성에 잠입한다 -> 실패 -> 벽을 타고 올라간다 -> 실패 -> 떨어져서 부상 -> 감옥에 갇힌다 -> 탈출 시도한다 -> 실패 -> 경비병에게 구타 당한다 -> 마스터가 살짝 도와줘서 탈출한다 -> 복도를 기어가는데 누가 다가온다 -> 실패 -> 공주랑 마주친다 -> 입을 막는다 -> 실패 -> 공주가 비명을 지르자마자 들쳐메고 도망친다 -> 실패 -> 발이 걸려 넘어지며 공주에게 수플렉스 시전 -> 바닥에 메다 꽂았다 -> 경비가 봤다 -> 너 임마 잡히면 사형!! >
훨씬 더 기억에 오래 남는 게임으로 남게 되죠.
실패도 하나의 멋진 이야기로 남는 게임이라 그런지 D&D를 하는 날이면 친구들과 함께 "오늘은 얼마나 이야기가 꼬일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며 즐거워하곤 했습니다.
99% 제가 마스터를 맡다보니 위와 같은 극적인 상황은 자주 벌어지지 않았지만,
상황 판정을 위해 굴린 제 주사위가 1이 터지는걸 보며 크게 유리하게 스토리가 바뀌는걸 보고 기뻐하던 친구들이 생각나네요.
실패의 상징 1이라도 그런 즐거운 추억을 가득 줄 수 있다면 주사위를 마구 굴려대는 게임도 참 좋은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