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전 보드게임 잡담 #5 - 내 파이 건드리지 마

개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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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6-14 오후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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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냥 잡담 말고 께임얘기입니다. 생각난대로 주절주절 쓴거라 두서가 좀 없네요.

0. 파이 분할 문제

▲제 마음에 들게 나누셔야 할겁니다아.

여러분들의 앞에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파이 한 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제안을 하나 할게요. 지금부터 이 파이를 저를 포함한 다섯명이 나눠먹을겁니다.
참가자 1번부터 어떻게 나누고 싶은지 저에게 말씀 해 주시면, 가장 마음에 드는 답변을 하신 분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누군가는 "5명이니 5등분 해서 나눠먹는게 공평하지 않을까요?" 라고 할테고
또 누군가는 "그냥 주인이니까 반 가져가세요. 나머지 반은 저희가 나눠먹을게요." 라고 할테고
어쩌면 누군가는 "그냥 저는 1/8조각만 먹겠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혼자 다 드세요.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굶으라죠 뭐" 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물론 5명의 주린 배가 있는 상황이라면 5등분 해서 각자 한 조각씩의 행복을 느끼는 것이 도의적으로 맞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당장 3일동안 아무것도 못먹었다면요? 여러분이 낸 의견을 다른 분은 알 방법이 없다면요?
아니면 파이가 아니라 100만원을 다섯명이 나누어 가지는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1. 보드게임에서의 파이 나누기 상황
위의 상황이야 일종의 인간성의 한계를 시험해보는 극한의 상황이지만 우리에겐 그렇게까지 몰리지 않아도 저런 상황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이 있죠.
바로 께임입니다 께임.

어제 여러분께서 하셨던 브래스 버밍엄, 남들이 늘어놓은 맥주 두개를 내가 다 먹을 것인가 아니면 뒷사람을 위해 한개 빼 줄 것인가.
그저께 플레이하셨던 가이아 프로젝트, 내가 여기서 위성을 하나 더 지어서 위성 미션의 1위를 먹을 것인가, 아니면 공동 2등으로 나눔의 삶을 실천할 것인가.
엊그저께 플레이하셨던 갤러리스트, 특정 작가의 작품을 독점할 것인가, 아니면 해당 작가를 프로모션 해줘서 다른 누군가와 이득을 나눌 것인가.

우리는 게임을 하며 이러한 선택지에 쉴새 없이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게임에서 저러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큰 고민 없이 "나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 을 하죠. 공익? 그게 뭐랍니까 당장 내가 1점 더 먹을 수 있는데요.
그리고 저러한 상황은 인터액션이라는 행위로서 대부분 승리를 위한 플랜으로 존중받고 때로는 신의 한 수 라는 찬사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 만은 없는 게임이 두 개 있습니다. 바로 아임 더 보스와 모던 아트죠.

2. 아임 더 모던 보스 [희망편]

▲ 플레이했던 학생의 한줄평 :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먼저 이야기 할 게임은 협상게임의 대명사, 아 협잡게임이었던가요? 암튼 협 어쩌고의 대명사 아임 더 보스입니다.
아임 더 보스의 경우 매 협상마다 할당된 달러를 협상에 참여한 인원들이 합의하여 나누어 갖습니다.
이 협상이라는게 상당히 기묘한데요, 예전 절찬리에 방영되었던 더 지니어스의 두번째 시즌의 10화였던 빅딜게임의 규칙과 거의 동일합니다.
- 물론 순서는 반대입니다. 빅딜게임이 아임더보스의 룰을 차용했죠.

간단한 상황을 예로 들어 이야기 해 볼까요?
A 플레이어가 주관하는 협상이 있다고 합시다. 다음이 이번 협상의 조건이에요.
1) 총 3명의 플레이어가 필요하며 협상이 완료될경우 12만원의 돈을 분배함.
2) A는 필수
3) B, C중 1명이 필요
4) D, E중 1명이 필요

그리고 아래와 같이 협상이 흘러갑니다.

B : 나는 12만중 3만만 받을게 C 말고 나를 데려가줘
D : 나는 12만중 4만은 받아야겠다.
A : 그럼 내가 먹을 돈은 12만원중 7만원 빼고 5만원인데?
E ; 그러지말고 나도 3만만 받을게 D 말고 나랑 가자
A : 오케이 그럼 B3 E3, 나 6 해서 협상 끝.

다음으로 라이너 크니치아의 잘 만든 경매게임, 모던아트도 간단한 예로 상황을 알아볼까요?
A : 이 작품은 이번 라운드 끝에 100만에 팔 수 있는 작품인거 아시져? 자 한바퀴 경매 ㄱㄱ
B : 20. (에 사서 100에 팔면 80 이득이군)
C : 40
D : 55
E : 안사여..
A : 55 낙찰입니다.

3. 아임 더 모던보스[절망편]

▲ 90원에 사서 100원에 파는 사람이 나오는 순간 분위기가 돌변합니다.

어느정도 계산이 빠른 플레이어라면 두어번의 딜이 오고 간 뒤 바로 해당 매물의 <권장 소비자 가격>을 알아채게 됩니다.
아임 더 보스를 플레이 할 때 이번 협상이 12만원짜리라면 세명이면 4만씩 셋이 나눠가지는게 당연하죠.
모던아트에서 끝나고 100만짜리 물건을 판매한다면 당연히 50만원에 구매해서 출품자가 50의 판매대금을 챙기고 나는 100만원의 시세에서 판매대금인 50만을 제외한 50만의 이득을 챙기는게 공정합니다.
이러한 구조를 알아냈다? "오 이러면 적어도 손해는 안보겠군. 본인 1등하는 상상 함." 이라는 생각과 함께 새로운 자세로 게임에 임하게 되고 한 시간 뒤에 무너지는 억장과 함께 꼴찌를 하게 됩니다.

사실 위에서 예로 들었던 상황은 실제로 잘 일어나지 않는 상황입니다.
해 보신분은 공감하실 아임 더 보스와 모던아트의 플레이 실황이 여기있습니다. 보시져.

<아임 더 보스>
B : 나는 12만중 3만만 받을게 C 말고 나를 데려가줘
D : 나는 12만중 4만은 받아야겠다.
A : 그럼 내가 먹을 돈은 12만원중 7만원 빼고 5만원인데?
E ; 그러지말고 나도 3만만 받을게 D 말고 나랑 가자
D : 그럼 2딸라.
E : 저기 선생님... 이렇게 하시면 저 분만 7만을 가져가지 않겠습니까?
D : 2딸라.
C : 어 그럼 나도 2딸라 할테니 B 대신 나를 데려가줘
B : 1딸라.
C : (대충 그렇고 그런 심한 말)
A : 오케이 그럼 B1 E2, 나 9 해서 협상 끝.

<모던 아트>
A : 이 작품은 이번 라운드 끝에 100만에 팔 수 있는 작품인거 아시져? 자 한바퀴 경매 ㄱㄱ
B : 90. (에 사서 100에 팔면 10 이득 개꿀)
C : 야 이...
D : 아낌없이 주는....
E : 나무같은 shake it....
A : 90만 감사합니다. 땡큐!

4. 너는 왜 내 파이로 남의 배를 불리고 있는가.

▲ 친구가 내 빵을 빼앗더니 비둘기에게 던져주기 시작한다.

앞서 설명했던 대부분의 보드게임에서의 파이 나누기 게임은 남들에게 갈 파이를 내가 더 많이 먹는다. 라는 것을 기본 전제로 깔고있습니다.
즉 경쟁의 관계가 <너희 것을 빼앗아 먹을 나>, <나에게 빼앗길 너희들> 로 정립되죠. 이러한 관계는 이렇다 할 갈등 상황이 생기지 않습니다.
저 친구의 폭식은 (보이지 않는 알력 변동이 있을지언정) 일단 가시적으로 저 친구의 빅토리 플랜에 한 발짝 다가가는 스텝일 뿐 그 이상 이하의 의미는 없어요.

하지만 아임 더 모던보스의 파이나누기는 좀 결이 다릅니다.
이 두 게임의 경쟁의 관계는 <파이를 먹을 나>, <빼앗길 너희들>, <그걸 가져갈 쟤>로 정립이 되는데
이러한 구조에서는 남의 파이를 뺏어먹는 단순한 상황에서 드러나지 않던 <너때문에 개이득보는 쟤>가 무대 정면에 당당하게 등장합니다.

이러한 그림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지금 1등인 B와 10점 차이이므로 내가 20을 먹고 A한테 80을 주더라도 이 거래로 내가 1등이 될 수 있다' 라는 사고의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이 딜에서 내 경쟁자가 선택받는걸 보느니 조금 덜 벌더라도 내가 선택받고 싶다" 라는 사고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아요.
앞서 <이득보는 쟤>를 무대 정면에 당당히 등장시킨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구조는 <이득보는 쟤>가 아니라 <내가 안먹으면 내걸 뺏어먹을 걔> 로 경쟁상대 포커스를 맞춰버리거든요. 내가 싸게 먹어서 쟤가 올라가는건 알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 난 걔보다는 앞서게 되는 소위 "뽕맛"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속터지는건 쟤도 아니고 걔도 아닌 <가만히 앉아서 순위가 곤두박질치는 나> 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저러한 인터액션 구조가 마냥 폐단이냐를 묻는다면 사실 보드게임계의 예송논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내가 1등할 가능성이 없을 때의 스탠스"가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올라오게 되어서 이게 또 복잡해집니다. 3등을 하고 있는 사람은 킹메이킹을 할 수 있는 액션은 배제하고 플레이해야 하나요? 그건 께임이라는 취지에 어긋나잖아요 또. 속상할지언정 비난할 수 없는 상황을 국숫집 국수 뽑듯이 죽죽 뽑아내는 게임이에요 아주그냥.

5. 아임 낫 더 모던보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저는 이런 게임 구조, 즉 누군가의 행동으로 인해 한명을 견제함과 동시에 그 때문에 제 3자가 직접적으로 이득을 챙기는 게임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습니다.

인터액션이 심한 게임과는 좀 다른데... 갑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정해진 리소스를 나눠먹는 게임이라는 표현이 가장 맞을 것 같네요.

저런 게임은 끝난 후 제가1등을 못하면 겉으로든 속으로든 1등에게 퍼준 사람 탓을 하게 되고,

반대로 1등을 하더라도 이게 내가 캐리해서 이겼다!! 보다는 "히힣 꿀 달달하구연" 수준의 경험밖에 이야기 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이런 류의 게임을 꺼낸다면 저 역시 승리보다는 그냥 '한 시간동안 신나게 이빨이나 털자' 라는 쪽으로 접근을 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한시간 뒤에는 "아오 기 빨려" 라는 피로함을 획득하게 되죠.

아마 다음주도, 그 다음주도 여러가지 게임을 펼치게 될거고, 굳이 모던아트나 아임 더 보스가 아니더라도 적잖은 게임에서 크고 작은 저런 일들이 일어나겠죠?

테이블에 함께하는 사람들 중 게임에 익숙하지 않아서든, 자신 옆의 누군가보다 내가 점수가 높길 바라서든,

제 파이를 뺏어다가 남의 입에 넣어주며 자신은 부스러기를 먹었다고 기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아무렴 어때요. 요즘은 전략게임에서 단지 "나는 꼴찌를 못해도 좋으니 쟤를 괴롭히고 싶어" 라는 플레이만 아니라면야 모든 플레이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게임에 임하고 있습니다.

엄격 근엄 진지한 견제와 계산, 인터액션을 만인에게 기대하면 서로 피곤해지더라고요. 딱히 어른스러워 진건 아닌 듯 합니다. 아직도 억장은 터지거든요 ㅋㅋㅋ

대신 그 터지는 억장만큼 컨셉플레이와, "내가 이기기 위한 게임"이 아니라 "재미없는 사람 생기지 않는 게임"에 충실하고자 노력중입니다.

말 나온 김에 내일은 아이들 앞에 아임더보스나 가져가야겠습니다. 그리고 8만짜리 협상에 끼어들면서 당당하게 외칠거에요.

▲위 짤은 음성재생을 지원합니다.

덧) 당연한 얘기지만 모던아트나 아임 더 보스의 경우도 얼마든지 경직된 분위기에서 손익계산을 해 가며 냉정하고 논리적인 흐름으로 게임이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나 모던아트의 경우 종료작품의 판매권리 박탈이라거나, 여러가지 경매시스템의 혼용, 작가에 따른 가치의 차등화 등 전략적인 플레이를 가능케 하는 좋은 메커니즘으로 짜여있는 게임이에요.

덧2) 사실 저렇게 이야기 하긴 했어도 요즘 고등학생 아이들하고 게임을 종종 하다 보니 보통은 애들을 잘 구슬려 애들이 지들끼리 나눌 파이를 앞다투어 제 입에 넣는 모습을 보며 즐기고 있습니다.

말하면서 생각해 보니 양아치가 따로 없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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